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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簡儀]

혼천의를 간소화한 천문기기

1432년(세종 14)

간의 대표 이미지

서울 관상감 관천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간의(簡儀)는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기기이다. 각도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졌으며, 행성과 별의 위치, 시간, 고도, 방위 등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간의는 원래 중국 원의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이 혼천의의 결함을 수정하여 개발한 것이다. 조선 세종 대의 간의 역시 곽수경의 간의를 적극 참고했다. 다만 세종 대 간의는 한양의 위치에 맞도록 개량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도 혼천의를 사용했었지만, 혼천의의 기능과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천체를 관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혼천의는 육합의(六合儀, 여섯 방위의 기점(基點,, 동·서·남·북·천정(天頂)·천저(天底)을 정하는 장치), 삼신의(三辰儀, 흑쌍환(黑雙環)·적도단환(赤道單環)·황도단환(黃道單環), 백도단환(白道單環), 흑도단환(黑道單環) 등이 있어 28수 별자리 등을 표기한 장치), 사유의(四遊儀, 적경쌍환(赤經雙環)·극축(極軸)·규관(窺管) 등으로 구성되며, 동·서·남·북 사방을 볼 수 있는 장치) 등 세 개의 기본 장치들이 서로 연결되어 겹쳐 있던 복잡한 구조였는데, 간의는 이 가운데 지평좌표(관측자를 중심으로 천체의 위치를 표시하는 좌표계)와 적도좌표(천구 위의 천체의 위치를 표시하는 좌표의 하나로, 경도·위도와 비슷)를 기준으로 한 측정 장치 부분만을 따로 떼어낸 구조이다.

대간의(大簡儀), 소간의(小簡儀), 목간의(木簡儀) 등 몇 가지 형태의 간의를 만들었으나, 현재 전하는 유물은 없다. 그리하여 간의대와 간의의 형태가 어떠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복원품은 기존 학계의 연구 성과를 집약하여 제작된 것이다.

2 원의 천문학 영향

동아시아의 전통 천문학은 해, 달, 오행성의 움직임을 주기적으로 파악하여 날짜와 시간의 변화를 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천문학은 오랫동안 중국 천자의 독점 분야였는데, 원대에 이르러 시간과 역법의 체계가 크게 정비되었다. 간의를 제작한 곽수경과 관련된 업적을 살펴보면, 그는 수시력(授時曆), 앙의(仰儀) 개발도 주도하였다.

이러한 원의 천문학 성과는 고려 말 이후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충렬왕 때 수시력을 도입하였다. 또한 조선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원대의 천문학 성과를 인정하면서 그들의 역법과 기기를 적극 참고하였다. 그리하여 원 수시력을 쉽게 해설하면서도 수도 한양을 기준으로 하여 태양과 달, 오행성의 위치를 파악한 『칠청산내편(七政算內篇)』이 편찬되었다. 앙부일구(仰釜日晷) 제작에는 앙의를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조선의 천문·역법 연구와 간의 제작

중국 입장에서는 고려, 조선 등의 제후국에 천문학 관련 지식을 전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각종 천문 현상에 대한 기록이 많은 점을 보면, 나름대로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유교적 이상 국가를 표방한 조선은 완성도 높은 천문학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미비한 점이 많았다. 고려 말의 수시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일식과 월식의 계산은 여전히 당의 선명력(宣明曆)을 따르고 있었다. 당시 서운관 관리들이 일·월식을 잘못 예고하여 처벌받는 사례들이 있었음을 보면, 역법 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조정에서는 역법 교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세종은 즉위 이후 천문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즉위 초기에는 역법·산법과 관련된 『대명력(大明曆)』·『회회력(回回曆)』·『통궤(通軌)』·『계몽(啓蒙)』·『양휘산법(揚輝算法)』·『첩용구장(捷用九章)』 등의 책을 구하는 데 매진하였다. 그러나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자 산법 교정소(算法校正所)를 두고 집중적으로 연구하도록 하였다. 특히, 역법을 추산하기 위해 산법의 연구에 노력했다. 세종은 사역원의 관리들을 중국에 보내 산법을 습득하도록 하였고, 경상도 관찰사가 간행한 송의 『양휘산법』을 관리들에게 나눠주어 익히게 하였다.

1430년(세종 12) 정초(鄭招)는 수시력을 연구하여 책력을 만드는 것을 개선하였다. 1432년(세종 14)이 되면 우리나라 역법이 중국의 것과 비교했을 때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정도가 되었다. 이순지는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발문에서 1433년(세종 15) 무렵에는 천문·역법 성과가 정교하고 치밀해졌다고 평했다.

세종 대에 천문·역법 연구가 활발했던 만큼 서운관의 조직도 이원체계, 즉 궁궐 안에 내서운관(內書雲觀), 궁궐 밖 북부(北部) 광화방(廣化坊)에 외서운관(外書雲觀)을 두어 운영하였다. 외서운관은 원래의 서운관 조직이었고, 내서운관은 1432년(세종 14) 간의대 건립을 계기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간의는 시험 삼아 나무로 된 목간의(木簡儀)를 우선 제작하였다. 목간의로 한양의 북극출지(北極出地, 지면에서 북극성을 바라본 각도로 오늘날의 위도와 비슷한 개념)를 38도 강[三十八度强], 즉 38도 1/4로 측정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원사(元史)』에 있는 값과 부합하여 구리로 간의를 만들었다. 이것이 대간의다. 또 대간의대(大簡儀臺)도 건립하였다. 건립 과정에서 정초(鄭招), 정인지는 옛 제도들을 고찰하는 일을 담당했고, 이천李蕆)과 장영실(蔣英實)은 공역 감독을 맡았다. 더불어 관측기기들을 설치할 천문대, 즉 간의대를 만들고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규표(圭表) 등을 설치하였다.

4 소간의 제작

소간의는 간의를 더욱 간단하게 만든 것이다. 1434년(세종 16)에 세종은 이천·정초정인지등에게 작은 모양의 간의를 만들도록 하였고, 1437년(세종 19)에 완성하였다. 혼천의에서 지평좌표와 적도좌표를 기준으로 한 측정 장치만을 떼어낸 것이 간의이고, 그중 적도좌표 측정 장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소간의이다.

변계량이 쓴 「소간의명(小簡儀銘)」에서는 “비록 옛 제도를 따르기는 했지만, 실상 새로운 규모를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예전의 간의는 층층으로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의 이 기구는 가지고 다닐 만하다.”라고 하면서 소간의의 휴대성을 극찬하였다. 그러나 휴대성이 좋다고 해서 소간의가 여러 개 제작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김돈(金墩)의 「간의대기(簡儀臺記)」에서는 소간의를 두 개 제작해서 하나는 경복궁천추전(千秋殿) 서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주었다고 한다.

5 간의대에서의 천문 관측

1433년(세종 15) 경회루 북쪽 담 안에 대(臺)을 축조하여 간의를 설치하였다. 높이 31척, 길이 47척, 너비 32척의 석조노대(石造露臺)를 축조하고, 돌난간을 둘러 대간의를 설치한 뒤 시험을 거쳐 1434년(세종 16) 준공하였다.

간의대에는 간의 외에도 서쪽에 규표(圭表), 규표의 서쪽에 작은 집을 지어 혼의(渾儀, 혼천의)와 혼상(渾象)을 설치했다. 간의 남쪽에는 정방안(正方案, 동서남북의 방위를 표시한 수평판)을 펴놓았다.

간의대가 설립된 이후 천문 관측은 매우 활발했다. 서운관 관리들이 돌아가면서 기상을 관측하다가 1438년(세종 20)부터는 밤마다 다섯 사람씩 입직시켜서 천문 관측을 하도록 하였다. 훗날 『서운관지(書雲觀志)』 에 기록된 관측 관련 제도, 기록 작성 방법 등이 이 무렵 확립되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 이처럼 간의대의 관측은 세종 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하지에 해 그림자를 측정하거나 별의 도수와 혜성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등의 업무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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