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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동상

황제의 관을 쓰고 있는 고려 왕조의 신성한 상징물

미상

1 개요

태조 왕건 동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은 자세로 만들어진 착의형 채색 나체상으로 개경(開京, 현재의 개성) 봉은사(奉恩寺) 태조진전(太祖眞殿)에 안치되어 고려 전 시기에 걸쳐 태조를 상징하는 신성물로 숭배되었던 대상이다.

2 태조 왕건 동상의 모습과 특징

태조 왕건 동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은 자세로 만들어진 채색 나체상이다. 발바닥에서부터 관의 상단까지의 높이는 138.3cm이고, 발바닥에서 엉치 하단까지는 40cm, 엉치 하단에서 머리에 쓴 관의 하단까지의 길이는 81cm이다. 실제 사람과 유사한 크기로 제작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태조 왕건 동상을 살펴보면 나체로 만들어진 데다 작은 성기까지 표현되어 있어 과연 고려 사람들이 이 동상에서 어떻게 신성함을 느꼈을지 의문이 들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현재 동상에 고려 시대 당시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 동상은 어떤 모습으로 고려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을까.

먼저, 태조 왕건 동상은 현재 칠이 벗겨져 뼈대인 구리 조각만이 남아 전체적으로 푸른 구리 녹이 덮여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기록을 보면 태조의 ‘소상(塑像)’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흙으로 빚은 상을 소상이라고 한다. 1270년(원종 11),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는 중 이판동(泥版洞)에 임시로 집을 지어 봉은사 태조 소상 등을 안치하였다는 기록과 1290년(충렬왕 16) 몽골 장수 합단(哈丹)의 침공에 대비해 태조 소상을 강화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구리로 만든 뼈대 조각상 위에 살구색으로 두텁게 칠을 하여 실제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조 왕건 조각상을 잘 살펴보면 귀 뒷바퀴, 손가락 사이사이 등의 부위에 피부색 안료가 채색된 흔적이 남아있다.

고려 말기 잦은 외적의 침공으로 인한 혼란 상황에서 태조 왕건 동상의 관리가 소홀해지게 되었다. 고려가 멸망한 직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 태조의 주상(鑄像)을 마전군(麻田郡)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주상은 쇠를 녹여 만든 상을 의미한다. 태조 왕건 동상에 칠해져 있던 피부색 안료가 부분적으로 벗겨지자 피부 속의 금속 부분이 노출되어 이를 주상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조 왕건 동상이 발굴된 후 가장 주목받은 것 중 하나는 바로 동상이 쓰고 있는 관이다. 이관은 중국의 황제가 쓰는 24량의 통천관(通天冠)으로 추정된다. 통천관은 중국 진(秦) 대부터 황제의 관으로 쓰였다. 태조 왕건 동상이 쓰고 있는 통천관에는 고려만의 독창적인 특징도 함께 나타난다. 관의 상단에 해와 달을 형상화한 원형 판이 달린 것이다. 본래는 8방위에 하나씩 달려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일부가 손상되어 6개만이 남아 있다. 현재 동상의 관 부분에는 금으로 도금한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태조 왕건 동상은 본디 금관을 쓰고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태조 왕건 동상의 권위는 금관 뿐 아니라 옷과 허리띠, 가죽신 등을 통해서도 나타났을 것이다. 태조 왕건 동상은 출토되었을 때 몸통 부분에 부식된 비단 천 조각 등이 붙어 있었고 옥 허리띠의 부품 몇 건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는 태조 왕건 동상이 땅에 묻혔을 당시 옷이 입혀진 상태였다는 점을 알려준다. 고려사에는 최충헌이 봉은사 태조진전에 겉옷과 내의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태조 왕건 동상에 입힐 옷을 바친 것으로, 태조 왕건 동상에 옷이 입혀져 있었다는 점을 확실히 알려준다. 이런 착의형 나체상은 동명왕(東明王) 상에도 보이는 것으로 고구려 계통의 토속적인 조상 양식으로 생각된다. 즉, 태조 왕건 동상은 고구려 전통 제례 문화에 뿌리를 두고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태조 왕건 동상에 불교적인 신성함이 형상화된 면도 있다. 신체 여러 부위에 부처와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지닌 신체적 특성이라는 삼십이대인상(三十二大人相)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작은 성기는 삼십이대인상 중 마음장상(馬陰藏相)을 표현한 것이다. 마음장상은 성기가 말의 것처럼 오그라들어 몸 안에 숨어있는 형상을 이르는데, 이는 전생에 색욕을 멀리함으로써 성취하였다는 특징으로 작을 때에는 8세 동자의 성기 크기에 이른다고 한다. 이 외에도 평평한 발 모양 등 발과 손, 및 어깨 모양 등에 삼십이대인상의 특징이 숨어있다.

이상의 특징을 종합하면 태조 왕건 동상은 고구려 전통 제례 문화와 불교 문화를 바탕으로 사람과 같은 크기의 나체상으로 제작하여 피부, 머리카락 등을 색칠하고 권위를 상징하는 옷을 입히고 금을 입힌 황제의 관을 쓴 상태로 어탑(御榻)에 안치되어 고려인의 숭배를 받던 신성한 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봉은사 태조진전과 태조 왕건 동상 숭배

태조 왕건 동상이 안치된 곳은 개경 봉은사 태조진전이었다. 태조 왕건 동상과 봉은사, 그리고 봉은사 태조진전은 951년(광종 2) 무렵에 함께 만들어진 후 고려 시대 내내 혼합된 일체로 여겨졌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 태조 왕건 동상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봉은사와 봉은사 태조진전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951년, 광종은 개경의 성 남쪽에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창건하여 태조의 원찰(願刹)로 삼고 동쪽에는 불일사(佛日寺)를 창건하여 어머니 유씨(劉氏)의 원찰로 삼았다. 원찰이란 개인의 안녕이나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설치된 사찰이다. 태조 사후 처음으로 태조를 기리는 공간을 창건한 것이다. 이는 호족들의 세력 경쟁으로 왕위 계승 분쟁을 겪었던 광종이 호족을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태조의 신성한 권위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 태조를 계승한 국왕의 권위를 아울러 높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원찰을 함께 창건한 것은 어머니를 높혀 태조의 여러 아들 중 그 계승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봉은사 태조진전과 태조 왕건 동상은 고려 정치적 지향의 변화와 더불어 부침을 거듭하였다. 성종(成宗) 대에 중화(中華)를 숭상하였던 화의론자(華夷論者)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경제와 관련되어 바꾸기 힘든 거마의복(車馬衣服)을 제외한 모든 제도는 중화의 것을 따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태묘(太廟) 제도를 도입하여 태묘에서 국왕의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더욱이 화이론자들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이 저속한 토속 문화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992년(성종 11)에 태묘가 건립되자 봉은사 태조진전과 태조 왕건 동상에 대한 의례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현종(顯宗) 대에 들어서 봉은사 태조진전이 다시 등장하였다.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수도를 떠나 남쪽으로 피난을 다녀오자 개경은 대부분이 불에 타 있었다. 봉은사는 이때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본 것 같지는 않으나 성종 대 이래 관리가 소홀했기에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불타버린 개경을 복구하고 중요한 시설들을 재건했는데 특별히 봉은사를 함께 재건한 것이다. 사료상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때부터 봉은사와 태조 왕건 동상은 태조 왕건을 숭배하는데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1038년(정종 4)에는 봉은사 태조진전의 태조상을 알현하는 의례가 법식으로 확정되었다. 정종(定宗)은 연등회(燃燈會) 날 저녁에는 반드시 왕이 봉은사에 직접 와서 태조진전에 분향하는 것을 상식(常式)으로 정하였다. 이는 현종 대 봉은사를 재건한 이래 지속적으로 행해졌던 봉은사 태조진전에 대한 제례를 공식적으로 규정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상원연등회(上元燃燈會)의 태조상 알현 의식은 『고려사』 예지(禮志)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고려 국왕은 연등회 날이나 태조의 기일 등에 봉은사 태조진전에 행차하여 태조 왕건 동상 앞에서 의례를 행했다.

고종(高宗) 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하게 된 상황에서도 봉은사 및 태조 왕건 동상에 대한 숭배 의례는 여전히 이루어졌다. 1234년(고종 21) 고종은 천도 후 처음으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이 봉은사는 개경에 있는 봉은사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종은 참정(參政)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로 삼아 천도 당시 모셔온 태조 왕건 동상을 안치시켜 놓은 것이다. 당시 강화의 궁전, 절 등의 이름을 모두 개경의 것을 따라 붙였다고 하는데 태조 왕건 동상을 모신 공간의 이름은 당연히 봉은사가 되는 것이다. 원종(元宗) 대 개경 환도 시 태조 왕건 동상은 다시 개경으로 모셔져 옮겨졌다.

고려 말기에 정국이 혼란해지고 태조 왕건 동상에 대한 관리도 소홀해지는 상황에서 국왕의 권위와 신성성을 상징하는 태조 왕건 동상은 권신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이인임은 우왕을 옹립한 뒤 태조진전에 나아가 태조의 혼령에게 왕위에 도전하는 세력으로부터 새 왕을 받들 것을 맹세하였고, 이성계는 창왕을 폐하고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태조진전에서 태조에게 고한 후 제비뽑기를 하여 새 왕을 정하기도 하였다.

4 태조 왕건 동상의 매장과 재발견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건국 직후 왕씨의 후손에게 고려 태조의 제사를 마전군에서 받들도록 명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 퍼져 있던 태조 왕건과 관련된 제례 물품이 모두 마전군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고려 태조의 주상, 즉 태조 왕건 동상이 마전군으로 옮겨진 것도 이때다. 곧이어 조선 태조는 고려의 다른 여러 왕의 제사 역시 마전의 고려 태조 묘에서 함께 지내도록 하였다. 태조 묘에 합사된 고려 임금은 태조·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렬왕·공민왕 이상 8명이었다.

조선 세종(世宗) 대에 이르러 고려 태조묘와 관련된 제례가 크게 개편되었다. 1423년(세종 5), 세종은 신하들에게 고려 태조묘에서 태조는 초상(肖像)을 쓰고 나머지 임금은 위판을 쓰고 있으니 고려 태조 역시 위판을 쓰는 것이 어떤가 물어보았다. 초상은 조선 태조 원년에 고려 태조묘에 옮겨놓은 태조 왕건 동상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또한 8명의 임금이 모두 공덕이 많아 제사를 지내야 할 만한 임금인가 물어보았다. 이는 제사 대상을 축소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물어본 것이다.

제사 대상의 축소 문제는 1425년(세종 7년)에 나라의 종묘도 5실만을 제사 지내는데 전조의 사당에 8위를 제사 지내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태조·현종·문종·원종 4명의 임금만을 남겨두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4위의 임금을 모신다고 하여 사당의 이름을 사위사(四位祠)라고 하였다가 곧 숭의전(崇義殿)으로 고쳤다. 숭의전 제례는 조선왕조의 국가 제례 체계에서 중사(中祀)로 정해져 제사가 행해졌다.

한편, 고려 태조의 초상을 위판으로 대체하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명령은 보이지 않지만 1428년(세종 10)에 태조의 주상이 문의현(文義縣)에 있다는 기록을 보면 위와 비슷한 시기에 초상을 위판으로 대체하고 기존에 있었던 초상, 즉 주상을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1428년, 마침내 세종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려 왕조 인물들의 초상화 및 태조와 혜종의 상을 개성으로 모아 각 능 옆에 묻도록 명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 동상은 태조의 무덤인 현릉(顯陵) 한 켠에 묻혀 500년 넘게 땅속에 잠들게 된 것이다.

1992년, 태조 왕건 동상은 드디어 빛을 다시 보게 되었다. 북한은 당시 현릉 확장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포크레인으로 현릉 근처 땅을 파던 중 동상이 걸려 나온 것이다. 당시 공사 현장에는 이를 확인해줄 만한 학자가 없었기에 공사 인부들은 대수롭지 않게 동상을 파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동상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동상의 표면에 묻어있던 비단 조각, 금 조각들이 대부분 제거가 되고 말았다. 또한 동상의 매장 상태나 동상과 함께 매장되었을 다른 유물들에 대해 조사를 할 기회는 아쉽게도 없어지고 말았다.

태조 왕건 동상은 출토 직후 불상으로 추정되어 개성 고려역사박물관에서 청동불상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그 후 남북간의 공동연구를 통해 이 동상이 태조 왕건의 동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은 왕건청동상이라는 이름으로 평양특별시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마침내 태조 왕건 동상은 500여 년의 시간을 건너 본래의 이름을 되찾고 고려 왕조의 신성한 상징물로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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