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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檜巖寺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대가람의 흔적

미상

회암사지 대표 이미지

양주 회암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회암사지(檜巖寺址)는 양주 일대에 위치한 323,117㎡에 달하는 대규모 절터이다. 늦어도 12세기경에는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고려말 공민왕대 임제종(臨濟宗) 승려 나옹혜근(懶翁惠勤)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이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는데 이때 완성된 건물이 262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하고, 이후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전후로 그를 도와 활약한 무학자초(無學自超)가 이곳에 주석하였다. 회암사는 조선 태조의 지대한 관심과 재물 및 토지의 시납을 비롯하여, 왕실의 꾸준한 후원을 받았고 이후 명종대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많은 후원을 받았다. 또한 회암사지는 1964년에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고, 1997년 시굴을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며 국내 최대 규모의 온돌 유적이 확인되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2 고려전기 회암사와 고려말 나옹의 중창

회암사의 창건 시기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회암사에 원경국사(圓鏡國師)의 글씨가 남아 있다는 언급이 있다. 또한 그 글씨를 본 금나라 사신의 일화에 관한 내용도 전한다. 원경국사(?~1183)는 인종(제17대 왕, 1109~1146, 재위: 1122~1146)의 아들이자 의종(제18대 왕, 1127~1173, 재위: 1146~1170)의 형제인 왕실 출신의 출가자였다. 1147년(명종 4)에 금나라 사신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고 원경국사가 1156년(명종 13)에 입적하였으므로 회암사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313년(충선왕 5)에는 승려 보우(1301~1382)가 회암사에서 광지에게 출가하였다. 보우는 공민왕대 왕사, 국사를 잇달아 지낸 승려이다. 인종~의종대의 왕자승인 원경국사의 글씨가 남아있고, 명종대 금나라 사신이 다녀간 것으로 보건대 12세기경 회암사는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회암사 중건과 관련하여서는 당대의 유명 문인들이 지은 기문이 전한다. 그중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 에 의하면 나옹의 스승인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指空, ?~1363)이 회암사 지세가 서축(西竺) 난타사(蘭陀寺)와 같아 이곳에 사찰을 일으키면 국운이 도래하고 불법이 재흥한다고 예언한 수기(授記)에 의해 나옹이 중건을 시작하고 그의 제자 윤절간(倫絶磵), 각전(覺田) 등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1344년(충혜왕 후5)에 나옹이 회암사에 머물면서 득도하였다. 이후 그는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만났다. 과거 나옹은 지공이 고려에 왔을 때 그에게 계(戒)를 받아 수지(受持)하였다. 나옹은 원에서 다시 지공을 만나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 일대) 소재의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면서 지공의 밑에 있다가 강남(江南)으로 내려가 저명한 고승들과 교류하였다.

나옹은 1358년(공민왕 7)에 고려로 돌아왔다. 그는 1360년에 공민왕의 요청으로 개경으로 들어와 입궐하여 설법하였는데 후에는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 일대를 순력하며 지낸다. 공민왕은 불교 교단의 통합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양종오교(兩宗五敎) 승려들을 한 자리에 모아 처음으로 공부선(功夫選)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을 나옹이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에 나옹은 1370년(공민왕 19)에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서 이루어진 공부선을 주관하고, 법회를 마친 뒤 회암사로 돌아왔다. 공민왕은 다음 해인 1371년에 그를 왕사로 봉하고 당시 선종의 제1도량으로 여겨진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나옹은 송광사에 내려갔으나 그 다음 해인 1372년에 다시 회암사로 돌아온다.

앞서 나옹의 스승인 지공이 고려에 머무른 동안 회암사의 지형을 보고는 서축의 난타사와 같아 이곳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佛法)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며, 그 터를 측량한 바 있었다. 나옹은 그러한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1374년(공민왕 23)에 회암사의 대대적인 중수를 시작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완성되어 낙성회(洛城會)를 열게 된다.

그러나 이후 회암사에 너무 많은 신도들이 몰리게 되면서 사헌부의 비판을 받았는데 도당(都堂)의 명으로 결국 절의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런데도 회암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자 조정에서는 아예 나옹을 추방한다. 그는 1376년에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향하던 중 병으로 신륵사(神勒寺)에서 쉬다가 결국 그곳에서 입적하게 된다.

3 고려부터 조선까지 이어진 사세(寺勢)

회암사는 고려 말 나옹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중창되면서 불교 교단에서 사세(寺勢)를 뻗치게 된다. 이후에는 무학(無學, 1327~1405), 혼수(混脩, 1320~1392) 등이 회암사에 주석하였다. 특히 무학 자초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스승으로 모신 승려이다. 이성계는 스승인 무학을 당대의 유명 사찰인 회암사에 주석하도록 하였고, 이곳에 많은 양의 토지와 재물을 시납하였으며 행차도 많이 하였다. 또한 그는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 회암사에 궁실(宮室)을 짓고 머물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회암사의 사세는 이후 조선 초에도 그대로 이어져 이곳은 고려말 나옹에서 조선초 무학으로 이어지는 주류 불교세력의 근거지로 평가된다.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는 물론이고, 이후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희왕후(貞熹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 등 왕실 구성원들의 많은 후원을 받아 왕실 사찰로서 건재하였다. 명종대 문정왕후의 많은 총애를 받은 승려 보우(普雨, 1515~1565)도 회암사에 주석하였다. 문정왕후는 회암사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그가 회암사에서 개최된 무차대회(無遮大會) 도중에 사망하게 되었고, 1566년(명종 21)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기록이 있다. 1595년(선조 28)에 회암사 옛터에 불에 탄 대종(大鐘)이 있다는 기사가 있어, 16세기 무렵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는 1605년(선조 38)에 선왕의 어실(御室)을 조성하고, 1626년(인조 4)에 종친이 불사(佛事)를 크게 벌이는 것으로 보아 재건되었던 것 같으나, 17세기 후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회암사지에 남아있는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 무학대사탑(無學大師塔),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사리탑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4 원대 선종 사찰 가람배치의 반영

회암사가 고려말에 중건되었을 당시 규모는 262칸이었다. 회암사 발굴조사 결과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서술되어 있는 회암사의 구조와 발굴결과 드러난 가람배치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 조선시기를 지나서도 고려말 나옹이 회암사를 중건할 당시 조성한 가람배치 자체를 크게 변경하지는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회암사는 원대 강남지역 선종 사찰의 전각 배치를 따르고 있다.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는 중수 당시 완성된 전각 명칭들과 그 배치 현황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어 이를 토대로 회암사 복원도가 작성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회암사를 구성하는 전각들의 배치 현황과 각 전각들의 방향과 규모가 하나하나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전각 명칭들중에는 선종의 규범인 『칙수백장청규』에 규정된 양서(兩序)의 직임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해당 청규의 양서장(兩序章)에 의하면 서서두수(西序頭首)는 수행을 담당하고, 동서지사(東序知事)는 사원의 운영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직임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수좌(首座), 서기(書記), 향화(香火), 지빈(知賓) 등은 서서(西序)에 해당하는 직임이고 부사(副寺), 도사(都寺), 전좌(典座), 원두(園頭) 등은 동서(東序)에 해당한다. 회암사에는 수좌료(首座療), 서기료(書記療), 향화료(香火療), 지장료(知藏療), 부사료(副寺療), 도사료(都寺療), 지빈료(知賓療), 전좌료(典座療), 원두료(園頭療) 등이 건립되었다.

고려시대 사찰의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 가운데 청규에 규정된 양서의 직임이 구체적으로 반영된 경우는 회암사가 유일하다. 이는 고려말 회암사를 중수한 나옹이 원에 있으면서 경험한 청규와 선종 사찰의 가람배치를 적극 반영한 결과로 추측된다.

5 대규모 온돌 유적의 흔적

회암사지는 1964년에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1997년 시굴을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2012년에는 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며 다양한 학술 성과가 제출되었다. 여기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 구현되어있는데 가람배치는 8개의 단을 지어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남북 중심축을 기반으로 건물이 좌우 대칭되는 모습이 보이며 궁궐에서 보이는 폐쇄적인 건축 구조가 특징적이다.

무엇보다 회암사지는 전체 70여 개의 건물지에서 35개소 이상에서 다양한 형태의 구들이 발견되어 국내 최대의 온돌 유적이기도 하다. 회암사 건물지 가운데 온돌이 설치되었던 곳은 방장(方丈), 승당(僧堂), 영당(影堂), 료(療), 객실, 그 외 용도가 명확하지 않은 건물지들이다. 회암사지 온돌 유적은 실내 일부에만 설치되던 것이 전면 온돌로 정착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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