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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집[圃隱集]

충신의 혼을 담다

1438년(세종 21)

포은집 대표 이미지

포은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포은집(圃隱集)』은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시문을 엮은 문집이다. 정몽주 사후 아들 정종성(鄭宗誠)과 정종본(鄭宗本)이 유고(遺稿)를 모아 1439년(세종 21)에 처음 발간하였다. 『포은집』은 충절의 권장, 도통(道統)의 권위 확보, 조상 추숭 등 다양한 필요에 의하여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총 14차례 발간되었다.

2 저자의 생애와 활동

정몽주는 1337년(충숙왕 후6) 정운관(鄭云瓘)과 영천(永川)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개인의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기반으로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장원급제하며 고려 중앙정계에 등장하였다. 1367년(공민왕 16)에는 개혁적인 사대부를 양성하려는 의도 하에 공민왕(恭愍王)이 성균관(成均館)을 재건하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발탁되어 고려말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그 공훈으로 활동하던 당시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았다.

1364년(공민왕 13) 여진족 장수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정벌을 계기로 훗날의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게 된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과 공조하여 친명(親明) 외교와 척불(斥佛) 등 각종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공양왕(恭讓王) 즉위 후 왕조교체에 대한 입장차이로 이성계 세력과 멀어지게 되자,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고를 기회로 삼아 그 세력의 축출을 시도하였고, 위험을 감지한 이방원(李芳遠)에 의하여 1392년 4월에 숙청되었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3개월 뒤 고려는 500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비극적 결말로 인하여 정몽주는 고려를 수호한 최후의 충신이자 시대를 초월한 충신의 대명사로 기억되어 왔다.

3 간행 경위

정몽주에 대한 추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숙청한 태종(太宗) 이방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태종은 즉위 후 권근(權近)의 제안을 수용하여 정몽주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종의 뜻은 세종(世宗) 등 후대의 왕들과 사대부들에게 계승되어 조선 왕조에서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으로 인정받았다.

『포은집』의 간행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1438년(세종 20) 권채(權採)가 찬술한 「포은선생시권서(圃隱先生詩卷序)」에서는 “태종대왕께서 그의 절의를 가상하게 여기시어 봉작[封贈]을 특별히 더하시고 그 자손을 발탁하셨습니다. 우리 주상전하(세종)께서는 일찍이 도찬(圖讚)을 만들 것을 명하시어 〈정몽주를〉 충신의 전(傳)에 올리셨으며, 그 아들인 종성이 유고를 편집하여 진상하자 또한 제게 서문을 지을 것을 하명하셨으니, 이로써 가상한 자를 표창하고 존숭하기 위함이셨습니다.”라고 하여, 정몽주를 충신으로 평가하고 그의 충절을 권장하고자 하였던 태종 및 세종의 적극적 지원 하에 『포은집』이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조선에서 정몽주의 절의를 높게 평가하고 현창할 수 있었던 논리적 근거는 같은 책에 수록된 박신(朴信)의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신은 1437년(세종 19)에 찬술한 「포은선생시권서」를 통하여 “하물며 선생께서는 세상에 뛰어난 자질과 남을 능가하는 식견을 갖추셨는데 어찌 그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기미를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하셨겠는가. 이러한 시기에 조금만 자신의 뜻을 변절시켰다면 곧 개국원훈이 되셨을 것인즉 누가 그보다 앞섰겠는가. 다만 구구한 충간(忠懇)으로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절하지 않으셨으니, 오호 열(烈)이로구나. 고로 우리 태종대왕께서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리시고 그 절의를 현창하셨던 바, 우리 태종의 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라는 주장을 하였다. 즉, 정몽주는 이성계에게 왕이 될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일신의 이익을 계산하지 않은 채 충렬의 가치만을 생각하여 죽음까지 불사하였고, 태종은 새로운 왕조를 부정한 정몽주의 절의를 포용할 정도로 높은 덕을 지녔다고 강변한 것이다.

4 판본 현황 및 재간(再刊)의 배경

정몽주는 생전에 시문을 쓰고 그 자리에서 버린 경우가 많아 완성된 문집을 갖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1409년(태종 9) 정몽주의 아들이었던 철원부사(鐵原府使) 정종성과 곡산군사(谷山郡事) 정종본이 아버지의 유고를 모아 30년 뒤인 1439년(세종 21)에 초간본을 발간하였다. 초간본은 정몽주의 시만 수록하였기 때문에 『포은시고(圃隱詩藁)』라는 서명이 붙여졌으며, 권수(卷首)·권상(卷上)·권하(卷下)·발(跋)로 구성되었다.

초간본 이후 『포은집』은 13차례나 더 발간되었다. 총 14종의 판본을 명명하는 방식은 연구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일설에 의거하면 초간본·신계본[新溪本, 1533년(중종 28)]·개성구각본(開城舊刻本, 선조 초기)·교서관본(校書館本, 선조 중기)·영천초각본[永川初刻本, 1584년(선조 17)]·영천구각본[永川舊刻本, 1607년(선조 40)]·황주병영본[黃州兵營本, 1608년(선조 41)]·봉화각본[奉化刻本, 1660년(효종 11)]·영천재각본[永川再刻本, 1677년(숙종 3)]·개성재각본[開城再刻本, 1719년(숙종 45)]·속집본[續集本, 1769년(영조 45)]·영천중간본[永川重刊本, 1866년(고종 3)]·개성신본[開城新本, 1900년(광무 4)]·옥산재본[玉山齋本, 1903년(광무 7)]으로 정리할 수 있다. 각 판본별로 수록 작품이나 편찬 체제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조선시대에 『포은집』이 14차례에 걸쳐 발간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발간 시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은집』은 중종(中宗) 시기 처음 재간본이 나온 뒤 선조(宣祖) 시기에 이르러 5차례에 걸쳐 집중적인 재간이 이루어졌다. 이는 사림(士林) 세력의 대두와 관련 있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정몽주는 길재(吉再)와 더불어 성리학적 도통론(道統論)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학문과 도(道)의 연원을 정몽주·길재에게서 찾았던 조선중기 사림들에게 『포은집』은 단순한 문집 이상의 의미를 지녔고, 자연히 『포은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발간 주체를 주목해야 한다. 연구자에 따라 14차례의 발간을 국가 주도와 사림 주도로 대별하는 경우도 있고, 관학파 주도와 사학파 주도로 대별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발간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포은집』의 편찬 체제는 달라졌다. 예를 들어 교서관본은 관학파의 주도 하에 국가 주관으로 발간되었는데, 이전과 달리 작품을 주제별로 나누지 않고 체제에 따라 나눈 차별적 면모를 보인다. 이 외에 정몽주와 연관된 서원 또는 정몽주의 후손들이 경쟁적으로 『포은집』의 재간에 뛰어든 흔적도 확인된다. 대표적으로 개성구각본은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이 사액된 것을 기념하여 개성부(開城府)에서 발간하였고, 속집본은 정몽주를 제향하던 또 다른 서원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주도적으로 발간하였다. 황주병영본과 봉화각본은 각각 정몽주의 후손인 정응성(鄭應聖)과 정유성(鄭維城)이 조상의 치적을 기리기 위하여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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