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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慶熙宮]

광해군이 건설한 이궁(離宮)

1617년(광해군 9)

경희궁 대표 이미지

일제강점기 경희궁 흥화문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경희궁의 원래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으로, 서부(西部) 적선방(積善坊)에 위치한 궁궐이다. 1617년(광해군 9)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잠저(潛邸)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광해군이 경덕궁을 건립하였다. 경덕궁은 경복궁 서쪽에 세워져 ‘서궐’로도 호칭되었다. 영조는 경덕궁의 궁호가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개칭하였다.

2 광해군, 경덕궁을 건설하다

광해군은 즉위한 후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창덕궁의 정비를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으로 이어하지 않은 채 경운궁(慶運宮)에 머물면서 창경궁의 건설을 재촉하였고, 창경궁이 완성되었음에도 그곳에 거처하지 않았다.

창덕궁, 창경궁두 궁궐이 정비되었음에도 광해군은 새로운 궁궐을 짓는데 몰두하였다. 1617년(광해군 9) 1월 광해군은 창덕궁에 불상사가 생길 경우 옮겨갈 곳을 미리 정해둘 목적으로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경궁 건설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6월에 술인(術人) 김일룡(金馹龍)이 새문동(塞門洞)에 위치한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으니 새로운 궁궐을 지을 것을 권유하자, 광해군은 그 집을 관가로 들여 궁궐 건설을 단행하였다. 이때 새 궁궐은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별궁’으로 불리다가, ‘경덕궁’으로 궁호를 정하였다.

광해군은 경덕궁의 건설을 위해 집터를 바친 자에게 품계를 올려주거나 승진의 혜택을 주었다. 유대일(兪大逸)의 집터 7백여 칸과, 이중기(李重基)의 집터 4백여 칸이 경덕궁의 대내에 편입되어 광해군은 유대일에게 실직을 제수하고, 이중기를 당상직으로 승진시켰다. 집터를 바친 심희수(沈喜壽), 조존성(趙存性), 기협(奇協) 등은 석방하였다.

이처럼 광해군은 새 궁궐을 조성하며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새로 건설된 경덕궁을 사용하지 못했다. 이후 경덕궁은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또한 불에 타자, 인조가 인목대비를 모시고 이어한 궁궐이 되었다.

3 영조,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다

광해군 대 조성된 경덕궁은 인조 이후 왕의 거처나 왕실과 관련된 용도로 사용되었다. 경덕궁에는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에 이르는 왕이 임어하였다.

숙종은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13년을 임어하였으며, 영조는 1760년(영조 36)부터 자주 경희궁으로 이어하여 생활하였다. 그리하여 두 왕 모두 경희궁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숙종은 융복전(隆福殿)에서, 영조는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였다. 정조의 경우 1761년(영조 37)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를 치렀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신하들의 조하를 받고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경희궁 존현각(尊賢閣)에서 일기를 썼으며,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덕궁은 경희궁으로 궁호를 개칭하였다. 1760년(영조 36) 영조는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음을 문제 삼고 대신과 관각 당상에게 대책을 의논하게 한 뒤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꾸었다.

4 경덕궁(경희궁)의 공간 구성

경덕궁(경희궁)의 공간구성을 보면, 먼저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궁성의 동쪽에 동향으로 배치), 동문인 흥원문(興元門), 북문인 무덕문(武德門), 서문인 숭의문(崇義門), 남문인 개양문(開陽門) 등 다섯 개의 문을 두었다.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은 이신(李伸)의 글씨로, 현판이 밤에도 붉게 빛난다고 하여 근처 고개를 야주현(夜珠峴)이라고 불렀다.

경덕궁의 정전은 숭정전(崇政殿)이며, 편전은 자정전(資政殿)이다. 숭정전은 원래 융정전(隆政殿)이었는데, 인조 때 숭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기둥이 있는 위쪽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식에 팔작지붕으로 대궐의 정전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다. 건물의 남쪽에는 숭정문(崇政門), 동쪽에는 여춘문(麗春門), 서쪽에 의추문(宜秋門), 북쪽에는 후전(後殿)인 자정전의 정문(正門)인 자정문이 자리 잡고 있다. 숭정전은 경희궁과 연관된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829년(순조 29)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회상전, 융복전 등은 소실되었으나 숭정전은 피해를 면하였다. 숭정전 정면으로 정방형 팔작지붕의 자정문이 나 있다.

숭정전 뒤에 위치한 자정전은 편전(便殿)으로 정면과 측면 각 3칸으로 지어졌다. 1720년 숙종이 승하했을 때에는 숙종의 빈전(殯殿, 관을 두는 전각)으로 사용되었다. 내전의 영역에 위치하면서 편전의 역할도 겸한 흥정당(興政堂)도 있다. 흥정당은 임금이 신료들을 불러 모아 함께 강연을 여는 곳으로 회상전의 남쪽에 있다. 흥정당 뒤로는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內殿)인 회상전(會祥殿)과 정침전(正寢殿)인 융복전(隆福殿)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회상전 아래 연지가 위치해 있으며, 서북쪽 뒤로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이 원종의 집터였다.

한편, 경덕궁에는 승휘전(承暉殿), 경현당, 양덕당(養德堂) 등 세자를 위한 전각이 구성되었다. 이 외에도 경덕궁은 대비를 모신 장락전(長樂殿), 역대 임금들의 세자 시절 강독 장소인 존현각, 영조의 초상을 모신 태녕전(泰寧殿), 군대를 시험하고 사열한 융무당(隆武堂), 집경당(集慶堂), 영취정(映翠亭) 등의 건물들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희궁은 1829년(순조 29) 10월 나인들이 있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회상전, 흥정당, 융복전, 집경당 등 내전의 주요 전각이 소실되어 재건되기도 하였다.

5 19세기 중엽 이후 궁궐의 지위를 상실한 경희궁

경희궁은 영조와 정조 대 왕이 임어하기도 하였고, 1860년(철종 11) 철종이 이어하여 여러 달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희궁은 1865년 경복궁이 중건되는 과정에서 훼철되었다. 경복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자 경희궁 내 숭정전, 회상전, 정심각(正心閣), 사현각(思賢閣), 흥정당 등 주요 전각만 남긴 채 나머지는 모두 헐어 경복궁 나인간(內人間)과 각 관사의 건립에 사용하였다. 경희궁 뜰에 깔린 전석(磚石)과 층계석은 뽑아내어 광화문 중건에 사용하였다. 이렇듯 고종대 경희궁의 전각들은 훼철되어 경복궁 중건의 건축자재로 활용되면서 이궁으로서의 경희궁 본래의 역할은 사라지고 폐허로 변해갔다. 경희궁에 남았던 일부 전각은 창고로 사용되었다. 또한 경희궁의 빈터에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뽕나무밭을 만들었으며, 숭정문 주변 행각에는 양잠을 위한 시설이 설치되었다.

대한제국기에는 경운궁(慶運宮)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정비가 이루어지자 빈터였던 경희궁에서 관병식을 행하여 군사 훈련장으로 기능하였다. 더욱이 경희궁에 경운궁과 연결하는 운교를 설치하여 고종 황제가 군대열병식에 쉽게 참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희궁은 1910년 강제병합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면서 궁궐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경희궁 내 남아있는 전각은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뿐이었다. 이러한 전각들은 일본 거류민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경희궁에 들어서면서 경성중학교의 교사(校舍)나 임시 소학교 교원양성소로 사용되었고, 빈터는 학교 운동장이 되었다.

이후 경성중학교에 부설된 임시 소학교 교원양성소가 경성사범학교로 인계되어 운영되자 교실로 사용된 숭정전과 회상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숭정전은 1926년 일본계 사찰인 조동종 양본산별원 조계사로 팔려나가 본당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계사는 혜화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로 소유권이 넘어가 숭정전은 강의실 등으로 사용되다가 동국대학교 법당 정각원(正覺院)으로 개원하였다. 회상전과 함께 교원양성소 교실과 기숙사로 쓰인 흥정당도 1928년 장충동에 있는 광운사로 이전되었다. 또한 흥화문은 1931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지은 절인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옮겨져서 경춘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 신라호텔이 들어서자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서울시의 경희궁 복원 사업으로 인해 원래 자리로 되돌아 왔지만 완전한 제자리를 찾지는 못했다. 대한제국기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은 전매국 관사를 짓기 위해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다가 박영효의 청원에 따라 사직단 북쪽으로 이전되었다.

이처럼 1930년대에 이르면 경희궁의 남아 있는 전각은 모두 흩어져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등 궁궐로서의 정체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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