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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龜船]

판옥선을 개량한 특수 군선

1592년(선조 25)

거북선 대표 이미지

거북선 그림(조선 후기)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1 개요

거북선[龜船]은 거북 모양으로 된 전선(戰船)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板屋船)의 윗부분을 개량해서 갑판 위에 덮개를 덮은 구조의 특수 군선이었다. 조선 초기에도 제작되었으나 적극 쓰이지는 못했고,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에서 건조되어 활용되다가 한산도대첩에서 수군 승리의 핵심적 역할을 하면서 전란 극복의 동력이 되었다. 당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구사했던 전술에서 화포 명중률을 높이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이런 측면에서 대형 화포를 탑재한 거북선은 전략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2 거북선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조선시대 거북선에 대한 첫 기록은 1413년(태종 13)에 태종이 임진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도 거북선은 많은 적과 충돌해도 거뜬할 정도로 강력했다. 1415년(태종 15)에는 거북선을 더욱 견고하게 재정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후 임진왜란이전까지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거북선의 구조와 기능도 태종 대의 것과 임진왜란 이후의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초기 거북선은 수군의 주력 전선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 군선은 대·중·소의 맹선(猛船) 체제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각 지역별로 보유한 군선(軍船)의 종류와 수가 기록되어 있다. 우선 군선 종류는 대선(大船), 중대선(中大船), 중선(中船), 병선(兵船), 쾌선(快船), 맹선(猛船), 중맹선(中猛船), 별선(別船), 선(船), 왜별선(倭別船), 추왜별선(追倭別船), 추왜맹선(追倭猛船) 등의 13종이고, 전국적으로 모두 829척을 보유하였다. 그리고 성종대 『경국대전』에서는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으로 군선을 구분하고 각 인원을 80명, 60명, 30명으로 규정하였다. 기존의 다양한 전선을 크기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정리한 것인데, 조운선 겸용이었다. 즉, 평상시에는 조운선으로 활용되었고, 유사시에 군선으로 쓰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전까지는 전란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군선보다 조운선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임진왜란과 수군의 승리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하여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하였고 이후 거침없이 북상하였다. 조선 육군은 연달아 패전하였고, 선조는 4월 30일에 북쪽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평양까지 진격했고, 조선 조정은 압록강 하류의 평안도 의주까지 내몰렸다. 이처럼 조선 육군이 연전연패 하는 와중에 조선 수군은 선전하였다. 원래 일본군은 수륙병진을 계획하였다. 일본 수군은 남해를 거쳐 서해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대동강, 압록강 방면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서해 쪽으로 올라가지도 못한 채 남해에서 차단되었다. 경상도 수군은 무너졌지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맞아 연전연승했기 때문이다.

1592년 5월, 원균(元均)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이순신의 수군은 여수 본영을 떠나 거제도로 가서 경상도 옥포에서 치러진 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연이어 경상도 합포, 적진포 등에서도 승전을 한 후 하동(河東) 연해에서 원균의 수군과 합세한 이순신은 사천, 당항포, 당포 등에서도 승리하였다. 7월에는 한산도에서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대승을 거뒀고, 이로써 조선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4 사천해전, 거북선이 등장하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것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년 여 전의 일이었다. 이순신은 부임 후 혹시 모를 전란에 대비하였고, 자의로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1592년 2월 8일 일기에 ”거북선에 사용할 범포(帆布, 돛에 사용할 베) 29필을 받았다.”라고 하였고, 3월 27일에는 시험 삼아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발사했다고 기록하였다. 임진왜란 발생 전날인 4월 12일에도 거북선을 타고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 등을 쏘면서 훈련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 거북선을 가장 먼저 활용한 전투는 5월 29일에 벌어진 사천해전이다. 이순신의 수군 전략은 거북선을 포함한 전선 23척이었고, 하동 연해에서 합세한 원균의 수군은 전선 3척을 보유하였다. 조선 수군은 사천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전선 12척을 유인하여 모두 격파했는데, 선두에 거북선이 있었다. 거짓 퇴각한 조선의 전선을 일본군이 추격해 왔고, 조선 수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총통(銃筒)으로 일본군의 배를 불살랐다.

5 거북선의 구조와 특징

거북선의 구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거북선을 잠수함의 일종으로 여기는 속설이 퍼지기도 했지만, 연구가 활발해진 이후에도 거북선 구조에 대해 여러 면에서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어떤 연구에서는 거북선의 구조를 3층으로 주장하면서도 갑판 쪽에는 사람이 서 있을 수 없는 구조라 온전한 3층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 다른 연구는 외관상 2층이지만 개판(蓋版)에 포혈(砲穴, 포를 발사할 수 있게 뚫은 구멍)이 있어 3층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층수는 단순히 구조상의 차이뿐 아니라 거북선의 운행 방법 및 포혈을 활용한 전술과도 관련이 있다.

거북선은 정확한 구조를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기본적 형태는 판옥선과 비슷하다. 우선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전서(旅菴全書)』에서 ”거북선의 아랫부분 선체는 전선(판옥선)과 같은 모양이다.“라는 서술이 확인된다. 그리고 영조가 거북선에 대해 질문하자 조문명(趙文命)이 ”형체는 같지만 제도는 다르니, 거북의 모습처럼 양옆을 가려서 덮은 것이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거북선의 구조와 특징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몇 가지가 있다. 정조가 1795년(정조 19)에 이순신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도 거북선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있다. 특히, 통제영(統制營)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그려진 도설(圖說)이 있는데, 이는 이순신이 제작한 거북선이 아니라 정조 때의 거북선에 대한 것이다. 이 중 통제영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에 유래한 것으로서 치수에만 가감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다른 자료와 상충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일례로 『이충무공전서』에서는 거북선의 거북머리[귀두(龜頭)]에서 연기를 피운다고 하였고, 이순신이 올린 장계인 『임진장초(壬辰狀草)』에서는 거북선 용머리[용두(龍頭)]에서 대포를 쏘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은 「행록(行錄)」이라는 글에서 거북선 측면의 포혈(砲穴)이 6개라고 언급하였는데, 『이충무공전서』의 그림에 나오는 포혈은 더 많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 모습은 이순신의 『임진장초』나 이분의 「행록」에 기록된 내용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거북선에 대한 내용은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문집 『간재집(艮齋集)』에서도 확인된다. 1592년(선조 25) 경기도 이천에서 군사를 통솔하던 왕세자 광해군에게 올리는 글에서 거북선[귀갑선(龜甲船)]의 형태를 묘사하였다. “등 부분에 창검(槍劍)을 붙이고, 머리 부분에는 쇠뇌를 숨겨 설치하며, 허리 부분에는 판옥(板屋)을 두고 그 가운데 사수(射手)를 들어가게 하며, 옆으로는 사혈(射穴, 활 쏘는 구멍)을 내고, 아래로는 배의 내부로 통하게 하여 가운데는 총통(銃筒)과 대부(大斧, 큰 도끼)를 두고 때려 부수기도 하고 철환(鐵丸, 철로 만든 탄환)을 쏘기도 하며 활을 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라는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모습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간재집』에는 거북선의 모습을 그린 귀갑선도(龜甲船圖)가 수록되어 있는데, 개판을 곡선이 아닌 직선의 다각형으로 그려 두었다. 이를 근거로 하여 거북선 개판이 6각형 혹은 8각형의 다각형이라고 주장하는 연구도 있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의 이순신 종가에는 조선 후기의 거북선 그림이 남아있다. 개판 위에 장대(將臺)가 그려져 있어 조선 후기에는 외부 척후와 지휘를 위해 거북선에 장대를 설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6 거북선의 전술적 가치

거북선은 적이 배에 오르려고 해도 개판에 꽂혀 있는 송곳과 칼로 방어할 수 있었다. 또한 선체의 장갑화로 인해 격군(格軍, 배에서 사공을 돕는 사람)과 사부(射夫, 포, 활 등을 쏘는 사람)를 보호하면서 적선 가까이 접근할 수 있어 화포 명중률이 높았다. 일본군이 배를 타서 육박전을 벌이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고, 전체적인 방호력도 판옥선에 비해 높았을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다만 임진왜란과 그 이후 조선 후기에도 거북선은 판옥선을 대체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주력 전선은 판옥선이었다. 하지만 거북선은 임진왜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활약하면서 전란 극복의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도 지속적으로 건조되어 군사상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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