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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를 위한 정조의 효심

1764년(영조 40)

경모궁 대표 이미지

일제시대 경모궁과 함춘원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경모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764년(영조 40) 영조는 사도세자의 지위를 회복시켜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사당을 건설하였다가 동부 숭교방(崇敎坊)으로 이전하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수은묘(垂恩廟)를 경모궁으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경모궁은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추존왕이 되어 신위가 종묘의 영녕전으로 옮기게 되자 그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이곳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경모궁의 흔적은 사라졌다. 현재 경모궁지의 표석이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세워져 있다.

2 영조, 사도세자의 묘우를 건립하다

1735년(영조 11)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사도세자는 곧바로 원자에 책봉되고, 이듬해에는 세자로 책봉되는 등 영조의 사랑을 한껏 받았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한 이후 부자간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급기야 1762년(영조 38)에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을 계기로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훙서하였다.

사도세자의 장례는 간소화하여 거상기간을 줄이고 격식도 낮추어 진행하였다. 영조는 아버지를 잃은 세손(世孫, 후의 정조)의 마음을 생각해 왕세자의 지위를 회복하여 시호를 사도(思悼)라 하였다. 묘(墓)는 수은묘(垂恩墓)라고 하였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 뒤인 1764년(영조 40) 영조는 도성 북부 순화방에 묘우(廟宇)를 건립해 ‘사도묘(思悼廟)’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의 기일에 맞춰 완공된 사도묘가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건설되자, 묘우를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동쪽에 다시 세우라고 명하였다. 그런 후 이름을 바꾸어 “은혜를 온전히 한다.”는 의미의 수은묘(垂恩廟)라고 하였다.

3 정조, 아버지의 묘를 궁으로 격상시키다

정조는 즉위 후 왕세자의 위상에 맞도록 생부인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 작업을 진행하였다. 먼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였다. 아울러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경모궁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경모궁과 영우원을 종묘보다는 한 등급을 낮추되 다른 궁원보다는 높이는 방향으로 궁제(宮制)를 개정하여 사도세자의 위상 정립에 전력하였다.

그런 다음 정조는 사당이 비좁은 것을 이유로 경모궁을 개건하도록 하였다. 경모궁 정당(正堂)은 보수하고, 배위청(拜位廳)의 재실(齋室), 향대청(香大廳)의 집사들이 입접(入接)하는 곳, 내외 신문(神門)과 대문(大門)은 새로 조성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여러 차례 승지를 보내 경모궁의 공사 상황을 살폈으며, 8월 16일 친히 경모궁에 나아가 묘우 안을 봉심한 뒤 공장(工匠)의 노고를 위로하며 개건 당상(改建堂上) 구윤옥(具允鈺)에게 초피립(貂皮笠)과 이엄(耳掩) 하나씩을 내려주었다. 17일에는 경모궁의 정당(正堂) 공사를 위해 터를 닦았으며, 8월 27일 정초(定礎)하였다. 이어 9월 30일 경모궁의 개건 역사가 완공되어 정조는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이안제(移安祭)를 거행하고, 이어 신주를 모시고 경모궁에 나아가 봉안(奉安)한 뒤에 친제(親祭)를 거행하였다.

4 경모궁 건설에 대한 의궤를 만들다

경모궁 개건 공사가 마무리 되자 정조는 전의감(典醫監)에 의궤도감을 설치하여 개건 공역의 전모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의궤가 『경모궁개건도감의궤(景慕宮改建都監儀軌)』이다. 의궤에는 경모궁개건도(景慕宮改建圖), 신장도설(神欌圖說), 신탑도설(神榻圖說), 택일(擇日),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축문(祝文) 등이 실려 있다. 경모궁 개건도를 통해 경모궁이 기존의 수은묘에서 규모가 대폭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모궁의 건설에 대해서는 『경모궁개건도감의궤』 외에도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와 궁원의(宮園儀)』가 있다. 정조는 경모궁과 영우원의 모든 의례 절차를 새로 제정하도록 했는데, 『궁원의』는 이를 정리한 책이다. 『경모궁의궤』는 1784년(정조 8) 편찬된 것으로 경모궁을 개건하게 된 경위와 의례정식 등이 모두 기록되었다.

『경모궁의궤』에 나타난 경모궁은 정당(正堂), 이안당(移安堂), 좌익각(左翼閣), 우익각(右翼閣), 제기고(祭器庫), 어재전(御齋殿), 재실(齋室), 망묘루(望廟樓), 망묘루(望廟樓), 목욕청(沐浴廳), 수라청(水剌廳), 재전 대문(齋殿大門), 향대청(香大廳), 찬만대(饌幔臺), 제정(祭井), 악기고(樂器庫), 전사청(典祀廳), 재살청(宰殺廳), 제관방(祭官房), 수복방(守僕房), 제집사방(諸執事房), 금루청(禁漏廳), 악공청(樂工廳), 궁사 직려(宮司直廬), 전설사고(典設司庫), 헛간〔虛間〕, 수문장청(守門將廳), 외대문(外大門)으로 구성되었다.

5 정조, 창경궁 담장을 허물다

경모궁 재건 3년 후인 1779년(정조 3)에 정조는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위쪽의 북쪽 담장을 헐고 ‘매달 알현한다’는 뜻의 월근문(月覲門)을 설치하고 길 건너 경모궁에는 ‘날마다 우러러 본다’는 뜻의 일첨문(日瞻門)을 만들었다. 이는 1416년(태종 16) 태종이 종묘 북쪽에 북신문(北神門)을 만들어 종묘에 쉽게 통행한 사례를 참조한 것이다. 두 문의 설치로 정조 또한 경모궁을 방문할 때 돌아서 가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보다 자주 사도세자를 만날 수 있었다. 정조는 매달 한 차례 경모궁에 전배할 때마다 창경궁 월근문 – 일첨문 – 경모궁으로 가는 길을 이용했다.

6 경모궁 주변 지역을 개발하다

경모궁이 지어진 지역은 본래 인가가 적은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 궁 주변을 활성화하기 위해 궁문 밖 좌우에 호조, 병조, 선혜청, 훈련도감의 직방(直房, 군사들이 수직할 때 활용하던 방)을 설치하였다. 또한 경모궁 동구 밖에서 어의동 동구 안까지의 빈 터에 거주할 백성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경모궁 좌우에 127칸 정도의 집이 들어섰으며, 이들은 궁을 중심으로 궁문 좌우, 각소 직방 남북 담장 밖, 응란교(凝鸞橋), 장경교(長慶橋) 주변 지역에 거주하였다.

경모궁 앞 장경교 주변으로는 시전이 형성되었다. 장경교 아래 대로변으로는 연초여점(煙草旅店), 승혜여점(繩鞋旅店), 초물여점(草物旅店), 생선전 도가(生鮮廛都家)가 설치되었다. 경모궁 궁지 주변에는 내건어여점(內乾魚旅店)과 외건어여점(外乾魚旅店)이, 장경교 위인 응란교 동쪽에는 현방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경모궁의 건설과 함께 백성의 모집을 통해 주변 거주 인가들이 생기게 되자, 행정구역의 개편도 이루어져 1789년(정조 13) 경모궁방(景慕宮坊)이 신설되었다.

7 경모궁, 그 기능을 잃다

사도세자를 추존하려는 노력은 정조 이후 꾸준히 진행되다 고종대에 이르러 결실을 맺었다. 1899년(광무 3) 고종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묘호를 장종(莊宗)으로 하고 능호를 융릉(隆陵)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경모궁에 있던 사도세자의 신위는 종묘의 영녕전으로 옮기게 되어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경모궁 내에 있던 망묘루(望廟樓)는 정조, 순조, 익종(翼宗, 효명세자)의 영정을 봉안한 누각이었다. 경모궁의 기능이 상실되자 망묘루는 북부 순화방의 영빈 이씨 사당인 선희궁 경내로 옮겨지고 이름을 평락정(平樂亭)이라 하였다. 1900년(광무 4)에는 경모궁 자리로 영희전(永禧殿)을 이전하였다.

이러한 경모궁은 일제강점기 영희전을 헐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세우면서 파괴되었다. 지금은 함춘문만 있고, 일부 석축, 계단, 석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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