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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팔각구층석탑[月精寺 八角九層石塔]

고려시대 석조미술의 다원성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석탑

미상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대표 이미지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월정사(月精寺) 팔각구층석탑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 기슭에 위치한 월정사 마당에 세워져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의 평면 구성이 팔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9층으로 이루어진 고려시대 석탑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오른쪽 무릎을 구부려 땅에 대고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자세로 탑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보살상이 탑과 함께 만들어져 놓여 있었다. 현재 이 보살상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있다. 이 석탑은 1970년 10월 전면 해체보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석탑의 5층 지붕돌 상면의 네모난 구멍에서 은제도금의 여래입상 1구가 출토되었으며 1층 몸돌 상면의 둥근 사리공 안에서는 동경(銅鏡)·경문(經文)·향목(香木)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청동합 속에 든 은제 합에는 『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 1축과 수정사리병이 출토되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석탑 평면이 다각형으로 변모되었으며 탑 앞에 공양보살상이 함께 조성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시대 독창적인 석탑문화를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석탑이다.

2 석탑 건립시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연구사에 있어서 가장 다양한 학문적 견해가 표출된 석탑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팔각구층석탑 앞에 놓인 월정사 석조공양보살상의 조성시기에 대한 의견은 10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경우 석조공양보살상보다 건립 시기에 대한 시각차는 더욱 벌어져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건립 시기는 우리나라 미술사의 태두인 고유섭에 의해 11세기 후반 경으로 편년이 설정된 이래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1970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해체 수리 시 당시 조사단은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조성 시기를 고려초기로 설정하였다. 이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문헌 검토를 통해 석탑의 조성시기를 범일(梵日)의 문인이었던 신의두타(信義頭陀)가 활동하였던 10세기 전반기로 추정한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이외에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조성 시기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오대산문수사석탑기(五臺山文殊寺石塔記)」를 추정 근거로 하여 13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한 의견도 제시된 바 있다. 이 의견은 현재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월정사 초창기에 세워진 석탑 자리에 새롭게 중건한 탑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 석탑의 조성시기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3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주변지역 발굴조사와 그 영향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주변의 발굴조사는 2001년과 2002년 실시되어 보고서가 2004년과 2005년에 간행되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석탑의 조성시기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졌다. 2001년 석탑 하부 발굴조사 시 석탑의 현 지표면 아래 약 1m 지점에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둘러싸고 있는 평면팔각의 석조 기단이 확인되었다. 이 기단은 장대석과 일정한 크기로 다듬은 돌을 결합하여 만들었으며 제일 바닥층 장대석 위에 덮개돌이 동일한 간격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세워진 면석 위에 덮개돌이 일정하게 돌출된 형식은 건축물의 기단 형식이다. 이러한 이유로 발굴조사단은 확인된 장대석과 다듬은 돌을 결합하여 만든 가구기단(架構基壇)을 석탑의 기단부로 파악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가구기단을 확인한 발굴단은 이 기단을 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다른 석탑의 기단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월정사 석탑 주변 발굴 조사 후 발굴단은 현 석탑과는 별도의 석탑이 지금의 석탑자리에 12세기 전반 이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의하면 12세기 전반 이후 월정사 공양보살상과 함께 조성된 석탑은 14세기까지 존재한 후 시간이 흐른 어느 시점에 폐기되었다고 한다. 그 위에 다른 곳에 있었던 현재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조선 중기 이후 어느 시기에 원래의 가구기단이 있었던 지금의 석탑 기단부 부근으로 이전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굴단의 주장은 이후 진행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조성 시기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촉진시켰다. 발굴단과 별도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주변의 발굴 성과를 분석한 연구 중에는 현재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고려시대 가구기단 위에 조선시대 새롭게 세워진 석탑으로 판단한 경우도 있다. 이외에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조성시기를 제작수법과 탑전공양보살상의 의미 등을 분석하여 10세기 말인 광종(光宗) 개혁정치 후반기에 건립된 것으로 제시한 연구도 있다. 사리장엄구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기존 발굴조사를 통해 석탑의 조성시기가 12세기 이후로 설정된 것이라는 의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사리장엄구를 분석한 연구는 월정사 출토 사리장엄구가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것임을 밝힌 후 석탑의 건립시기 역시 이 시기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건립시기에 대한 의견은 10세기 조성되었다는 견해부터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여기는 주장까지 다양하게 개진되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 이유는 고려시대 석탑 중 기준작으로 삼을 만한 기록이 있는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또한 양식이 다양화되고 지방화가 다방면으로 진행되어 조성시기를 설정하는데 애로사항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적어도 고려시대 석조미술의 편년 설정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미술사적 방법뿐만 아니라 고고학·민속학 등의 학제간 연구가 필요하다.

발굴단에서는 현 팔각구층석탑 아래에 시설된 석회암 보강시설과 지하 가구기단을 구성하는 갑석(甲石, 덮개돌) 사이의 공간에서 백자가 검출되었다고 보고하였다. 현재의 팔각구층석탑과 지하의 가구기단이 별도의 시기에 조성된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백자 바닥편이 제시되었다. 지하 가구기단이 별도의 시기에 조성된 근거 중 하나로 제시된 백자편의 출토 지점은 석회암 보강시설과 지하 가구 기단을 구성하는 갑석 사이이다. 석회암 보강 시설의 경우 1970년 해체 복원 조사 시 시설된 보강시설로 보인다. 또한 1970년대 조사 시 기단부 주변을 석탑 아래 밑바닥까지 굴착한 바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석회암 보강시설과 지하 가구 기단 갑석 사이에서 출토된 백자편은 1970년 지하 굴착 작업 중 감입된 유물일 수 있다.

발굴단이 백자편과 더불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지하 가구기단이 다른 석탑의 기단으로 해석한 이유는 토층관계를 통해서이다. 팔각구층석탑 밑에 있는 지대석의 위치가 현 지표 10~20cm 아래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지대석 부근에서는 백자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지하 가구기단은 현재의 팔각구층석탑 지대석과 지대석 높이의 생활면이 공존해 있으므로 현재의 팔각구층석탑은 조선시대 생활면 위에 건립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지하 가구기단과 현재의 팔각구층석탑이 별개의 시간 단위 속에서 각각 조성된 것으로 발굴 결과를 해석할 이유는 없다.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월정사 지하 가구기단은 현재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기단으로 볼 수 있다. 발굴조사 통해 노출한 지하 가구기단의 범위는 매우 협소하다. 이러한 이유로 발굴 결과를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크지만 그럼에도 발굴조사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월정사 석조공양보살상과 지하 가구기단은 불탄 흔적이 남아 있는 토층 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발굴단이 해석한대로 현재 석탑이 있는 부근 일대가 12세기 초반경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위에 석조공양보살상과 가구기단이 시설되었음을 방증한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발굴조사를 통해 노출된 지하 가구기단과 함께 현재의 팔각구층석탑이 함께 건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팔각 가구기단의 정중앙에 석탑이 건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각 가구기단 한 변의 길이는 244cm이다. 발굴조사 노출된 팔각면을 연결해 보면 현재의 팔각구층석탑은 팔각의 가구기단 정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즉, 팔각구층석탑은 기단부의 팔각 가구기단을 명확히 의식하고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팔각 가구기단은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동일하게 설계되어 조성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만약 발굴단의 주장대로 팔각 가구기단 위의 석탑이 14세기 이후 어느 시점에 폐기되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그 자리에 지금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세웠다면 지금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팔각 가구기단 정중앙위에 오기 힘들다. 발굴단의 주장대로 이해한다면 현재의 팔각구층석탑이 조선중기에 세워질 때 팔각가구기단은 지하에 매몰되어 있었던 상태이기 때문이다.

둘째, 팔각 가구기단의 지름 때문이다. 월정사 석조공양보살상과 팔각가구기단은 동시에 조성되었다. 이는 두 석조미술품의 하단부가 동일한 토층 위에 조성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팔각 가구기단 지대석과 석조공양보살상의 지대석 받침이 연결되고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지름 8m에 가까운 팔각 가구기단을 탑구(塔區: 탑의 바닥을 돌로 둘러 보호하는 시설) 형식의 기단부로 만들고 그 중앙에 팔각구층석탑을 건립한 것으로 이해된다. 지름 8m에 가까운 팔각 가구기단이 탑의 지대석이었다면 원래의 탑은 지름 3m 내외인 현재의 팔각구층석탑보다 월등히 높은 탑이었을 것이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팔각의 가구기단과 팔각구층석탑을 별도의 시기에 건립된 유구로 해석하면 월정사 마당에 현재보다 기단부가 3배 가까이 큰 석탑이 존재했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는 유구의 과도한 해석이다. 팔각구층석탑과 지하의 가구 기단은 동시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 현재의 팔각구층석탑과 석조공양보살상의 관계 때문이다. 석조공양보살상의 기단부 하대석은 팔각 가구기단 면석 부분과 높이가 거의 같다. 발굴단은 팔각의 가구기단과 석조공양보살상은 같은 시기로 보았다. 그런데 현재의 팔각구층석탑은 발굴단의 논리로 본다면 조선 중기 정도에 세워지거나 옮겨온 것이 된다. 지상에 노출된 현재의 팔각구층석탑 지대석의 높이는 석조공양보살상 대좌 상대석 상면부의 높이가 된다. 새롭게 팔각구층의 높은 탑을 건축하면서 탑전석조공양보살상의 대좌 대부분을 땅 밑에 매몰된 채 방치해 두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결국,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처음 만들어 졌을 당시에는 석탑과 더불어 팔각의 가구기단과 석조공양보살상의 대좌가 모두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4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조성시기

팔각구층석탑의 조성시기 상한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토층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발굴단은 석탑과 석조공양보살상의 기단부 토층이 화재로 폐기된 잔재가 남아 있는 토층보다 위에 조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폐기물이 남아 있는 토층에서는 동전과 청자편, 귀목문 막새 등 12세기 전반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12세기 전기 이후를 팔각구층석탑의 상한선으로 설정할 수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하한 시기는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중 시대가 가장 늦은 유물로 설정할 수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와 동반 출토 유물의 조성 시기는 대체로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 경으로 평가된다. 사리장엄구는 외부 유입물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석탑의 편년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사리장엄구 중 제작시기가 가장 늦은 것이 석탑의 조성시기와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석탑에서 수습된 전신사리경의 경우 아직 두루마리상태로 보존되고 있으나 외형을 통해 보았을 때 판본류가 아닌 권자본(卷子本)인 것으로 보아 12세기 중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석조공양상은 12세기 중기 경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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