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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한집[破閑集]

현재까지 전해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화집

1260년(원종 1)

파한집 대표 이미지

파한집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파한집(破閑集)』은 무신집권기의 문인이자 관리였던 이인로(李仁老)가 지은 책이다. 당시 전해지던 역대의 시문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편찬하였다. 이 책에는 역대의 시와 글을 소개하고 이인로가 평을 붙인 시화와 자신이 쓴 수필과 시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현재 전해지는 시화집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문학적·역사적 의의가 크다.

2 무신 집권기의 문인 이인로의 저술·편찬 활동

미수(眉叟) 이인로는 1152년(의종 6)에 태어나 1220년(고종 7)에 사망하였다. 1170년(의종 24)에 무신정변武臣政變)이 터져 무신 집권기가 시작되었으니, 이인로의 삶은 고려가 큰 시대적 변화를 겪었던 시기에 걸쳐 있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이전의 고려에서는 문치(文治)가 강조되며 문신(文臣)들이 정계의 주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몇몇 집안들은 대대로 고위 관리를 배출하고 서로 혼인을 맺으며 이른바 ‘문벌(門閥)’을 형성하였다. 이인로는 대표적인 문벌이었던 인주(仁州) 이씨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였던 이오(李䫨)는 문종(文宗)~예종(睿宗) 시대에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던 명망 있는 정치가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조부모와 부모에 대한 기록을 찾기는 어려우나, 이인로가 ‘8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한’ 집안이라 자랑했던 것을 보면 이들도 적어도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인로의 성장기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어려서 부모를 모두 여의고 고아가 되어 친척의 손에 자랐으며, 이 글에서 별도의 사료 전거를 밝히지 않은 경우, 대개 발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성인이 될 무렵에는 무신정변이 발발하여 세상이 크게 달라졌던 것이다. 정변 과정과 그 이후의 혼란 속에서 수많은 문신이 목숨을 잃었고, 사회 분위기도 흉흉해졌다. 권력을 쥔 무신들은 각종 비리와 횡포를 일삼았고, 문신들의 위상은 크게 낮아졌다.

이인로는 1175년(명종 5)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한 뒤 이곳에서 공부하였고, 1180년(명종 10)에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29세에 관리의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이인로의 벼슬길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처음 계양관기(桂陽管記)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는 직사관(直史館),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비서감 우간의대부(秘書監 右諫議大夫)를 거쳤다. 마지막 관직이었던 우간의대부는 정4품이니 그래도 비교적 승진을 했지만, 그 이전 대부분의 관직 생활은 하위 관품에 머물며 전전하였다. 그가 당시의 재상에게 올린 시에서 ‘일찍이 〈글을〉 배워 벼슬자리에 나가려 구했으나, 시를 짓는 것은 아득히 힘든 일이네, (중략)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은 가득하나, 누가 야윈 이웃을 구해주려나.’라는 구절을 쓴 것은 이러한 현실과 관련이 깊었다.

장원급제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던 이인로는 이런 처지에 크게 좌절하였던 듯하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의 많은 문신들은 비슷한 시대적 한계를 겪어야 했다. 이들은 모임을 만들어 글을 지으며 세월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모였던 ‘죽림고회(竹林高會)’였다. 그 중 한 명인 임춘, 즉 서하(西河)가 불우한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나자, 이인로는 그의 글을 모아 『서하집(西河集)』을 편찬해 주었다. 또 선배 관리들의 모임인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에서 나온 글을 모아 『쌍명재집(雙明齋集)』을 엮었다. 자신의 고부(古賦)와 고율시(古律詩)를 모아 『은대집(銀臺集)』을 펴내기도 하였다. 『쌍명재집』과 『은대집』은 안타깝게도 전해지지 않으나, 『서하집』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소중한 유산이다. 이렇듯 이인로는 활발하게 저술과 편찬에 힘써 문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하였다.

3 『파한집』 간행 경위와 전래

『파한집』은 이인로가 심혈을 기울여 편찬한 또 하나의 역작이었다. 실제로 목판에 새겨져 간행이 된 시기는 이인로가 사망한 뒤에도 한참 지난 시기였으나, 생전에 이미 완성되어 문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히 편찬의 동기를 가지게 된 것도 앞에서 언급한 죽림고회 활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파한집』의 발문에 이인로가 밝힌 동기가 적혀 있다. 이인로는 그의 벗들과 함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중국〉 여수(麗水) 물가에는 반드시 좋은 금이 있으니 형산(荆山)의 아래에 어찌 좋은 옥이 없겠는가? 우리나라 국경이 봉래(蓬萊)와 영주(瀛洲)에 인접하여 있어 예로부터 신선(神仙)이 사는 나라로 불렸다. 그 신령함을 모으고 빼어남을 길러 5백년마다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중국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낸 사람으로 학사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앞에서 선창하고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뒤에서 화답하였으며, 이름난 선비와 시를 잘 짓는 승려로서 제영(題詠)에 뛰어나 다른 나라에서 명성을 떨친 사람이 대대로 이어졌다. 만약 우리들이 수집하고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면, 묻히고 없어져 전하지 않을 것임을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에 이인로는 ‘안팎에 남아 있는 제영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것을 수습한 뒤, 엮고 분류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주도한 것은 이인로였으나, 당시 죽림고회의 구성원들을 비롯해 여러 문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진 책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으나, 해동(海東)의 글은 대대로 천하에 명성을 떨쳐 왔다는 말을 통해 자신들이 그 뒤를 잇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펴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 느껴진다.

『파한집』의 편찬이 정확히 언제 마무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다소 모호하다. 「발문」에 ‘문집이 이미 완성되었으나 미처 임금에게 아뢰지도 못한 채, 불행하게도 대단치 않은 질병이 있어 홍도정(紅桃井)의 집에서 돌아가셨다.’라는 문장이 있어서, 1220년(고종 7)에 이인로가 사망하기 직전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중국 국가도서관에 소장된 『보한집(補閑集)』에 이장용(李藏用)이 쓴 발문에는 이인로가 『파한집』을 숭경(崇慶) 연간, 즉 1212년(강종 1)~1213년(강종 2) 사이에 적었다고 하여, 이를 따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한편, 『파한집』 본문에 이인로가 ‘금상(今上)’, 즉 ‘지금의 임금’이라 지칭한 대상이 희종(熙宗)임에 주목하여, 1211년(희종 7)에 이미 완성이 되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파한집』의 발문에도 아들 이세황(李世黃)이 1260년(원종 1)의 간행 시점에 ‘만세토록 자손들의 보배가 되기를 기약하며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잊지 않은 것이 거의 50년이었다.’라고 한 점도 이인로의 탈고 시점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준다.

하지만 『파한집』이 목판에 새겨져 간행된 것은 훨씬 후대인 1260년(원종 1)이었다. 몽골의 침입과 고려의 강화도(江華島) 천도 등을 겪으며 『파한집』은 필사본의 형태로만 유통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원고를 간직하고 있던 이세황이 기장현(機張縣)에 지방관으로 나가 있을 때, 안렴사(按廉使)로 태원(大原) 왕공(王公)이 와서 이인로의 잡문(雜文) 300여 수와 『파한집』 세 권을 살펴 조사하고 목판에 새기도록 하였다. 이렇듯 간행이 늦어지면서, 현재 『파한집』에 수록되어 있는 글은 원래 이인로가 처음 완성했던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고 분석되기도 한다. 현재 이 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시대로 내려와 1493년(성종 24)에 이극돈(李克墩)이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있으면서 『파한집』 등을 간행하여 바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또 1659년(효종 10)에도 경주(慶州)에서 판각되었다는 것을 규장각 소장 판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경주 판각본이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4 『파한집』의 특징과 의의

『파한집』은 문학과 역사학에서 함께 주목을 받는 저술이다. 문학적으로는 무신 집권기 초기 문인들의 문학에 대한 인식과 비평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용사론(用事論), 즉 옛 글의 표현을 이용하여 새 글을 짓는 방식을 이인로가 강조하였다는 점이 특징으로 지목되며 이후 이규보(李奎報) 등과 다른 점이라고 인식되었다. 최근에는 이인로가 진정으로 강조한 것은 단순히 옛 표현을 따오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고도로 정제하여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고 파악되기도 한다.

역사학에서는 당시의 시대상과 여러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인로의 글에서는 유학에 능한 장원급제자이면서도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대한 이해가 엿보이며, 이러한 면이 고려 시대 지식인의 복합적인 지적 소양을 보여주는 한 예로 이해되고 있다. 또 『고려사』와 같은 역사서에는 담기기 어려운 개인들의 일상생활의 모습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 고려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살펴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가령 그가 지방관으로 재임할 때 먹을 만드는 임무를 받고 공암촌(孔巖村)의 주민들과 함께 머물며 느낀 소회를 남긴 글은 소의 운영상과 관련하여 널리 거론되는 일화이다. 또 정월 대보름 밤에 어좌 앞에 붉은 비단으로 된 등롱을 장식했다는 점도 그의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이다. 김입지(金立之)와 김군수(金君綏)에 관한 일화에서는 당시 문인들이 병풍에 묵화로 대나무를 그려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제자로 유명한 고승 혜소(惠素)가 국왕에게 받은 백금으로 사탕[砂糖], 즉 설탕 제품을 잔뜩 사서 늘어놓았다는 이야기에서는 그의 인간적인 면과 함께 당시 상선(商船)을 통해 설탕이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소한 생활상은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이 나타난다. 이인로가 『파한집』을 편찬할 때 후대에 이런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써둔 것은 아니었겠으나, 후대인들에게는 풍부한 생활상을 담은 자료집으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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