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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국력의 상징, 천년의 유산

미상

팔만대장경 대표 이미지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팔만대장경은 현재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하고 있는 고려의 재조대장경을 지칭한다. 경판의 수가 81,258매에 달한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일컫고 고려의 초조대장경을 다시 새긴 것이므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에는 흔히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13세기 중반에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고자 국가가 주도하여 조성하였다. 불교가 보편적인 문화로 향유되던 중세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의 조성은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기술을 상징하였다. 고려의 국력을 대내외에 과시했던 고려 팔만대장경은 현재에도 그 경판이 국보 3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07년 등재)으로,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5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995년 등재)으로 등재되어 있다.

2 대장경, 경판, 인경본

대장경(大藏經)이란 큰 그릇이라는 뜻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문헌들을 통칭하는 한자문화권식 표현이다. 불교의 삼장(三藏)인 경(經, Sūtra), 율(律, Vinaya), 론(論, Abhidharma)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주석서류, 인도 및 불교 전래지역에서 찬술된 방대한 불교 관련 문헌 등을 모두 포함한 개념이다. 이 때문에 시공의 변화와 더불어 후대에 만든 대장경일수록 그 분량이 점점 많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대장경은, 대장경을 새긴 경판과 그것을 종이로 찍어낸 인경본, 즉 목판 인쇄본의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경판에 먹을 입혀 찍어낸 인경본은 여러 부 존재할 수 있지만, 인경본을 찍어낼 경판 자체는 한 부만 존재한다. 해인사 장경판전에서 보관하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고려 재조대장경을 새긴 나무 경판들이다.

3 대장경 제작의 흐름

2세기 무렵 최초의 한역경전(漢譯經典)이 출현한 이래 불교의 여러 가르침들은 동아시아권에서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그간의 불서들은 대체로 필사의 형태로 유통되다가 10세기 목판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방대한 불교문헌 전체를 경판으로 제작해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것이 최초의 대장경인 중국 송(宋)의 개보장(開寶藏, 971년~983년 제작)이다. 개보 연간(968~976)에 주로 제작되었다고 해서 개보장, 개보대장경이라 부르며, 북송 때 황제의 명으로 만든 대장경이라 해서 북송칙판대장경(北宋敕版大藏經)이라고도 부른다. 이 개보장은 고려와 여진, 서하, 일본 등 당시 보편적 문화로 불교를 공유하던 주변국들에 두루 전해졌다. 송의 대장경 조판 이후 고려의 초조대장경과 교장(敎藏), 재조대장경을 비롯하여, 요의 거란장(契丹藏), 금의 조성장(趙城藏), 원의 보령장(普寧藏), 명의 영락장(永樂藏)·가흥장(嘉興藏), 청의 청장(淸藏) 등등 동아시아의 거의 모든 왕조에서 끊임없이 당대까지의 불교문헌을 집대성한 그 시대의 대장경을 만들어갔다. 이 중 고려의 교장(敎藏)은 일명 속장경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11세기에 고려 의천의 주도로 제작되었으며, 불교의 여러 문헌 중 경전에 대한 승려들의 장소(章疏)만을 모아 집대성한 것으로 여러 대장경 중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4 초조대장경, 고려의 첫 번째 대장경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반까지 고려는 거란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거란의 공세가 고려에 대한 침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 중 2차 전쟁이 벌어졌던 1011년(현종 2)에는 거란이 개경을 점령하는 사태 까지 벌어졌다. 당시 국왕이었던 현종은 나주까지 피신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모두 새긴다는 원대한 서원을 세웠고 , 그 결과로 고려의 첫 번째 대장경이 조성되었다. 이는 고려에서 처음 만든 대장경이라 하여 초조대장경이라고 부르며, 세계적으로도 두 번째로 제작된 대장경이었다. 고려에는 990년 성종 대에 송의 개보장이 들어와 있었는데, 초조대장경은 이 개보장을 복각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의 전체 제작 기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1011년(현종 2)에 시작하여 1087(선종 4)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보거나 1차(1011~1029)와 2차(~1087)로 제작 기간을 나누어 보기도 한다. 대장경의 조판은 불교가 유행하였던 중세의 동아시아 사회에서, 그 나라의 불교적 수준과 문화적 역량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송에 이어 고려에서 두 번째로 대장경을 조판했다는 사실은 고려가 국내외적으로 명실상부한 문화국임을 보여주는 주요한 지표로 이해할 수 있다.

초조대장경의 경판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었는데 13세기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되었다. 그런데 1965년 일본 교토의 남선사(南禪寺)에 비장되어 있던 인경본들이 발견되면서 다시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다. 현재 초조대장경으로 찍어낸 경전들은 국내외에 다수 전해지고 있다.

5 팔만대장경, 해인사에 보관된 천년의 유산

 1)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조성한 초조대장경의 경판은 안타깝게도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 때 몽골군에 의해 남김없이 불태워졌다. 나라의 보물을 잃은 고려는 불타버린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기로 결정하였다. 다시 새긴 대장경이라는 뜻의 재조대장경이라고 부르는데, 그 경판의 수가 81,258매에 달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르며 오늘날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다.

고려가 이 대장경을 왜 다시 새기려 하는지는 이규보(李奎報)가 1237년(고종 24)에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몽골군은 지나는 곳마다 불상과 불경을 없애버리고 초조대장경판도 불태워버렸는데, 과거 초조대장경을 만든 이유가 거란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과거 대장경을 만들었던 까닭에 거란의 군대가 물러갔지만, 지금 이렇게 대장경이 소실되었으니, 이번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다시 대장경을 조성한다고 밝히고 있다. 불심 깊은 고려인들은 독실하게 불교를 믿고 대장경을 새기는 일을 통해 여러 불보살의 도움을 얻어 외적을 물리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팔만대장경 각성사업은 전 불교계는 물론, 국왕을 비롯한 전 계층이 참여하는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2) 팔만대장경의 제작 과정

1232년(고종 19)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밀려 개성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대장경을 조성하기로 하고 1236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남해(南海)에는 분사도감(分司都監)을 설치하여 조판을 담당하게 하였다. 화엄종 승려였던 천기(天其)와 수기(守其)는 경전을 수집하고 교정을 담당하는 등의 책임을 맡았다.

대장경의 조판은 대몽항쟁이 상대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든 1238년(고종 25)부터 1247년(고종 34)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대장경을 새기기 위해 먼저 초조대장경의 인경본과 송의 개보장, 요의 거란장 등 여러 판본을 두루 수집하였다. 이어 여러 승려들과 문인 지식인 등을 모아, 수집한 저본을 토대로 대장경의 원문 오탈자를 바로 잡고 어떤 경전을 대장경에 포함시킬지 결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집한 판본을 서로 비교, 교감하여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 30권을 제작하였다. 줄여서 『교정별록』이라고도 불리는 이 자료는 대장경을 만들면서 수집한 판본들을 대교하여 전적의 번역자나 권수, 주석, 제목 등을 바로잡고 경전의 위경 여부를 판별하며 누락된 경전을 보충하고 내용이 섞인 것을 바로 잡는 등 오류를 수정한 사항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의 조판에는 판본을 수집하여 교감하는 일 말고도 나무를 베어 썩거나 뒤틀리지 않도록 바닷물에 담가 기초 가공을 하고, 경판을 만들어 한 자 한 자 글자를 새겨 그 위에 다시 옻칠을 하고 방부처리를 한 후, 경판 귀퉁이에 각목과 마구리를 대어 뒤틀리지 않도록 하는 수많은 공정이 포함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의 판수는 81,258매에 이르는데 판의 앞뒤로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실제로는 16만 면 이상을 새겼으며, 이를 인출하기 위한 종이와 먹의 수급까지를 포함하여 소요되는 시간과 인력, 비용 등을 고려하면, 팔만대장경의 제작은 실로 엄청난 규모의 사업이었다.

대장경의 조판에는 승려나 지식인 뿐 아니라 모든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두루 참여했는데, 대장경 경판마다 끝부분에 한 명에서 십여 명에 이르는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경판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물을 희사한 사람들로, 일반 백성에서 관리, 지식인까지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최이(崔怡) 는 사재를 기울여 대장경을 거의 반이나 조판하였고 최항(崔沆)도 재산을 시주하고 일을 감독하였으며, 정안(鄭晏)도 사재를 내어 대장경을 절반가량 조판할 것을 약속하였다.”라고 하여 당대의 최고 권력층도 대장경 조판사업에 참여하였음이 잘 드러난다.

 3) 팔만대장경의 완성과 그 의의

마침내 1251년(고종 38)에 대장경이 완성되었다. 『고려사』에는 선원사 대장경판당에서 국왕과 신하들이 참여한 가운데 대장경의 낙성 의식이 거행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한역경전 총 1,496부 6,568권을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천함(天函)에서 동함(洞函)까지 총 639함에 분류, 수록하였다. 내용상 730년 작성된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수록된 경전과, 그 이후에 한역된 경전 및 동아시아 승려들이 찬술한 불교 문헌으로 구성되는바, 그 편성 목록이 바로 『대장목록(大藏目錄)』이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정장(正藏)이라고 불렀다.

팔만대장경은 판본 대조와 오류 수정의 과정을 거친 교정대장경인 까닭에, 상대적으로 정확도가 높은 대장경으로 꼽힌다. 당시에 이미 유통되고 있던 대장경들을 모아 세세히 교정한 흔적이 팔만대장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앞서 소개한 『교정별록』은 어떤 대장경에도 없는 특이한 자료이다. 『교정별록』의 제목 아래에는 “사문 수기(守其) 등이 교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여러 대장경을 비교하여 그 중 특히 두드러진 차이만을 골라 30권 안에 정리해 두었다. 팔만대장경에는 『교정별록』 외에도 권말의 교정기나 행간 주석 등을 통해 교정의 내용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비문이나 글자 오기, 문맥에 맞지 않거나 필요 없는 내용 등도 광범위하게 교정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약 81,258매에 이르렀으며 한 면에 약 23행 14자씩 새겼으므로 전체 글자 수는 5천만 자에 달한다. 경판의 재질은 64%이상이 산벚나무이고, 14%가 돌배나무, 그 나머지는 후박나무와 단풍나무라 한다. 경판의 무게는 약 3.25kg이며, 크기는 두께 2.8cm, 가로 70cm, 세로 24cm 정도이다. 글자를 새기고 경판 표면에 진한 먹을 발라 결을 메워 매끄럽게 한 다음 다시 생옻을 두 세 차례 덧칠하였다. 경판의 양쪽 끝에는 각목으로 마구리를 대고 순도 99.6% 이상의 구리판으로 네 귀퉁이를 감싸서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마감하였는데, 그 결과 대장경판은 지금까지도 좀먹거나 뒤틀림 현상이 적게 일어나며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 팔만대장경판은 제작 후 강화도에 보관되다가 1398년경에 해인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대장경이 옮겨진 시기나 경로에 대해서는 관련한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기도 하다. 그러나 균여(均如)가 주석한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 경판에 음각된 충현(冲玄)의 1405년 기록에서 1397년에 대장경이 육지로 나왔다고 하였고, 『태조실록』 1398년 5월 10일 기사에 강화 선원사에서 온 대장경판을 보러 임금이 용산강에 행차하였다 고 하였으며, 『정종실록』 1399년 1월 9일 기사에 태조가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출하려 하였다 는 기사가 있다. 위와 같은 사료의 기록에 충실하여 보자면 강화도를 나온 대장경판이 1398년 다시 용산강을 출발하여 1399년 1월 이전에 해인사에 도착하였다는 설이, 현재로서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팔만대장경은 동아시아의 현존하는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완본(完本)이다. 팔만대장경에 포함되어 있는 서적 가운데에는 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유일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 서적은 팔만대장경이 현존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또한 팔만대장경은 당대에 유통되던 초조대장경과 개보장, 거란장 등을 세밀하게 교감하여 제작한 것인 까닭에,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오자가 적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일본이 1885년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과 1924년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간행할 때 모두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불교가 보편적인 문화로 향유되던 중세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의 조성은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기술을 상징하였다. 경판과 장경판전이 국보일 뿐만 아니라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그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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