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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률[大明律]

형사처벌의 기준이 되다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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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률』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대명률』은 중국 명나라에서 만든 형법전이다. 고려말에 수입되어 1392년 조선 태조의 즉위 교서에서 언급된 이래 1905년 『형법대전(刑法大全)』이 시행되기 전까지 500년 남짓 우리나라에 적용되었던 형법의 기본법전이다.

2 『대명률』의 전래

고려말은 혼돈의 시대였다. 원명 교체기에 고려에 등장한 새로운 세력들은 그간의 적폐를 일소하기 위한 여러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처벌의 일관성에 대한 논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의 상황은 법 적용이 일관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비슷한 사안에 대하여 비슷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인식을 갖게 되고 법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질 것이다. 『고려사』의 기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법에 대하여 이러한 진단을 내렸다면, 그에 대한 처방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시스템을 재조정하거나 제도를 혁신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고려말의 상황을 시스템 재조정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여러 분야의 혁신안이 나왔는데, 형법과 관련하여서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원나라의 법과 고려 특유의 개개의 법을 혼용하여 사용할 것인지, 오래된 당나라의 형법을 사용할 것인지, 당시에 원나라를 밀어내고 있던 신흥 강국인 명나라의 법을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법전을 만들 것인지였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은 법을 적용한 안건에 대하여 사정에 따라 처벌을 올리거나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다만 자의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그러한 형량의 가감에는 국왕과 여러 신하들 간의 치열한 논쟁이 수반되었다. 형법은 처벌의 기준이 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중점이 있었기 때문에 지배층은 외부의 법을 가지고 오는 데에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다만 원의 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원명교체기라는 시대상황에서 부적절하였다. 또 새로운 형법전을 만들려는 정몽주의 노력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경국전』에서 『대명률』을 써야한다는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대명률』이 도입된다. 정도전이 작성한 태조의 즉위교서에서는 『대명률』의 적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대명률』 자체가 명나라에서 여러번 수정되었기 때문에 이 때 전래된 『대명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홍무 9년(1376)에서 홍무 16년(1383) 사이에 개정된 판본이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최종판인 홍무 30년(1397)의 판본도 이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3 『대명률』의 주요 내용

『대명률』은 형법전이다. 사실 전통시대의 법전이 현대처럼 사안을 민사와 형사로 나누어 민법, 형법 등으로 구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분류체계가 달랐다. 대체로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규율들은 ‘율(律)’이라는 명칭의 법전에 규정하고, 행정조직이나 기능, 제도 등과 같은 규정들은 ‘전(典)’이라는 법전에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직무의 분장을 현대는 행정, 국토, 법무 등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전통시대에는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으로 나누고 있었다. ‘전’에는 육조 조직에 따른 직무분장 및 그와 관련된 업무 등에 대하여 규정되어 있었으며, ‘율’에는 여러 처벌의 양상들이 이러한 직무 분장에 따라 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관리의 임용과 관련된 것은 이전(吏典)에 속하는 것이면서, 그와 관련된 각종 비위행위에 대한 처벌은 이율(吏律)에 규정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집이나 토지와 관련된 사안은 호전(戶典)에 규정하면서, 토지를 강점하는 등의 행위에 대한 처벌은 호율(戶律)에 규정하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에 따라 『대명률』도 이호예병형공의 6개 율로 구분되어 있었다. 다만 『대명률』은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법이기 때문에 직무분장을 하였다고 하여도 공통되는 사항들이 있을 것인데 각 율마다 반복하여 규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죄를 범하였을 때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형사미성년자는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등은 형벌적용 시에 공통될 수 있는 사항이다. 『대명률』은 이러한 규정들을 모아서 전체 6개 율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명례율(名例律)이다. 따라서 『대명률』은 명례율과 6개 율을 합쳐 7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율부터 공률까지 차례대로 살펴보면 우선 이율은 관리의 권한과 의무, 임면, 근태, 상벌, 사무처리에 관한 내용과 그 처벌에 대하여 규정한다.

다음으로 호율에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화인 토지, 가옥, 국가가 개별 호를 통제하기 위한 내용,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 호와 호의 결합인 혼인, 호에서 징수하는 세금 등과 관련한 처벌에 대하여 규정한다. 예율에서는 국가의 의례와 사회관계 속에서의 의례와 관련된 위법행위와 그 처벌에 대한 규정한다. 병률에서는 군대와 관련된 내용을 규정하는데, 궁궐의 수비나 전투시에 쓸 말을 기르는 것도 군대에서 담당하므로 병률에서 규정한다. 형률은 그야말로 일반적인 형사사건의 대부분을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대명률』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반역, 살인, 폭행, 강절도, 모욕, 강간, 위조 등 현대사회에서도 범죄로 인정되는 대부분의 범죄양태가 형률에 규정되어 있다. 아울러 어떤 행위가 범죄가 되느냐뿐만 아니라 어떤 과정을 밟아서 처벌할 것인가를 현대에서는 실체적인 문제(실체법)와 절차적인 문제(절차법)로 나누어 구분하는데, 『대명률』에서는 이러한 구분 없이 형률에 이러한 절차적인 내용도 규정되어 있고, 형벌의 집행까지도 규정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공률에는 각종 공사와 도로, 교량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벌하는지를 규정하고 있다.

4 조선에서의 운용

『대명률』은 법이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여도 될 듯하지만, 어떤 법이든 외국의 법이 수입되어 그대로 시행되는 일은 없다. 그것은 법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하듯이 그 사회의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혼인 형태를 보자면 당시에 중국에서는 친영이라고 하여 처가 시가로 들어와 사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반면에 조선은 이전부터의 전통대로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풍속이었다. 시집살이를 하는 경우에는 시가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였고, 많은 규정들이 남편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사위가 처가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보다 훨씬 무겁게 처벌되었다. 반면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에는 사위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처가 가족들이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가 중요하였다. 시집살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대명률』의 규정이 처가살이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에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에는 조선사회를 이루고 있는 가족의 기반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또한 『대명률』의 성립단계에 중국에서는 이미 노비제도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였는데, 조선은 1894년의 갑오개혁 때까지도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비제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조선의 입장과 상민과 노비의 차이를 그리 엄격히 두지 않는 『대명률』의 입장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 초에는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이 벌어질 때마다 국왕과 신료들 간의 토론을 통해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 이외에도 『대명률』의 규정대로 따라서는 구체적인 타당성을 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국왕과 신료들 간의 토론을 통하여 당률 등 여러 다양한 법전의 규정들을 참조하며 새로운 대안적인 해결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대명률』을 적용하면서도 이러한 대안적인 해결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이 왕조국가였기 때문에 국왕의 최종적인 권한이 있었기 때문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사례에 대한 일반적인 적용을 넘어서 문제가 된 특정 사건의 해결에 있어서 그 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방안을 도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서는 법의 일관된 적용이라는 측면에서는 저해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할 때에는 국왕과 신료들 간의 토론을 통하여 자의성을 줄이고, 후대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하면서 그 결정을 당해 사건에만 적용할 것인지 이후에도 적용할 규례로 할 것인지까지 고민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법의 안정적인 적용을 크게 저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국왕이 판결했기 때문에 규정화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조선에서 편찬한 법전의 해당 부분에 실리기도 하였다.

위에서 ‘전’에는 행정조직이나 기능, 제도 등과 같은 규정들을 싣는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례들도 조선의 법전에 수록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법전에는 형사규정들도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조선의 대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형전의 첫 조문인 형률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관련된 용률(用律)조에서 ‘대명률을 사용한다(用大明律)’라는 규정을 두면서도, 각종 형사규정들을 『경국대전』의 각 부분에 수록하였다.

한편 『대명률』을 조선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언어적인 문제도 있었다. 즉 한문으로만 구성되어 있었기에 실제로 법을 집행해야 할 계층에서 그 해석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법문은 현재도 일반인이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당시에는 순한문으로 이루어진 『대명률』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에는 이중의 어려움이 따랐다. 우리나라의 법전이 순 영어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를 상상하면 좋을 것이다. 때문에 당시에 한문을 어느 정도 읽기 쉽게 해주는 보조적인 장치인 이두를 사용하여 『대명률』을 번안하는 작업이 김지(金祉), 고사경(高士褧)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정도전과 당성(唐誠)이 감수하여 출간하였다(태조 4년, 1395). 『대명률』의 법문을 그대로 두고, 바로 아래에 이두를 사용하여 『대명률』을 번안하여 수록하는 방식이다. 이를 당시에는 ‘대명률’ 또는 ‘대명률서(大明律書)’ 또는 ‘직해대명률(直解大明律)’이라고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 책을 다시 출간하면서 ‘대명률직해’라는 명칭을 붙인 이래로 현재까지 『대명률직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 『대명률직해』에는 위에서 언급한 조선의 사정을 고려한 판결들이 직해문의 형태로 실려 있는 경우가 있다.

이외에도 대명률의 규정들 중 의문이 나는 규정들은 국왕과 대신들간의 토론을 통하여 해결해 갔는데, 이에 도움을 주는 대명률해설서들이 존재하였다. 중국에서 전래된 『율해변의(律解辨疑)』, 『율학해이(律學解頤)』가 있었으며, 이러한 해설서들을 참조하여 조선에서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가 있었으며, 중국의 사례를 덧붙인 대명률해설서를 재출간한 『대명률부례(大明律附例)』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서적들을 통하여 『대명률』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가 『대명률』을 적용하면서 그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던 시기라고 한다면, 이후의 시기는 『대명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일어나는 여러 새로운 사안들을 정립해가는 시기였다고 보인다. 『경국대전』에 실려 있던 형사규정들에 비하여 후기의 『속대전』이나 『대전통편』에 실려 있는 형사규정의 대폭적인 증가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명률』은 1905년 형법대전의 시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형법대전의 규정 대부분이 『대명률』의 규정들을 근대식 조문체계에 따라서 정리한 것임을 생각하면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기까지 『대명률』이 계속하여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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