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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조선 전국지도의 결정판

1861년(철종 12)

대동여지도 대표 이미지

대동여지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대동(大東)’인 우리나라 전체를 ‘수레[輿]에 땅을 담듯이’ 그린 지도이다. 1861년(철종 12) 김정호(金正浩)가 오랫동안 축적된 지도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완성한 것으로,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세로 6.6m, 가로 3.8m로 가장 크다. 「대동여지도」를 전시하기 위해서는 3개 층 이상의 공간이 필요할 정도이다. 그러나 지도는 한 장이 아니라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제작되어 원하는 일부만 가지고 다니면서 열람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되었으며, 체제·구성·채색·표장(表裝)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국내외에 50여 종이 전해지고 있다. 신유년(1861) 간행된 판본이 20여 종이고, 일부는 갑자년(1864, 고종 1) 판본이거나 미상인 경우이다. 또한 필사본도 10여 종 확인된다.

소장처별로 보면, 국내에는 1861년 간행된 보물 850-1호(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 보물 850-2호(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와 1864년에 간행된 보물 850-3호(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등을 비롯하여 35종이 있다. 이 중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은 현재 전해지는 판본 중 가장 초기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국외에는 일본, 미국 등에 20종 정도가 확인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앞으로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대동여지도」의 판각에 쓰였던 피나무 목판(보물 1581호)도 12장 남아있다. 크기는 가로 43㎝, 세로 32㎝, 두께 1.5㎝ 내외이다. 이 중 하나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표제(標題)가 한 면에 새겨져 있고, 나머지 11개는 양면에 지도가 조각되어 있다.

2 조선시대 지도 제작의 흐름

조선 전기에는 대체로 국가가 주관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1402년(태종 2) 의정부 관료들이 주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만들었고, 1454년(단종 2)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예조참판 정척(鄭陟)과 강희안(姜希顔) 등의 집현전 관료들을 대동하고 삼각산에 올라가 도성의 지리를 살피고 나서 서울 지도의 초본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같은 목판본 지리지(地理志)도 국가에서 편찬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도 지도의 제작 및 수요가 늘어났다. 일단 목판본 지도가 증가하면서 일시에 많은 지도 제작이 가능했고, 목판 기술이 향상되면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 「수선전도(首善全圖)」, 「해좌전도(海左全圖)」 등 정교한 지도들이 나올 수 있었다. 더욱이 대축척지도가 만들어지면서 지도의 크기도 커졌다.

군사적 목적으로 그려진 관방지도(關防地圖)나 특정 지역을 그린 성곽지도(城郭地圖)·궁궐도(宮闕圖)·봉수도(烽燧圖) 등 다양한 지도들도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달에 힘입어 회화식 지도들도 만들어졌고, 휴대용으로 만들어진 수진본(袖珍本) 지도도 증가했다. 전국 혹은 도 단위에서 군현지도집이 제작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지방의 실정을 파악할 수 있는 지역 단위의 지도들도 나왔다.

한편, 18세기 전반 정상기(鄭尙驥)는 지도에 백리척(百里尺)을 사용함으로써 지명·도로 등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정상기의 후손들, 즉 아들 정항령(鄭恒齡), 손자 정원림(鄭元霖), 증손자 정수영(鄭遂榮) 등은 대대로 완성도 높은 지도 제작을 위해 매진하였다. 이외에도 신경준(申景濬), 정후조(鄭厚祚) 등의 지도 제작자들이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성과 역시 김정호의 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

3 김정호의 지도 제작 과정

김정호는 신분, 생몰연대 등이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개인 이력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19세기 지리 관련 자료를 많이 확보하고 연구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최한기(崔漢綺)가 지은 「청구도제(靑邱圖題)」에 따르면, ‘김정호는 20세 무렵부터 지도와 지리서에 대해 연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20대 이후 평생의 연구를 거쳐 『동여도지(東輿圖志)』 , 『여도비지(輿圖備誌)』[최성환(崔惺煥)과 함께 제작], 등의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지리지 편찬은 지도 제작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지리지 편찬을 하면서 지도 역시 다수 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일 계열의 지도를 여러 번에 걸쳐 편찬한 끝에 마지막으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대동여지도」와 같은 걸작이 나오게 된 데에는 김정호의 선행 작업이 기반이 되었다. 그는 1820년대부터 기존 지도의 장점을 모아 전국 지도를 만들기 시작해서 「청구도(靑邱圖)」를 세 차례 편찬하였다. 참고자료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등의 지리지와 신경준 등의 지도를 주로 활용하였다. 당시 김정호가 가장 주력했던 점은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대축척지도의 제작이었다. 그 결과 지금의 지도책처럼 책장을 넘기며 지도를 열람할 수 있도록 「청구도」를 제작하였다. 각 「청구도」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김정호는 10리 간격으로 거리를 표기하거나 여러 지도 정보를 기호로 표기하는 등의 보완을 해나갔다.

그가 「청구도」를 바탕으로 「대동여지도」라는 새로운 이름의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1850년대 전반기이다. 우선 축척 212,000:1의 「대동여지도」(14책)를 제작하였는데, 이후 몇 차례 수정을 거치며 축척이 다른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다가 축척 166,000:1의 조선 전도 「동여도」(23책)를 만들었고, 1861년(철종 12)에 「동여도」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166,000:1(혹은 160,000:1)의 「대동여지도」(22첩)을 목판본으로 제작하였다. 1864년(고종 1) 또 다시 수정을 거친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4 대동여지도의 구성

「대동여지도」의 여러 판본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토대로 하여 지도의 구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1첩의 맨 앞에는 ‘대동여지도’의 표제가 있다. ‘당저십이년신유(當宁十二年辛酉, 1861년, 철종 12년)’의 간행 연대와 ‘고산자교간(古山子校刊)‘이라 하여 제작자 김정호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방안표(方眼表), 지도표(地圖標), 지도유설(地圖類說), 도성도(都城圖) 경도오부도(京兆五部圖) 등과 함께 조선의 가장 북쪽 지역인 함경도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일대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방안표는 축척을 나타낸 것으로 세로 120리, 가로 80리를 표기하였다. 지도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의 기호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지도유설에서는 지도의 기원을 서술하고 편찬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지도의 서문에 해당한다. 도성도, 경조오부도의 서울지도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제2첩에는 경도(京都)와 전국 주현의 진보(鎭堡), 산성, 봉수, 역참, 방면(坊面), 전부(田賦), 민호(民戶), 인구, 군총(軍摠), 목장, 창고, 곡총(穀摠) 등의 통계가 실려 있고, 경흥(慶興), 회령(會寧), 무산(茂山) 등 3개 군현 지도가 수록되었다. 이후 제3첩부터는 모두 지도이다. 제3첩의 부령(富寧), 후주(厚州) 이하 제22첩의 제주(濟州), 정의(旌義), 대정(大靜)까지 전국의 각 군현이 지도로 표현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의 구성은 판본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일례로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의 경우에는 표제, 지도유설, 도성도, 통계 부분이 없다. 부산대 도서관 소장본은 지도유설, 통계 부분이 필사로 추가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지명이나 기호가 추가되는 사례, 잘못된 지역 경계선이 수정되는 사례 등이 있다.

5 대동여지도의 특징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에 비해 많은 부분이 보완되었다. 우선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에 비해 간명해졌다. 이미 『대동지지』와 같은 지리지를 별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굳이 지도에 지지(地誌)의 내용을 덧붙이지 않았던 것인데, 김정호는 지도의 특징을 오롯이 살린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려고 했던 듯하다.

목판본 판각에 따르는 몇 가지 특징도 주목된다. 판각이 어렵기 때문에 기존 채색필사본 「동여도」보다 지명, 기호가 줄었다. 산, 하천, 해안의 표시도 판각하기 쉽도록 단순화하였다. 또한 각 군현의 경계를 뚜렷이 표시하였고, 하천을 곡선, 도로를 직선으로 구분함으로써 혼동되지 않도록 했다. 산지는 산봉우리를 개별적으로 그리지 않고 산줄기를 연결시키되 굵기를 달리하여 산세를 표현하였다.

「청구도」보다 늦게 제작된 「대동여지도」에서는 몇 가지 달라진 점도 보인다. 「대동여지도」는 매방 10리를 방안 격자로 표기했던 「청구도」의 방식을 없애고 지도 안 도로망에 10리마다 방점을 찍음으로써 거리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청구도」는 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체 지도를 펼쳐 볼 수 없었는데, 「대동여지도」는 분첩절첩식으로 만들어 원하는 지역의 위아래를 붙여 한눈에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전국을 남북으로 120리 간격으로 나누어 22개 층으로 나누고, 동서로는 80리 간격으로 1∼8면으로 나눠 병풍처럼 접었다가 펼 수 있는 모양이 되도록 한 것이다. 즉, 1첩은 가로와 세로를 맞추면 도합 120면(각 2쪽씩 펼침면으로 구성)의 전국 지도가 되는데, 일부 지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경우 1개 첩만 뽑아서 휴대할 수도 있었다.

6 지도사적 가치

「대동여지도」는 지리 정보를 체계화하여 많은 이들에게 제공하려 했던 오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김정호는 현대 지도 못지않게 실제 지형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 냈고, 목판본으로 많은 지도를 찍어 보급하였다. 그리고 목판으로 찍어낸 후에 군현 간 경계를 비롯하여 강, 바다, 기호 등에 색칠하기 쉽도록 배려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에 판화예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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