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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마도선

수장(水葬)된 역사, 수면 위로 부상하다

미상

태안 마도선 대표 이미지

태안 마도 1호선(복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해양유물전시관

1 개요

기술의 발달로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무대는 바다까지 확장되었다. 불의의 사고로 바다에 잠겨버린 과거의 흔적을 고도화된 최신 기술로 건져 올림으로써 현대인들은 더욱 생생하게 과거인의 삶을 마주하게 되었다. 2008~2009년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서 800년 만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마도 1호선. 이 낡은 선박은 타임캡슐과 다름없다는 세간의 비유에 걸맞게 800년 전 고려인의 곡물, 음식, 석탄 등 다량의 유물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었다. 이듬해 추가 인양된 마도 2호선, 2011년과 2015년 각각 수중발굴이 진행되었으나 선체는 아직 바다에 남겨진 마도 3호선과 마도 4호선 또한 침몰 당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수백 년 전 과거로 현대인들을 안내하는 통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 잊혀진 역사, 스스로 말 걸다: 태안 마도선의 발견과 발굴

한국 수중발굴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작은 전라남도 신안군 앞바다에서 원(元)의 무역선으로 추정되는 침몰 선박과 수중 유물들을 인양한 것이다. 이후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14척의 침몰 선박과 수중 유물에 대한 조사가 진행된 결과 14척의 선박 중 12척이 한국의 전통 선박이며 통일신라시대 선박 1척과 조선시대 선박 1척을 제외한 나머지 10척이 고려시대 선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태안군 마도 해역에서는 12척의 한국 전통 선박 가운데 4척이 침몰 상태로 발견되었다. 당초 태안군 앞바다는 어망에 고려청자가 걸려 나온다는 신고가 빈번하게 접수되어 2000년대 중반부터 수중발굴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조사 결과 2007년 고려청자 수송선이었던 태안선이 발견된 데 이어 2008년 인근 마도 해역 수중에서는 ‘태안 마도선’으로 통칭되는 여러 척의 침몰 선박들이 확인되었다. 이 발견을 계기로 한국 수중발굴의 역사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태안선과 마도선 내에 그전까지 한국 전통 선박에서 볼 수 없었던 다수의 목간(木簡)이 수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목간은 선박에 실은 화물의 발송처·발송자·수취인을 비롯하여 목간 작성 시기 등을 기재한 일종의 운송장으로, 침몰 선박의 용도와 운행 시기 등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목간을 통하여 연구자들은 4척의 태안 마도선 가운데 마도 4호선을 제외한 3척이 고려시대 선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마도 4호선만 조선 건국 이후인 15세기 전반 운행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마도 1호선은 1207~1208년 사이, 마도 2호선은 1213년 이전, 마도 3호선은 1264~1268년 사이 침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서에는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13세기에만 최소 3척의 대형 선박이 마도 해역에서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역사서에서 외면한 조운선 침몰 사건, 이 비극을 4척의 태안 마도선은 600년 혹은 8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현대인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3 비극적 공간 속에 박제된 옛 삶: 태안 마도선 출토 유물

태안선부터 마도 4호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척의 대형 선박이 태안군 앞바다에서 집중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태안군 마도 해역 인근에는 험난하기로 유명한 안흥량(安興梁)이 있다. 안흥량은 난행량(難行梁), 즉 지나가기 어려운 해협이란 뜻의 별칭을 갖고 있을 만큼 항해사들의 속을 썩이던 항로였다. 전근대 시기 중국과의 교류, 한반도 남부와 중북부의 물자 이송 등을 위해 서해안을 항해하던 선박들은 항상 안흥량을 지날 때마다 조난사고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였고, 실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 지역에서는 선박이 침몰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였다.

불의의 사고로 순식간에 침몰되었을 4척의 태안 마도선. 역설적이게도 이 비극 덕분에 현대인들은 고려인과 조선인의 삶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태안 마도선에서는 다량의 청자와 항아리를 비롯하여 고려·조선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이색적인 유물이 발견되었다. 마도 1호선의 경우 석탄과 함께 고등어젓·게젓 등의 젓갈류, 벼·조·메밀 등의 곡물과 메주가 확인되었다. 2호선에서는 식기류 외에 알젓·꿀·참기름·누룩 등의 화물명이 기재된 목간이, 3호선에서는 말린 홍합과 생전복·상어·개고기포 등의 화물명이 기재된 목간이 발견되어, 고려인의 식생활을 가늠해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외에도 조약돌로 만든 장기알이나 상어뼈, 녹용 등이 3호선에서 수습되어 고려시대 유희 문화와 사치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편, 유일하게 조선시대 선박이었던 마도 4호선에서는 철제솥·숟가락·젓가락 등의 주방용품과 함께 패랭이·짚신과 같은 하층민의 생활용품이 출토되었고, 다량의 청자가 쏟아져 나온 마도 1~3호선과 달리 조선전기의 특징적 유물인 분청사기가 발견되었다. 왕조 교체와 함께 고려의 청자 문화가 쇠퇴하고 새로운 문화 흐름이 나타났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그 배들이 마도를 지난 이유: 태안 마도선과 고려·조선의 조운제도

태안 마도선은 조세 운송을 담당한 조운선(漕運船)으로 이해된다. 마도선에 적재된 화물 대부분이 전세(田稅)나 공물(貢物) 성격의 곡물과 지역 특산물일 뿐만 아니라 운송장인 목간에서도 개경·한양의 유력자나 관청에 대한 정보가 다수 확인되기 때문이다. 즉, 수백 년 전 태안 해역에서는 마도선과 같은 거대한 선박들이 한반도 남부의 조세를 수도의 경창(京倉)까지 운송해야 하는 중대한 업무를 안고 거친 날씨 속에 출항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근대 시기에도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원활한 조세 수취와 운송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고려는 건국 후 바닷가와 강가의 60개 포구를 거점으로 조세를 운송하다가 지방제도 정비 후 전국에 12개의 조창(漕倉)을 두었다. 조창은 전국 각지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를 보관하였다가 수도로 운송하던 물류 거점이다. 이후 안란창(安瀾倉)을 추가하며 고려에서는 13조창을 운영하게 되는데, 마도선이 침몰한 안흥량 일대는 고려시대 조창 중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추정컨대 마도 1~3호선은 전라도 남원부(南原府)·고부군(古阜郡)에서 거둔 조세를 싣고 고려 수도 개경을 향해 안흥창을 떠났으나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빠른 해류에 휩쓸려 침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도 4호선은 전라도 나주(羅州)에서 조세를 싣고 한양 광흥창(廣興倉)으로 향하다가 침몰한 조운선이었다. 4호선에서 발견된 목간 대부분에 나주가 발송처로, 광흥창이 수신처로 적혀있어 이와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전기 나주에 설치된 조창은 영산창(榮山倉)으로 고려시대 13조창 중 하나인 해릉창(海陵倉)의 후신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한양 천도가 진행되며 한강을 활용한 조운이 활성화되었고 이에 따라 고려의 조창 시스템이 대거 재조정되었으나, 이례적으로 나주에서는 고려시대 해릉창이 영산창으로 이어졌다. 서해안 항로에 안흥량과 같은 위험지대가 존재하였음에도 조선 정부 또한 한반도 남부의 풍부한 물자를 한양까지 운송하기 위하여 기존의 나주 조창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15세기 전반 마도 4호선은 나주 일대의 조세를 싣고 영산창을 출발하여 북상하였으나, 마도 1~3호선과 마찬가지로 태안군 마도 해역에 이르러 거친 물살을 이기지 못한 채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5 태안 마도선을 통한 역사 읽기: 마도선의 목간 기록

앞서 한 차례 언급되었듯 마도선에서 발굴된 목간에는 수취인으로 고려·조선의 유력 정치인과 관청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마도 1~3호선의 목간에는 사료에서도 확인 가능한 이름들이 등장하여 주목된다. 이러한 기록은 마도선의 침몰 시기를 추정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수백 년 만에 등장한 마도선을 생생한 역사적 무대로 탈바꿈시켰다.

마도 1호선 목간에서는 대장군(大將軍) 김순영(金純永), 별장(別將) 권극평(權克平), 교위(校尉) 윤방준(尹邦俊),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윤기화(尹起華) 등의 인물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연구자들의 이목을 끈 이름은 김순영이다. 김순영은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등장하는 무신으로, 무신정권기 최고 권력자 최충헌(崔忠獻)의 눈에 들기 위하여 가족을 저버린 냉정한 인물이었다. 1199년(신종 2) 8월, 김순영은 자신의 사위인 김준거(金俊琚)가 최충헌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자 최충헌에게 사위의 모반을 고발하였다. 그 결과 김준거는 극형인 참형에 처해졌고 그의 주변 인물들은 사형 또는 유배형을 받거나 노비가 되었으며, 정6품 낭장(郞將)이었던 김순영은 ‘공’을 세운 대가로 종3품 대장군에 올랐다. 마도 2호선 목간에서는 대경(大卿) 유(庾)와 견룡(牽龍) 기(奇), 도장교(都將校) 오문부(吳文富), 이극서(李克偦) 등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이극서는 1219년(고종 6) 장군 김취려(金就礪)와 함께 의주(義州)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이듬해 정2품 평장사(平章事)까지 역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극서의 활동 시기인 120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대경 유씨와 견룡 기씨를 추론해보면, 유자량(庾資諒), 기홍수(奇洪壽), 기윤위(奇允偉), 기존정(奇存靖)이 유력한 후보로 손꼽힌다. 유자량은 문신이었음에도 평소 무신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무신정변에서 살아남았던 인물이고, 기홍수는 최씨 무신정권 초기의 원로 대신이었으며, 기윤위·기존정 또한 1210년대에 활약한 무신들이었다. 즉, 마도 1호선과 마도 2호선은 비슷한 시기 개경에 있던 무신 유력자들에게 조세를 운송하기 위하여 출항한 선박이었던 것이다.

마도 3호선 목간에서는 1~2호선보다 반세기 뒤의 인물들이 확인된다. 신윤화(辛允和)와 유승제(兪承制)가 등장하는데, 신윤화는 1260년(원종 1) 8월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사실이 『고려사』에서 확인된다. 유승제는 승제, 즉 승선(承宣)직에 있는 유씨란 의미로, 신윤화와 동시기인 1250~60년대에 승선을 역임한 유천우(兪千遇)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이 밖에도 3호선 목간에서는 김영공(金令公)이라는 인물이 확인되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신윤화·유천우가 활동하던 시기 영공으로 존칭될 수 있는 권력자는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김준(金俊)이 유일하다. 즉, 마도 3호선은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여전히 몽골과 접전을 벌이던 시기 서해안을 항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화도의 국왕과 귀족들을 위하여 육지의 조세를 운송하던 마도 3호선과 선박 안의 일꾼들, 이들에게 닥친 비극은 8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기록되고 기억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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