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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회[燃燈會]

고려의 상원연등, 지혜의 등불이 사회 통합의 등불이 되다

미상

연등회 대표 이미지

연등행렬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고려의 연등회(燃燈會)는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전국적 규모로 설행된 대표적 국행(國行) 불교 행사이다. 연등회는 인도로부터 전래된 불교 행사로 동아시아에서 일찍부터 국행의례로 자리잡았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시작하여 고려에서 상원연등회가 정기적인 국행의례가 되었다. 상원연등회는 고려 전시기에 걸쳐 국왕으로부터 백성 모두가 참여하여 정기적으로 설행되었으며 고려 국가 의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로, 여타 의례와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2 연등회의 기원

연등은 불을 밝힌다는 의미로, 인도에서 어떤 의식 행사에 수반되는 공양의 한 방법이었다. 이 풍습을 불교가 수용하여 이미 석가모니 생존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불교 문화권에서 널리 성행해온 불교 의식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을 지혜에 비유하며, 불상 앞에 불을 밝히는 연등을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매우 중시하였다. 가난한 여인 난타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바친 작은 등불 하나가 비바람 속에서 왕이 바친 수많은 화려한 등불이 다 꺼진 후까지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현우경(賢愚經)』의 이야기는 지극한 마음에서 우러난 연등이 얼마나 큰 공덕인지 말해 주는 대표적 예이다. 인도에서 특히 석가탄신일에 대대적으로 행해지던 연등 공양은 개인적 행위이기도 하였으나 의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집단적 불교 행사이기도 하였다.

인도에서 시작한 연등은 불교와 함께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에서 연등은 고유의 농경 제례와 결합하여 석가탄신일보다 정월 보름인 상원(上元)에 성행하였다. 당대 국가의 공식행사로 상례화하고, 송대에 이르러 국가행사이자 민간의 절기 풍속으로 정착되었다.

중국의 연등은 다시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866년(경문왕 6) 정월 15일에 국왕이 황룡사로 행차하여 등불을 구경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미 통일신라 시기부터 중국의 상원연등 풍습이 들어와 시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신라에서 중국처럼 연등회가 국가적으로 상례화 하였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사찰에서 연례적으로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보다 앞선 850년 신라의 풍속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중국 산동(山東)의 적산(赤山) 신라원(新羅院)에서 상원에 재회를 정기적으로 개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신라 본국도 정월 15일에 재회가 있었을 것이다. 즉, 통일신라 시기에 정월 15일 설행하는 불교 행사가 있었고 이 행사에서 등불을 밝히고 구경하는 의식이 있었으며, 고려에서 이러한 전례를 수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3 고려 상원연등회의 국행화

‘여섯째, 내가 지극하게 바라는 것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 있으니,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까닭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령 및 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까닭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이 행사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는 것을 결단코 마땅히 금지하라. 나도 처음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연등회·팔관회를 하는 날짜가 국가의 기일[國忌]을 범하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겠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조심스럽게 이대로 시행하라.’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후대 왕들이 반드시 준수할 것을 유훈으로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여섯 번째 조항이다. 고려에서 연등회가 언제부터 설행되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기사는 찾기 어려우나, 위 내용으로 미루어 태조대부터 연등회와 팔관회가 정례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팔관회의 경우 건국 직후인 918년(태조 1) 11월에 팔관회가 처음 실행되어 왕이 의봉루(儀鳳樓)에 나아가 행사를 관람하였으며 이후 해마다 상례로 삼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태조 왕건은 불교 의례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국가의례로 지정하여 해마다 개최하였고 후대의 왕들에게도 이를 지킬 것을 당부하면서 고려에서 상원 연등회(上元燃燈會)와 중동 팔관회(仲冬 八關會)는 국가적인 연례행사가 되어 개경과 서경, 전국의 향읍에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애초에 태조 왕건은 나말여초 시기 각 지방에 할거한 호족 가운데 하나였다. 후삼국의 통일 과정에서 호적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왕건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양의 덕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동시에 민심의 향방에 관심을 기울이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을 강구하여 민심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고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통합을 도모하기 위한 구심점으로 불교를 선택하였다. 부처 앞에서 국왕이나 천민 모두 평등한 중생이었으며 불교 교리는 지역에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쉽게 공감되고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등회의 설행이 폐지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바로 10세기 후반의 성종대인데, 성종은 당 태종의 정치를 모범으로 삼아 이상적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한 정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 싶어 하였다. 특히 982년(성종 1) 성종 즉위 직후 최승로(崔承老)가 국왕에게 올린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 개혁안이 대부분 채택되는데, 그 가운데 13조가 연등회의 폐단에 관한 내용이었다.

‘열셋째, 우리나라는 봄에는 연등회(燃燈會)를 설행하고 겨울에는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기 위해 널리 사람들을 징발하는데, 그 노역이 매우 번거로우니, 감축하여서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시기 바랍니다.’ 최승로로 대표되는 유학자들은 불교를 수신(修身)의 도로, 유교를 치국(治國)의 도로 이해하고 국가의례로 시행되면서 경제적 부담이 컸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지하고 그 자리를 환구 제사와 사직 제사 같은 유교 의례로 대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관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호응을 얻어내지 못하였고, 성종 사후 거란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연등회와 팔관회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결국 현종이 즉위하자 곧 연등회와 팔관회는 부활하게 된다.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을 버리고 청주로 피난을 간 현종에 의해 청주행궁에서 연등회가 열린 후에는 법적으로 항례화 하였다. 이후 고려의 국가의례는 불교와 유교로 이원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고려 상원 연등회의 설행 양상

고려 현종대 연등회에서 눈에 띄는 사실은 상원연등회가 부활되면서 그 행사일자가 정월 보름에서 2월 보름으로 한 달 늦춰지고, 이것을 상례화 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살폈듯 중국의 상원 연등회는 농경 제례와 결합하여 정월 보름에 시행되었다. 이는 일년 농사의 시작을 알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일종의 기곡제(祈穀祭)의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상원 연등이 상례화한 당의 수도 장안은 우리나라 남단의 해남·강진지역과 동일 위도상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정월에 농사를 시작할 수 있으나, 상대적으로 북부에 있는 개경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은 정월에 아직 땅이 해동되지 않아 농사의 실질적 시작은 2월에야 가능하다. 실제로 성종의 교서에 2월부터 10월까지는 만물이 나서 자라는 시기이니 산과 들에 불지르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이 있어, 고려사회에서는 2월부터 10월을 농사가 이루어지는 시기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중국의 2월 보름은 화조(花朝)라 하여 봄이 무르익어 만개한 백화들을 감상하는 날인데, 고려는 이날을 상원절로 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기에 있어 고려와 중국이 한 달 정도의 편차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현종대에 중국에서 전래된 상원 연등회를 고려의 농사 시작 시기에 맞추어 한 달 늦춤으로써 고려화 하였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고려의 상원 연등회 설행과 관련한 자세한 절차는 『고려사』의 상원연등회의(上元燃燈會儀) 조목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상원 연등회는 음력 2월 보름을 전후하여 3일간 개최되었다. 14일은 소회(小會) 행사, 15일은 대회(大會) 행사가 열렸는데,소회일에 열린 중요 행사는 강안전(康安殿) 편전(便殿) 의식과 봉은사(奉恩寺) 행향(行香) 의식이었다. 국왕은 강안전 안마당에서 공연되는 백희(百戲)를 관람한 후 태조의 원찰(願刹)인 봉은사로 가서 태조의 진이 안치된 진전(眞殿)으로 들어가 향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 태조가 정립시킨 연등회에 태조를 기리는 ‘태조신앙’을 중요 의례로 포함시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민심의 결속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보름날 아침에는 대회일 행사가 시작되었다. 대회일 행사는 편전 의식, 진설(陳設) 및 좌정(坐定) 의식, 연회의 3부로 구성되었으며, 국왕의 측근인 태자와 종실(宗室), 추밀(樞密)들과 모시는 신하 등이 함께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는 연회가 행사의 중심이었다. ‘상하가 함께 한다’라는 가례의 개념을 구현하기 위해 참여자 전체가 연회를 통하여 음식과 술, 예물을 나누며 친밀감을 높이는 기회를 가졌다. 의례 절차에 따라 국왕에게 차와 술, 꽃을 올리면 국왕은 그 답례로 다시 봉약, 과일, 술, 음식 등을 하사하였는데, 이는 신분에 상관없이 행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여기까지가 연등회의 공식 행사였다면 이후에는 밤새 축제의 장인 등석연(燈夕宴)이 펼쳐졌다. 등석연에서는 관등놀이를 하며 교방악(敎坊樂)을 감상하고 등석시를 짓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는 야간 통행 금지도 해제되어 왕과 군신 뿐 아니라 백성들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연회에 참여하여 밤새도록 봄날의 연등회를 즐겼다. 등석연은 공식 의례절차는 아니었으나, 군신이 격식을 벗어나 어울리며 친목을 도모하는데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곧, 상원 연등회는 소회일에 편전의식과 봉은사 행향, 대회일에는 편전의식과 진설 및 좌정 의식과 연회 순서로 의식이 진행되었고 마지막으로 정규 의식은 아니지만 등석연이 펼쳐졌다. 편전의식에서는 백희잡기가 공연되고 등석연에서는 관등놀이, 교방악 감상, 등석시 짓기 등이 동반되어 연등회가 종합적 문화축제임을 보여준다 하겠다.

5 고려의 연등회들

연등이란 애초에 연등을 공양하는 의식으로 불교 행사에 종종 수반되었다. 고려에서도 연례적 행사 외에 특별히 치러지는 경우들이 있어, 상원 연등회를 비롯하여 정기적으로 설행되는 연등회 외에, 별도로 개최되는 특설 연등회, 석가탄신일 연등회 등으로 구분되었다. 왕실의 후원 아래 개최되었던 정기적 상원 연등회와 특설 연등회는 국가적 차원으로 설행된 것이었다. 석가탄신일 연등회의 경우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정착하여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6 고려 연등회의 역사적 의미

연등회는 고려 전시기를 통하여 개최된 불교 의례들 가운데 팔관회와 함께 가장 중요한 국행 의례였다. 상원 연등회는 고려 수도인 개경의 왕궁과 태조 진전인 봉은사를 잇는 의례공간을 주축으로 설행되었으며 농경 의례와 결합한 일종이 기곡제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특히 연등회는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고려 백성 모두가 참여한, 계층을 초월한 의례였다는 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 위주의 여타 국행의례와 달리 연등회와 팔관회는 전국민이 참여하는 문화축제의 성격을 가졌다. 특히 연등회가 지니는 정치·경제·문화적 기능은 고려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문선(東文選)』 권4 「등석 치어(燈夕致語)」에 나오듯, 고려에서 연등회는 태조가 시작하여 상례화하였고 그 자손들이 이를 계승하여 이어졌는데, 모든 백성이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누며 결속을 다지는데 큰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중요한 국가의례로서의 연등회는 건국조 태조와 결부되어, 고려 왕실의 자주성이 하락하면 그 위상도 같이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원간섭기에 정기적 연등회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고, 고려말에 이르면 민간에서는 상원 연등회보다 석가탄신일 연등회 곧 사월초파일 연등회의 비중이 점차 커져갔다. 조선의 개국 이후 국행 연등회는 가장 ‘고려적’ 성격을 지닌 행사로서 우선적 철폐대상이 되었다. 결국 조선 이후의 연등회는 민간의 세시풍속으로서 사월초파일 연등회만 지속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월초파일 연등회는, 2012년 4월 6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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