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금양잡록

금양잡록[衿陽雜錄]

관료 강희맹의 농사 체험 기록

1483년(성종 14) ~ 1492년(성종 23)

금양잡록 대표 이미지

금양잡록

디지털한글박물관(국립한글박물관)

1 개요

『금양잡록』은 조선 성종대 강희맹(姜希孟)이 금양(衿陽)에서 지은 농업 서적이다. 금양은 지금의 서울 금천구와 경기도 시흥시·광명시 일대이다. 강희맹이 금양 지역의 나이 든 농부들과 대화한 내용, 자신의 농사 경험 등을 토대로 하여 저술하였다.

『금양잡록』은 『농사직설(農事直設)』과 더불어 조선 전기 대표 농서이지만, 차이점은 있다. 『농사직설』은 관찬 농서이지만, 『금양잡록』은 강희맹 개인의 경험과 견문을 토대로 저술된 농서라는 점이다. 당시 경기 지역 농업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료이다.

판본은 여러 종이 있다. 성종은 강희맹의 문집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는데, 아들 강구손(姜龜孫)의 주도 하에 『사숙재집(私淑齋集)』 총 17권이 간행되었다. 여기에 『금양잡록』도 수록되었다. 현재 이 판본은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581년(선조 14)에 『농사직설』과 합철된 판본이 있고, 인조대에 신속(申洬)의 『농가집성(農家集成)』에 수록된 판본도 있다.

2 강희맹, 노년기에 『금양잡록』을 짓다

강희맹(1424~1483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등이 있다. 할아버지는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강석덕(姜碩德), 형은 강희안(姜希顔)이다. 3대의 문집인 『진산세고(晉山世藁)』가 전한다. 강희맹은 개인 문집인 『사숙재집(私淑齋集)』이 있다. 한편, 어머니가 심온(沈溫)의 딸로, 세종은 이모부이고, 문종과 세조는 이종사촌이다.

강희맹은 1447년(세종 29)에 친시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고, 이후 예조좌랑, 이조참의,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여 제일 강명(剛明)한 신하로 꼽을 정도였다. 1468년(예종 즉위)에 남이(南怡)의 옥(獄)을 평정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471년(성종 2)에는 성종을 잘 보필했다고 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다. 그는 『경국대전(經國大典)』, 『동문선(東文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세조실록(世祖實錄)』 등 각종 전적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그림과 글씨로도 유명하였다. 말년에는 노인들과 극담(劇談)을 나눈 것을 모아 『촌담해이(村談解頤)』를 지었는데, 조금은 외설적이지만 웃긴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그의 가문 사람들은 각종 문장에도 능하였지만, 농학(農學)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증조부 강시(姜蓍)는 고려 충정왕 때 이암(李嵒)이 원으로부터 가지고 온 『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형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이라는 원예 서적을 썼다. 그 서문은 강희맹이 지었다.

지금까지 『금양잡록』은 강희맹이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작성한 농서라고 알려져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그가 『금양잡록』을 저술한 시기를 52세인 1475년(성종 6)부터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1483년(성종 14)까지의 기간 중의 어느 시기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성종실록』을 보면, 이 시기에 그는 몇 차례 탄핵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조판서, 지경연사, 황해도 진휼사, 경기 진휼사 등의 직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1475년 은퇴 후에 농업에 힘쓰며 『금양잡록』 저술했다는 기존 논의는 수긍하기 어렵다.

한편, 간행은 서문과 발문이 쓰여진 시기를 근거로 하여 1492년(성종 23) 무렵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3 금양별업에서 농사를 짓다

강희맹이 금양에 갔던 이유는 그 곳에 장인 안숭효(安崇孝)에게서 물려받은 별업(別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무를 마치고 쉴 때 관복을 벗고 금양으로 가서 시골 노인들과 농사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별업은 지금의 별장과 비슷한 개념인데, 그 곳에 소나무, 개오동나무, 뽕나무, 가래나무 등이 우거진 산림과 100무(畝)가 조금 안 되는 규모의 밭이 있었다. 강희맹에게는 금양 이외에도 고양(高陽), 함양(咸陽), 안산(安山) 등에도 별업, 촌사(村舍, 庄)가 있었다.

강희맹은 금양을 척박한 땅으로 이해하였다. 물가에 있는 농토라도 가뭄이 들면 말라버리기 일쑤였고, 홍수가 나면 대부분이 침수되어 버렸다. 수리 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던 듯한데, 그의 농장도 수확량이 많지는 않았다.

그는 금양별업에서 직접 농사도 지었다. 집 앞에 있는 척박한 전답에 농사를 지었는데, 2월 보름 전에 물을 가두어놓고 파종하자 마을사람들은 그에게 너무 일찍 파종하면 벼의 싹이 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강희맹은 다시 늙은 농부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조금 서둘러 파종해도 괜찮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는 이런 경험담을 바탕으로 농사 절기에 대한 서술을 기록하였다.

4 『금양잡록』의 구성과 내용

『금양잡록』은 농가곡품(農家穀品), 농담(農談), 농자대(農者對), 제풍변(諸風辨), 종곡의(種穀宜), 농구(農謳)의 여섯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 부분에는 1491년(성종 22)에 쓴 조위(曺偉)의 서(序)와 아들 강구손의 발(跋)이 있다.

우선 농가곡품은 『금양잡록』 전체의 약 1/2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작물은 그 특성에 맞게 파종하고 키워야만 수확량이 많아지는데, 『금양잡록』은 각 작물 품종 하나하나에 대한 특성을 기록하였다. 80종의 작물을 품종별로 이삭과 열매의 모양과 색깔, 환경에 대한 적응성, 수확기, 밥으로 지었을 때의 맛 등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서술하는 방식은 주로 농민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강희맹이 파종을 촘촘하게 할지 듬성듬성하게 할지를 묻자, 농민은 토지가 비옥하면 씨앗 하나에 30여 개의 줄기가 수확될 수도 있지만 그런 땅이 많지 않기 때문에 촘촘히 파종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종자는 매우 중요했다. 종자에서 많은 수확을 얻으려면 깊이갈이[深耕]를 해야 했다. 강희맹은 농민에게 왜 깊이갈이를 하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이에 농민은 깊이갈이를 하려면 소[牛]가 중요한데, 소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이와 같은 서술은 15세기 금양 지역 농민의 농사 실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전달해주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농담에서는 올벼[早稻]의 이로움, 논의 경운(耕耘, 갈고 김매기) 횟수, 파종의 방법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국가의 농정책에 대해서도 거세게 비판하였다.

세 번째 농자대 부분에서는 강희맹의 농정관을 나타냈다. 그는 사농공상 중에서 농사가 가장 괴로운 직업이지만 나라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금양의 농부들에게 벼슬을 버리고 농사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데 대해서 여러 농부들이 선비가 농사를 짓겠다는 것은 미혹한 일이라며 비웃는 내용까지도 기록하였다.

네 번째 제풍변에 대해서는 농가에 피해가 되었던 풍해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었다. 그는 농사를 그르치는 가장 큰 재해를 가뭄으로, 그 다음을 풍해로 꼽았다. 그는 우리나라 바람이 기존 문헌에 나타나 있는 것과 달리 산을 넘어오면서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섯 번째 종곡의에서는 토양의 특성에 따라 파종 등의 경작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점을 기술하였다.

여섯 번째 농구에는 14수의 한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당대의 농사 모습과 농부의 일상생활이 묘사되었다. 긴 이랑을 매고 난 후에 만족스러움, 점심을 기다리는 농부의 시장함, 보리밥과 아욱국을 차려두고 둘러앉아 즐겁게 식사하는 모습, 해가 진 뒤에 일 마치고 귀가하는 모습, 일이 고단하여 발을 씻지도 못하고 잠들었던 일과까지 노래하였다. 김매는 일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호미[鋤]의 효용성[功]을 읆기도 했다.

5 『금양잡록』의 사료적 가치

『금양잡록』은 15세기 한반도 중부 지역의 농업기술 수준을 유추할 수 있다. 일례로 『금양잡록』에는 이앙법에 대한 서술이 없는데, 당시 남부와 중부의 지역적 차이에 따라 농업 기술에도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처음으로 여러 품종을 해설하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경기지방에 한정된 품종이기는 했지만, 80여 종의 품종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특히, 그는 오곡(五穀)을 중요하게 인식했다. 오곡이 농민층의 안정에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금양잡록』은 조선 후기 농서인 『산림경제(山林經濟)』,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에 영향을 주었고, 일본의 농학자 아오키 곤요(靑木昆陽)의 서적에 인용되기도 했다. 한편, 『금양잡록』은 국어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곡품 부분에서 곡물명이 이두로 표기되어 있고‚ 한글 표기도 주석에 기록된 것을 포함하여 60여 개가 실려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