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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단[大報壇]

조선, 명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다

1704년(숙종 30)

대보단 대표 이미지

동궐도에 묘사된 대보단

고려대학교 박물관

1 개요

대보단은 1704년(숙종 30) 명(明)이 멸망한 지 1주갑(周甲, 60년)을 맞아,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준 명 신종(神宗, 만력제)을 제사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이다. 외국에서 중국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기존의 여러 의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정방형 단(壇)의 형태로 결정되었다. 영조 연간에는 제사의 대상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숭정제)과 태조(太祖, 홍무제)를 추가하였다. 아울러 대보단을 증축하고 제사 관련 건물들을 추가로 건립하였다. 이후 제사의 횟수, 참여 인원도 늘어났다. 대보단 제사는 1894년까지 이어졌으며, 조선 국왕들은 직접 제사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2 대보단의 탄생

대보단의 설립 논의는 1704년(숙종 30) 초 숙종의 발의로 시작되었다. 숙종은 명이 멸망한 지 주갑이 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며 명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신료들도 긍정적이었지만, 예제(禮制)의 측면에서 외국의 국왕이 중국 황제의 제사를 지낸 적이 없다는 점, 새로운 제사 공간의 위상과 종묘와의 관계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묘우(廟宇)가 아닌 제단(祭壇)의 형태로 지어 의례의 충돌을 피하기로 정리하였다.

제단 설립의 방침도 정해졌다. 첫째, 형태는 정방형으로 한쪽 길이 25척(7.5m) 높이 5척(1.5m)으로 하였다. 둘째, 음악과 관련된 의례는 사직단(社稷壇)의 전례를 따르기로 하였다. 셋째, 제물품식(祭物品式), 제문(祭文), 기타 의례는 명의 의례서를 기준으로 하였다.

제단의 명칭은 ‘대보단’으로 정했다. ‘대보’는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나오는 말로 하늘에 크게 보답한다는 의미이다[大報天而主日也]. 장소는 창덕궁 후원 서쪽 요금문(曜金門) 밖 옛 별대영(別隊營) 자리로 확정했다. 제단의 높이는 처음 제안보다 낮은 4척으로 조정하였고, 제단 주변으로는 담장[壝墻]을 쌓았다. 제사는 1년에 한 번 명이 멸망한 3월에 지내기로 하였다. 최종적으로 1705년 초에 공사를 완료하였고, 같은 해 3월 9일 숙종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대보단에서 첫 번째 제사를 시행하였다.

3 영조와 정조, 대보단을 확장하다

영조 대에는 명이 건국한 태조와 마지막 황제 의종을 대보단의 제사 대상으로 추가하였다. 의종에 대한 제사는 1704년(숙종 30)에 숙종이 지내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제사 대상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정식으로 제사 문제가 거론된 때는 1749년(영조 25)이었다. 1739년(영조 15)에 청에서 『명사(明史)』가 완성되었는데, 그 중 「조선전(朝鮮傳)」에 병자호란 때 의종이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라는 내용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의종을 제사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과정에서 영조는 명 태조가 조선에 국호를 내려주었다는 점과 숙종이 명 태조의 은혜를 칭송했다는 것을 근거로 의종과 함께 대보단 제사에 넣도록 하였다.

영조 대에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대보단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1739년(영조 15) 가장 중요한 제사 기구인 신좌(神坐)와 신탑(神榻)을 보관하기 위한 신실(神室)을 다시 만들었다. 1745년(영조 21)에는 대보단 담장 동편에 건물을 건립하도록 했다. 1749년(영조 25) 대보단에 기존의 신종 외에 명 태조와 의종을 추가로 배향함에 따라 대보단을 증축하고 부속건물을 건립하였다. 먼저 기존 제단의 높이를 4척에서 5척으로 높이고, 제단 주변의 공간도 사방 25척에서 가로 39척, 세로 30척으로 넓혔으며 유문(壝門)과 제단의 거리도 더 벌렸다. 제단 동쪽 유문 밖에 신실을 다시 짓고는 이름을 봉실(奉室)로 변경하였다. 기존의 신실은 향실(香室)을 명칭을 바꾸고 제기를 보관하였다. 대보단 서쪽에는 전사청(典祀廳), 재생청(宰牲廳), 악생청(樂生廳)을 만들었다. 또한 출입문에 현판을 걸었는데, 1745년(영조 21) 대보단 남쪽 담장의 바깥문을 공북문(拱北門)이라고 하였고, 1749년(영조 25)에는 대보단 남쪽 담장의 중문을 열천문(冽泉門)으로 하였다. 한편, 1799년(정조 23)에는 경희궁의 경봉각(敬奉閣)과 창경궁의 흠봉각(欽奉閣)을 대보단 서쪽으로 옮기고 경봉각으로 명명하였다. 경봉각은 명 황제의 칙서 등 명과 관련된 물건을 보관하는 곳으로, 대보단과 함께 명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영조대 이후 제사의 횟수도 늘어났다. 숙종 대에는 매년 음력 3월 상순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영조는 망배례(望拜禮)를 추가하였다. 망배례는 의례의 대상이 먼 곳에 있을 때 그 쪽을 바라보고 절하는 의례로서, 명의 세 황제의 기일(忌日)과 즉위일(卽位日)에 시행되었다. 망배례는 대보단뿐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정전(正殿) 및 춘당대(春塘臺) 등에서도 시행되었다. 제사에 참여하는 구성원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대보단의 제사 대상이 세 황제로 확정된 이후, 영조는 세 황제의 기신일에 명의 후손과 병자호란 때 충심을 보인 신하들의 자손을 망배례에 참여하도록 했고, 1757년(영조 33) 망배례 때에는 충렬사(忠烈祠) 및 현절사(顯節祠)에 배향한 신하들의 후손을 참여시켰다. 두 사우에는 병자호란 때 순절하였거나 청과의 화약을 반대한 인물들이 배향되어 있었다. 같은 해 영조는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三學士) 및 척화를 주장했던 신익성(申翊聖)·허계(許啓)·이명한(李明漢)·이경여(李敬輿) 등 오충신(五忠臣)의 자손 중에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제사에 참관하도록 했다. 대보단 제사 참여 인원은 정조 대 이르러 더욱 늘어났다. 1787년(정조 11) 신종의 기신 망배례에 송시열의 자손을, 1792년(정조 16)에는 이순신 및 임경업의 후손을 참여하도록 했다. 1800년(정조 24) 춘당대에서 시행한 망배례에서는 제사에 참여하는 명 유민과 충신의 후손들이 200명이 넘을 정도로 대규모가 되었다.

1822년(순조 22)에는 대보단의 배향된 세 명 황제에게 각각 1명의 명 신하를 종향(從享)하였다. 명이 멸망한 갑신년(1644)의 3주갑(180년)을 1년 앞두고 순조는 세 황제의 충신으로서 같이 배향할 인물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제1위인 명 태조에 대해서는 서달(徐達)로 결정했다. 서달은 젊어서부터 명 태조를 도와 건국에 일익을 담당했었다. 제2위 명 신종에 대해서는 이여송(李如松)으로 정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한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3위 명 의종에 대해서는 범경문(范景文)으로 정했다. 범경문은 1644년 명이 망하자 자결한 의리를 높이 평가하여 선정되었다.

4 대보단, 대한제국까지 이어지다

대보단에 대한 제사는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고종은 즉위 직후 3년 간을 제외하면 1894년(고종 31)까지 매년 한 차례 이상 대보단 제사에 직접 참여하였다. 기존의 역사 사전에서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대보단 제사가 없어졌다고 서술한 사례들이 있는데, 제사가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1882년 임오군란 직후 국왕의 제사 참여 빈도는 오히려 늘었다. 고종이 직접 참여한 마지막 제사는 청일전쟁 발발 직전 1894년(고종 31)에 있던 명 태조에 대한 망배례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청군이 철수한 이후 국왕의 대보단 제사 참여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896년(건양 1) 국가 제사를 정비할 때 대보단은 원구단(圜丘壇),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사직단(社稷壇)과 함께 대사(大祀)로 분류되었다. 제사의 시기는 종전과 동일한 3월 상순이었다. 이와 같이 대보단의 존재는 대한제국기까지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1897년(고종 34) 유생들이 고종에게 제위(帝位)에 올라야 한다는 상소에서 대보단은 명의 정통을 연결해주는 장치로서 서술되기도 하였다.

5 대보단의 정치·사상적 의미

대보단은 조선 후기 정치·사상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유산이다. 첫째, 대보단은 명과의 유대를 상징한다. 대보단의 건설 동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원하도록 한 신종의 조치에 대한 보답과 동시에 명의 존재를 기억하고자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신종을 제사 대상으로 선정하면서도 제사의 시점은 명이 망한 3월로 정하였다.

둘째, 대보단은 조선 스스로 중화 문명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상징물이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중화로 표현되는 유교 문명을 중국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보편문명으로서 인식하였다. 따라서 명 황제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곧 조선이야말로 보편 문명의 계승자라는 것을 공식화하는 일이었다.

셋째, 정치적 측면에서 조선 국왕들은 대보단의 건설·확장을 통해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 정치사상의 영역에서 의리는 명분뿐 아니라 실제적인 정치적 추동력을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명에 대한 의리, 즉 대명의리(對明義理)를 지향하고 표명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 국왕들은 대보단을 건립·확장하면서 관련 의례를 새롭게 만드는 동시에 제사의 주관자가 됨으로써, 대명의리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아울러 대보단 제사에 명의 유민과 충신의 자손을 참여시켜 ‘충(忠)’의 가치를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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