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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경복궁 중건에 관한 41개월간의 기록

1865년(고종 2) ~ 1868년(고종 5)

경복궁영건일기 대표 이미지

일제강점기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경복궁영건일기』는 고종 대 경복궁의 중건 과정을 모두 기록한 일기 형식의 책이다. 경복궁 영건이 시작되는 1865년(고종 2) 4월부터 공사가 끝나는 1868년(고종 5) 7월까지 매일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편찬자는 한성부 주부 원세철(元世澈)이다. 『경복궁영건일기』는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1책 1권이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와세다대학교 도서관에는 완질로 9책 9권이 소장되어 있다.

2 경복궁영건일기의 체제와 구성

『경복궁영건일기』는 9책 9권으로 구성되었다. 책의 표지에는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란 제목과 권수가 쓰여 있다. 『경복궁영건일기』 1권 서두에는 서문에 해당하는 ‘경복궁영건기(景福宮營建記)’가 쓰여 있으며, “통훈대부 한성부주부(通訓大夫行漢城府主簿) 원세철(元世澈)이 삼가 쓰다.”라고 기록되어 원세철의 주도하에 『경복궁영건일기』가 찬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세철은 원주(原州)가 본관으로 1864년(고종 원년)에 효문전(孝文殿)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866년(고종 3) 영건도감의 낭청이 되었다. 이후 1867년(고종 4) 한성부 주부를 거치고, 임실 현감, 영천 군수, 밀양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복궁영건일기』는 총 41개월간 진행된 경복궁 중건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날씨이다. 『경복궁영건일기』는 공사기간 내내 매일의 날씨 변화를 기록하였고, 비가 온 경우 수심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둘째, 왕의 전교(傳敎) 및 경복궁 공사와 관련되어 신하들이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 경복궁 영건과 관련된 고종 및 대왕대비의 전교, 흥선대원군의 분부를 비롯해 영건도감, 호조, 한성부 등 여러 관사에서 올린 계사(啓辭)가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셋째, 영건도감에서 각 지역에 보내는 공문과 관청 사이에 왕래된 문서가 기록되어 있다. 넷째, 매일 시행된 경복궁 공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경복궁 공사의 진척상황과 세부 공사내역 등을 살필 수 있다. 다섯째, 경복궁 공사에 동원된 장인(匠人)과 담모군(擔募軍), 자원군(自願軍)의 수 및 원납전 현황이 매일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이처럼 『경복궁영건일기』는 경복궁의 중건과정을 공사시작인 1865년 4월부터 1868년 7월까지 날짜별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어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3 270여 년 만의 대공사, 경복궁 중건

1865년(고종 2) 4월 2일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는 경복궁이 조선 건국 시 정궁(正宮)이며, 선왕의 중건 의지가 있었다는 점 등을 강조하며 이의 중건 결정을 신하들에게 공표하였다. 아울러 경복궁을 영건하는 방안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경복궁 건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물자, 재원, 노동력이었다. 이것이 마련되어야만 중건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많은 신하는 경복궁 중건에는 찬성하지만, 다량의 노동력과 재원이 투입되는 토목공사이므로 신중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공사에 필요한 인력을 자원군과 모군으로 조달하였다. 재원은 전국 각계각층에서 원납전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4월 4일 경복궁 중건을 총괄하는 흥산대원군이 3만 냥의 재원을 조달하였고, 왕실이 내탕금 10만 냥을 내놓는 것으로 본격적인 원납이 시작되었다. 모금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돈이 모이고 자원군이 폭증하면서 중건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중건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는 4월 10일 경복궁, 종묘, 사직, 경모궁, 효문전, 북악산, 목멱산, 한강 등지에서 베풀어졌다. 이틀 뒤인 12일에는 고종이 직접 경복궁에 나아가 경복궁 터를 살펴보았다. 경복궁의 공식적인 중건공사는 일관(日官)에게 길일을 받아 4월 13일부터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약 300년간 방치되었던 경복궁의 옛 흔적을 정비하였다. 후원과 경회루 두 곳의 연못에 쌓인 흙을 퍼내어 연못을 회복하는 일과 물길에 쌓인 흙을 퍼서 물길을 내는 공사였다. 이 공사의 경우 약 1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후 후원 담장 밖 신무문(神武門), 교태전(交泰殿), 문소전(文昭殿) 뒤쪽 기슭의 흙을 보충하는 보토 작업과 박석 포장 공사를 시작하였다.

5월부터는 궁궐의 사대문인 광화문, 신무문, 영추문(迎秋門), 건춘문(建春門)의 공사와 궁장 축조를 병행하였다. 궁장의 경우 먼저 옛 성을 허물고 바깥으로 목책을 둘렀다. 11월에 동십자각 터 정비공사가 이루어지고, 2개월 뒤에는 수문정비가 있었다. 궁장 및 사대문 공사는 어영청, 훈련도감, 금위영이 분담하여 공사를 맡아 1866년(고종 3) 7월 마무리되었다.

주요 전각 중에서는 내전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먼저 교태전 공사가 실시되었다. 1865년 5월 교태전 밖 울타리를 설치하고 옛 기단석을 해체하여 대지를 정비하였다. 이어 6월 20일 교태전의 정초(定礎)가 있었고, 8월 서까래를 배치하고 기와를 올리는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이듬해인 1866년에는 좌우의 전각이 완성되고 아미산 석축공사도 진행되었다. 이후 강녕전(康寧殿), 만춘천(萬春殿), 천추전(千秋殿) 등의 건설공사가 이어졌다.

1867년(고종 4)에 들어서면 외전에 대한 공사가 실시되어 사정전(思政殿), 근정전(勤政殿)의 상량식이 있었다. 이때 은전 6푼과 상량문을 함께 들보 안에 넣어두었으며, 진홍색의 종이에 ‘용(龍)’자 1천 개를 써서 한 개의 ‘수(水)’자를 만들어 상량문 위와 아래에 두었다. 또한 먹으로 그린 용[畵墨龍] 1본을 상량문 옆에 두었다. 근정전 상량식 때 넣었던 상량문, 은전, 천개의 용으로 만든 ‘수’자 등의 유물들은 2001년 경복궁 근정전 중수공사 때 발견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울러 동궁, 궐내각사, 후원 구역의 건설도 진행되었다. 자선당은 1867년 4월에 뜰을 정비하고 7월에 주변 행각에 대한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어 비현당, 춘방과 계방, 계조당이 차례로 건설되었다. 사복시, 도총부(都摠府) 등 궐내각사의 건설도 진행되었다.

1868년(고종 5)에는 선원전(璿源殿) 내 재실과 행각 공사를 진행함과 더불어 영추문(迎秋門) 밖에 각사(各司) 공사, 각 전당의 도배 공사 등을 통해 경복궁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그 밖에 육조거리 일대에서 삼군부, 의정부, 종친부, 한성부 등 관사의 공사가 경복궁 중건 공역 내내 병행되었다.

4 경복궁 공사에 몰려 든 사람들

『경복궁영건일기』에는 공사장의 풍경, 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인부들의 모습도 묘사되었다. 경복궁 공사에서 총 616,114명이 자원군으로 활동하였고, 매일 3천 명 정도의 인부들이 품삯을 받고 참여하였다.

서울과 근교 지역 백성의 경복궁 중건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고종이 경복궁 중건에 애쓰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경복궁 공사 현장을 방문했을 때, “전국의 백성이 자원하려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공사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방의 백성들도 식량과 가래[鍤]를 가지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자원하여 일하였다. 신분도 다양했다. 양반을 비롯해서 군졸, 시전상인, 마부(馬夫), 노비, 승려, 가마꾼, 조졸(漕卒), 뱃사람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의 사람들이 경복궁 공사에 자원하였다.

공사장에 등장한 인부들의 모습은 화려했다. 머리에는 오색고깔이나 패랭이를 썼는데, 고깔에 비단을 꽃처럼 잘라 붙이거나 패랭이에 공작 깃털을 꽂고 공사에 참여하였다. 고깔의 모양은 지역마다 특색이 있었다. 경상도 안동 사람들은 ‘김(金)’자가 쓰인 고깔을 썼으며, 뚝섬 사람들은 오색의 고깔을, 정동(貞洞) 사람들은 흰색 고깔을 써서 각기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과 다른 지역을 구분하였다. 서부 정동지역의 경우 자원군 500명의 고깔과 깃발을 모두 흰색으로 통일하였다. 이유는 정동이 한성부 서쪽 지역에 위치하였고 서쪽을 상징하는 방위의 색깔이 흰색이었기 때문이다. 한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은 ‘오강기(五江旗)’라는 깃발을 들고나왔는데, 가장 크고 화려했다고 한다.

고깔뿐 아니라 일하는 곳에 깃발도 세웠는데, 부평 김진현의 문중에서는 ‘충신공 8대손’이라고 적은 깃발을 들고 나왔으며, 나라의 태평과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이 적힌 깃발도 있었다. 이러한 깃발은 처음에는 종이 깃발에서 채색 비단으로, 나중에는 양모로 바뀌어 공사장에서 펄럭였다. 고깔과 깃발을 준비하지 못한 마을은 붉은색이나 파란색의 작은 깃발을 머리에 꽂았다.

아울러 인부들의 공사장에는 이들의 노동력을 북돋우기 위한 징, 북, 꽹과리 등이 동원되었고 각종 풍물패도 성행하였다. 무당패, 광대패, 거사패, 각처 악공, 선소리꾼 등이 장구, 북, 꽹과리, 피리, 생황을 치며 뛰어 놀아 공사장 주변은 시끄러웠다. 일하고 돌아갈 때는 이들이 들고 온 수천 개의 깃발이 휘날렸고, 각양각색의 고깔이 대오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한편에서는 무동이 춤을 추고, 한편에서는 징과 북이 울려 왁자지껄하였다.

이처럼 『경복궁영건일기』에는 당시 경복궁의 건설과정뿐 아니라 공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모습 등도 기록하였다. 270년 만에 폐허로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경복궁이 다시 건설된다고 하니 공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따라서 공사장 주변은 영건공사가 잘 진행되는지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경회루 연못을 준설하는 자원군들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인파 속에서 춤을 추자 구경나온 부녀들이 소리 내 웃으며 흩어졌다 모여드는 모습을 『경복궁영건일기』에서 일대 장관이라고 한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 경복궁영건일기의 의의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건설한 조선의 정궁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후 막대한 재원과 인력 동원의 문제로 쉽게 중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복궁은 1865년(고종 2) 4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868년 7월 완성되었고, 준공과 함께 고종은 새로 건설된 경복궁으로 이어할 수 있었다.

『경복궁영건일기』는 폐허로 되어 버린 경복궁 옛터의 청소부터 경복궁 각 전각의 건설과정, 풍수상의 허점으로 거론되었던 관악산 화기설에 대한 비보(裨補), 건설 공사 비용과 참여했던 장인, 인부들에 대한 급료, 원납전의 모집 상황 등 공사와 관련된 모든 사실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경복궁 중건과 관련된 사항을 기록한 책으로 『영건일감(營建日鑑)』도 있다. 이 자료는 경복궁 중건 공사 내용에 대한 파악보다는 궁궐 공사에 필요한 자재 조달과 원납전 납부를 위해 주무 관청인 영건도감이 각 지방과 관서에 보낸 공문서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경복궁영건일기』는 일기라는 형식의 기록물로 일반적인 건축공사를 다룬 의궤와는 체제도 다르고 기술방식도 차이가 보인다. 하지만 일자(日字)에 따라 공사내용을 서술하여 진행상황을 세밀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경복궁 중건의 역사를 살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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