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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玄化寺]

부모의 명복을 비는 어린 왕의 마음

1018년(현종 9)

현화사 대표 이미지

경기 개성 현화사지 칠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대자은현화사(大慈恩玄化寺)는 황해북도 개성시 월고리 영취산 현화사지에 위치해있다. 고려의 제8대 왕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며, 그 창건 내력이 적힌 현화사비도 전한다. 비는 지금의 현화사지에 남아 있으며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개성시 방직동에는 현화사 7층 석탑이 있는데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41호이다. 현종의 사후에는 그의 진영(眞影)도 모심에 따라 진전사원(眞殿寺院)의 하나가 되어 후대 왕들이 많이 행차하였다. 또한 고려전기 4대 종파의 하나인 유가업(瑜伽業)의 본찰(本刹)로서도 기능하여 왕사(王師)나 승통(僧統)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당대 유력 귀족이었던 경원 이씨 가문과 밀착되었다.

2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왕실 사찰

대자은현화사는 고려의 제8대 왕 현종이 1018년(현종 9)에 부모인 안종(安宗) 욱(郁)과 효숙태후(孝肅王太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하였다. 안종은 태조의 아들이었고 효숙왕태후는 성종(成宗, 재위 981~997)의 누이이자 성종의 비인 헌정왕후였다. 경종이 사망하고 성종이 즉위하였는데 안종과 헌정왕후가 사통(私通)하여 현종이 태어났다.

헌정왕후는 현종을 낳고 후유증으로 바로 사망하였으며 안종은 사주(泗州,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로 유배되었다. 경종을 이어 즉위한 성종은 어린 현종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을 보고 그를 안종이 있는 사주로 보내주었다. 이에 현종은 2~5세까지 사주에서 안종과 함께 살다가, 안종이 996년(성종 15)에 사망하면서 다음 해인 997년에 개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현종은 태조의 유일한 현손(玄孫)이었고,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목종(穆宗, 재위 997~1009)의 어머니인 천추태후(964~1029)가 김치양과 낳은 아이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대량원군을 숭교사(崇敎寺)로 보내 승려로 만들었고 또한 살해를 모의하기도 하였다. 이후 1009년(목종 12)에 서북면순검사로 있던 강조(964~1010)가 개경으로 들어와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대신들의 보위를 받아 태조의 현손 자격으로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현종은 1017년에 문하평장사 최항과 중추부사 윤징고를 사주에 파견하여 안종의 재궁(梓宮)을 개경으로 모셔오게 하고 친히 동교(東郊)로 나가 맞이하였다. 또한 그 해 부모의 시호를 올리고 능을 조성하였는데 안종의 능은 건릉이고 효숙태후의 능은 원릉이었다.

그 다음 해인 1018년에 건릉과 원릉의 근처에 현화사를 창건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종은 현화사의 창건에 많은 정성을 기울여 1020년에는 안서도(安西道) 둔전(屯田) 1240결을 현화사에 시납하려다가 중서문하성의 논박을 받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에는 직접 현화사에 가서 새로 주조한 종을 쳤는데 신하들에게도 치게 하여 창건의 기쁨을 나누었다. 또한 7층 석탑도 건립하여 사찰의 위용을 높였다.

1021년 7월에는 비를 건립하였는데 여기에는 현화사의 창건 내력과 안종과 효숙태후를 향한 왕의 효심을 드러내는 언사들이 가득히 적혀있다. 비의 제액(題額)도 현종이 직접 썼다. 본문은 한림학사 주저(周佇)가 지었으며 참지정사 채충순(蔡忠順)이 썼고, 뒷면의 음기(陰記)는 참지정사 채충순(蔡忠順)이 짓고 썼다.

현화사비에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들과 달리 안종과 효숙태후의 사통과 관련된 내용은 일절 언급되어 있지 않고, 안종이 사주에 간 것이 거란의 침입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적혀있는 등 왜곡이 가해지기도 하였다.

현화사의 창건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한 현종의 효심이 발현된 것이지만, 왕실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출생함에 따라 현종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억압들을 해소하고 위로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현화사와 그 비의 건립에 참여한 인물들 면면을 보면, 현종을 추대한 공신들로 구성되어있어 그의 추대 세력들 또한 이 불사(佛事)를 진행하고 완성하기까지 많은 공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3 진영(眞影)의 봉안과 진전(眞殿)의 설치

고려시대에는 사찰에 사망한 왕족의 진영을 봉안하고 그 건물을 진전(眞殿)이라 하였다. 태조 이래 왕들은 재위 동안 사찰을 중창하거나 새로 창건하는 일이 많았는데 왕의 사후에는 해당 사찰에 그의 진영이 봉안되었다. 왕은 전대 왕의 기일이 되면, 진전사원에 행차하여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 그의 명복을 빌었다. 현화사는 안종과 효숙태후의 진영을 모시고 그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었으나, 현종의 사후에는 그의 진영도 모셔져서 진전사원으로 기능을 하게 된다.

현화사를 비롯하여 왕대를 거듭할수록 많은 수의 진전사원들이 생겨났다. 고려전기 진전사원으로는 현화사 외에도 안화사(安和寺)·홍원사(弘圓寺)·흥왕사(興王寺)·천수사(天壽寺)·대운사(大雲寺)·중광사(重光寺)·홍호사(弘護寺)·국청사(國淸寺)·숭교사(崇敎寺)·건원사(乾元寺) 등이 있었다. 여기에는 진전직(眞殿直)과 같은 관직이 설치되었고 산직장상(散職將相) 2인도 배치되었다. 태조의 진영을 모신 봉은사(奉恩寺)의 경우에는 산직장상 4인이 배치되었다. 진전사원으로 지정되면 왕실에서 상당한 규모의 토지와 재물 시납이 이루어져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현화사가 현종의 진전사원이 되고 그곳에서 현종의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는 휘신도량(諱辰道場)이 거행되었다. 덕종(德宗, 재위 1031~1034), 정종(靖宗, 재위 1035~1046),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은 현종의 기일인 5월 27일에 맞추어 현화사에 행차하여 향을 사르고 제사를 지냈다. 후대의 왕들 역시 현화사에 많이 행차하였는데 그 날짜가 일정하지는 않다.

이후 고종대 초반에는 부왕(父王)인 강종(康宗, 재위 1211~1213)의 진전사원으로도 기능을 하였다. 안종, 현종, 강종의 신위를 1217년(고종 4) 3월에 숭교사로 옮겼으나 강종의 진전이 계속해서 현화사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안종과 현종의 진영은 계속 현화사에 봉안되어 진전사원의 기능을 이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4 유가업(瑜伽業) 본찰(本刹), 귀족 가문과의 밀착

교종(敎宗)의 경우 신라 이래로 성하였으나, 하대에 이르러 당에서 선종(禪宗)을 수학하여 귀국한 승려들이 왕실과 지역 호족들의 큰 관심과 후원을 받게 되면서 잠시 주춤하였다. 그러나 고려 태조가 선종, 교종의 여러 종파에 대해 두루 관심을 표한 것은 물론, 고려전기 왕실과 귀족 가문 등 지배층도 교종에 많이 출가하고 후원하였다. 왕자들의 경우 주로 교종 특히 화엄종(華嚴宗)에 대대로 출가하였고 이에 화엄종 은 왕실과 매우 밀착하게 된다.

화엄종 외에도 유가업(瑜伽業)의 교세가 두드러졌다. 유가업은 고려 당대에 주로 사용된 명칭이고, 이외에 자은종(慈恩宗)으로도 불렸으며 지금은 법상종(法相宗)이라 불리는 종파이다.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창건하여 유가업의 본찰(本刹)이 되었는데 현종의 사후에는 그의 진영을 봉안한 진전사원이 되었다. 즉 현화사는 왕실 창건 사찰로서 그 위상이 대단히 높아 당대의 고승들이 잇달아 주지로 임명된다.

승려 정현(鼎賢, 972~1054)은 덕종의 재위 동안에 승통(僧統)으로서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승통은 최고의 승계(僧階)로서 교종 승려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직급에 해당된다. 그는 1049년에는 왕사(王師)로 임명되고, 1054년에는 국사(國師)로 높여졌다. 또한 1054년에는 해린(海麟, 984~1070)이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고 1056년에는 왕사가 되었으며 후에는 국사로 책봉되었다.

현종이 현화사를 창건하고 이를 중심 사원으로 유가업의 고승들이 잇달아 배출되었는데 문종대 외척인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이 그의 다섯째 아들인 소현(韶顯, 1038~1096)을 해린에게 출가시킨다. 소현은 해린에게 출가하여 유가업 승려가 되고, 이후 교종 최고 승계인 승통에까지 올라 현화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현화사는 점차 외척이자 문벌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과 밀착하게 되며, 현화사는 고려 중기 귀족불교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된다. 소현은 입적 후에 혜덕왕사(慧德王師)로 추증되었다.

후에는 이자연의 손자였던 이자겸(李資謙, ?~1127)이 아들 의장(義莊)을 유가업에 출가시켰다. 이자겸은 예종(睿宗, 재위 1105~1122)과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의 장인인 동시에 인종의 외조부이기도 하여, 외척이자 고려전기 최대 문벌귀족가문의 핵심 인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인 의장은 출가하여 수좌(首座)로서 현화사에 거처하였다. 수좌는 승통에 버금가는 승계로, 이 역시 교종 승려가 받을 수 있는 매우 높은 직급에 해당된다. 의장은 현화사에 수좌로 있으면서 1126년(인종 4)에 이자겸의 난 때 현화사 승려 300여 명을 동원하였다. 의장은 아버지인 이자겸의 세력에 힘입어 현화사 내에서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최고 귀족 가문이 현화사에 영향을 뻗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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