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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

인조의 47일간 항전지

1624년(인조 2)

남한산성 대표 이미지

남한산성 내 수어장대의 모습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남한산성은 1624년(인조 2) 험준한 산악의 지세를 이용하여 건설한 초대형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세워진 주장성(晝長城) 터를 기본으로 축조했는데,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이 고려되었다. 이러한 남한산성은 전쟁 발생 시 임금이 피난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산성에는 성문, 암문, 장대를 포함한 군사 시설 뿐 아니라 행궁을 갖추고 수천 명의 주민이 거주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따라서 평시의 남한산성은 광주(廣州)의 치소인 읍치(邑治)로서 기능하였다. 2014년 유네스코에서는 이러한 남한산성의 문화유산 가치를 인정해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2 남한산성, 통일신라 주장성에서 그 기원을 찾다

17세기 축조된 남한산성의 역사적 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산성이 사료 상에 나타나는 것은 672년(문무왕 12)부터이다. 이 시기 남한산성은 신라의 신주(新州)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신주는 553년(진흥왕 14)에 설치되었으며, 이후 북한산주(北漢山州), 남천주(南川州)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그 뒤 한산주(漢山州)로 불렸다. 672년에 문무왕은 당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한산주에 둘레 4,360보(8km)에 달하는 주장성을 축성하였다. 이러한 주장성은 신라시대 대규모의 군사와 물자를 수용할 수 있는 군사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후 한산주는 남한산주(南漢山州)로 변경되었다.

현재 남한산성 행궁 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기와와 석축이 발굴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화강암 성돌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건설된 남한산성이 신라 문무왕대의 주장성 터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3 1624년 인조, 남한산성의 축성을 명하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임진왜란 무렵부터 언급되었다. 1593년(선조 26) 유성룡(柳成龍)은 광주 남한산성이 수원의 독성(禿城), 금천의 금지산(衿之山)과 함께 특기할 만한 요새지임을 강조하며 세 성을 지키면 호남까지 방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596년(선조 29)에는 용인과 양지 사이에 석성(石城)을 수축하고 우측으로 독성을, 좌측으로 남한산성을 연계해 삼각의 형세를 이루면 한양 도성의 방어가 견고해 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산성의 형세는 둘레가 포백척(布帛尺)으로 17,400여 척이었으나, 석성의 약 2/3가 퇴락한 상태였다.

이후 1603년(선조 36) 선조는 남한산성의 형세가 조선에서 제일이라는 점, 광주가 남도로 통하는 경기의 요충인 점을 들어 서울의 보장처로 남한산성을 수축할 수 있도록 산성의 지세와 구조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축성 논의는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1624년(인조 2)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가는 상황에서 도성 가까이 대피할 수 있는 산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총융사 완풍군(完豐君) 이서(李曙)를 축성 책임자로 임명하고 본격적인 수축을 시작하였다. 이서는 광주에 머물면서 축성에 동원되는 승병의 문제, 병사의 유무와 기계 점고(點考), 군무 총괄 등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1625년(인조 3) 7월 남한산성 공사 가운데 체성(體城)이 거의 마무리되었고 1626년(인조 4) 11월에 이르러 축성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남한산성은 청량산을 정점으로 검단산, 벌봉 등 주변의 능선을 따라 곡면을 이루며 축조되었다. 둘레는 6,297보(약 8km)에 달했다. 성곽 시설로 여장, 옹성, 성문, 장대, 암문 등을 설치했고, 우물과 연못도 다수 만들었다. 왕이 임시로 머물 행궁도 마련되었는데, 기존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이러한 남한산성에 성곽 축성과 관리, 방어를 위해 승영사찰(僧營寺刹)을 두었으며, 승군 138명이 상주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도의 승군 356명이 매년 교대로 파견되어 남한산성의 수비 및 관리, 군기와 화약을 보관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1626년(인조 4) 남한산성 일대의 방어를 위해 한성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수어청(守禦廳) 경청(京廳)을 설치하고, 이를 지휘하는 수어사(守禦使)를 한성부윤에게 겸직하도록 하였다. 또한 남한산성 방어사의 임무를 광주목사가 겸임하게 하고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겨 관리하는 등 이원적으로 남한산성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이원적 운영방식은 정조대에 일원화되었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수어청 경청을 혁파해 남한산성으로 이전하고, 광주부윤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남한산성은 수어청의 지휘 본부와 광주부의 읍치를 겸하는 군사 및 행정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4 남한산성의 항전을 거울삼아 개축이 이루어지다

남한산성은 축성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란을 겪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청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에 인조는 왕자와 왕실 가족을 강화도로 먼저 피난시켰고, 자신도 강화로 가려고 했지만 청에 의해 길이 끊기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만여 명이 조금 넘는 군사가 방어하고 있었고, 50일 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청군은 12월 16일에 남한산성에 당도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압록강을 넘은 지 일주일 만이었다. 조선군은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여러 차례 소규모의 전투를 치르며 항전의식을 불태웠다. 하지만 1637년(인조 15)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와 군신 등이 포로로 잡혔고, 이후 청군의 화포 공세가 시작되어 성벽 일부가 무너졌다. 결국 인조는 항전을 포기하고 1월 30일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청에 대항한 이래 반청, 자주 의식의 구심점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병자호란의 뼈저린 경험을 토대로 남한산성의 개축, 수축을 통해 산성의 방어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숙종대에는 화포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봉암외성, 한봉외성 등 외성을 축조하였다. 한봉외성의 경우 1693년(숙종 19) 수어사 오시복(吳時福)이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1705년(숙종 31) 청나라 사신이 와서 헐어버리자, 1739년(영조 15) 조현명(趙顯命)의 주도하에 다시 축조하였다. 또한 1719년(숙종 45)에는 옹성과 신남성(新南城)을 축조하였다. 정조대인 1779년(정조 3)에는 원성과 4대문을 수축하고 각 문의 이름을 지어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으로 하였다.

5 남한산성,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다

남한산성은 1954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1960년 4·19혁명 이후 국립공원 지정은 취소되었다. 이후 1963년에 사적 제57호로 지정되면서 복원 및 보수가 이루어졌다. 1965년에 동문이 보수되었고, 1966년에는 삼학사(三學士)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현절사(顯節祠)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演武館)이 보수되었다. 또한 1970년에는 광주유수 이기진(李箕鎭)이 건설한 침괘정[枕戈亭]과 온조왕의 위패를 모신 숭렬전(崇烈殿)이 보수되었다.

이후 남한산성은 1971년 3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체계적으로 관리되었으며, 2010년 1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가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를 통해 남한산성은 조선후기 방어적 군사 기술의 총체와 요새화된 산성 도시를 보여주는 유산 가치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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