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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통편[大典通編]

『경국대전』 이후 300년 만의 통일 법전

1785년(정조 9)

대전통편 대표 이미지

대전통편

e뮤지엄(국립민속박물관)

1 개요

『대전통편』은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 영조대의 『속대전(續大典)』의 법령과 그 뒤의 수교(受敎)를 통합·정리하기 위해서 1785년(정조 9)에 편찬되었다. 부교리 이익진(李翼晉)의 상소를 계기로 법전의 편찬에 착수, 1785년 9월에 완성되고, 이듬해인 1786년(정조 10) 정월부터 시행되었다. 『대전통편』이란 법전명은 정조가 명명한 것으로,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종합하여 편찬했다는 의미이다.

2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합, 증보하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법제의 정비를 논의하였다. 우선 1777년(정조 1)에 형벌 기구의 규격 및 사용법을 규정한 『흠휼전칙(欽恤典則)』을 편찬하였다. 1784년(정조 8)에는 『수교집록(受敎輯錄)』을 경연에서 강론하면서 속편의 편찬을 논의하였다. 『대전통편』은 이러한 정조의 법제 정비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법제 정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784년(정조 8) 부교리 이익진의 상소에 정조가 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익진은 우리나라의 형률이 명의 형법인 『대명률(大明律)』과 『속대전(續大典)』, 『수교집록』을 함께 살펴서 적용하기 때문에 조율 과정에서 의문점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법을 담당한 신하에게 『속대전』의 예에 따라 강(綱)과 목(目)을 세우고 분류해서 법전을 간행하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정조는 『수교집록』을 편찬한 숙종의 뜻을 계승하여 『속대전』 이후의 수교를 모아 『수교집록』 속편의 간행을 대신들과 의논하였다.

이후 정조는 『수교집록』의 속편을 담당할 찬집청을 설치하고 편찬 인원을 선발하였다. 수교 찬집 당상(受敎纂輯堂上)으로 김노진(金魯鎭)‚ 엄숙(嚴璹)‚ 정창순(鄭昌順), 이시수(李時秀), 김재찬(金載瓚) 등 5명을 임명하였다. 또한, 실무를 담당할 낭청(郞廳)으로 이긍연(李兢淵), 안정현(安廷玹), 이운빈(李運彬), 이조승(李祖承), 임제원(林濟遠) 등 12명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수교집록』의 속편을 만들려던 의도는 편제과정에서 『경국대전』과 『속대전』 등 이전의 법제를 보완하고 정리하는 “보편(補編)”의 항목을 논하기도 해 새로운 체계의 법전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법전의 초고본이 완성되자, 법전의 명칭은 정조의 뜻에 따라 『대전통편』으로 정해졌다.

정조는 『대전통편』의 초고가 완성되자 대신들에게 재검토를 지시하였다. 그는 『대전통편』을 전·현임 대신들에게 두루 보이고, 각각 자기 의견을 써서 찌지[籤]를 붙이게 하였다. 이전과 예전은 이조 판서와 예조 판서가 원본과 대조하고, 호전과 공전은 호조와 선혜청(宣惠廳) 당상관이 원본과 대조하였다. 병전은 병조 판서와 여러 무장(武將)들이, 형전은 판의금부사와 형조 판서가 원본과 대조하였다. 이들은 각각 해당 관사에서 현재 시행하는 제도를 가지고 조목마다 대조 확인하여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대전통편』 편찬의 총 담당은 김치인(金致仁)이 맡았다. 이유는 영조대 『속대전』의 편찬을 주관한 재상 김재로(金在魯)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전통편』은 쓸모없는 문자나 어구를 삭제하는 과정을 거쳐 1785년(정조 9) 최종완성을 보았다.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통합 편찬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조는 『속대전』 이후의 수교를 새로 첨부하는 데 신중을 기했다. 정조는 특히 ‘자세하게 할지언정 소략하게 하지 말 것’을 언급했으며, 이의 대상으로 육전 가운데 특히 형전(刑典)을 지목하였다.

『대전통편』의 최종 원고가 완성된 후 편찬의 총괄을 맡은 이복원(李福源)이 서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편집에 참여한 김치인, 김노진, 정창성, 엄숙이 전문(箋文)을 올렸으며, 전문은 김치인이 작성하였다. 정조는 9월 11일 간행된 『대전통편』을 창덕궁 인정전에 나가 몸소 받아 전국에 반포하였다. 호남, 영남, 관서의 감영에는 번각(翻刻)하여 판본(板本)을 간직하게 하였다. 이러한 『대전통편』은 형조 판서 이명식(李命植)이 반포 직후 시행할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의 명에 따라 이듬해 정월인 1786년(정조 10)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3 『대전통편』, 『속대전』 이후의 변화상을 집약하다

『대전통편』은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합하여 증보하고 『속대전』 이후의 수교와 정조대 법례를 모아 한 책으로 만든 것이다. 『대전통편』의 부문(部門)과 항목(項目)의 구분은 『경국대전』의 체제를 따랐으며,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의 육전(六典)체제로 편집되었다.

법전의 편찬 순서에 따라 『경국대전』의 조문을 가장 먼저 넣고, 『속대전』을 다음으로 했으며, 마지막으로 연간의 수교들을 수록하였다. 이때 『경국대전』의 규정은 원(原)자로 표기했으며, 『속대전』은 속(續)자를, 『속대전』 이후의 수교들을 정리하여 새로 증보한 부분은 증(增)자로 표기하여 병렬적인 배치를 이루었다. 정조 연간 모든 법제들이 대전류의 위상을 부여받아 『대전통편』으로 집대성되었다. 특히, 선대에 만들어진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법조문에 대해서는 영세불변이라는 조종성헌(祖宗成憲) 준수에 따라 개정되어 폐지되었을 경우에도 조문은 삭제하지 않은 채 ‘금폐(今廢)’라고 표시하였다. 다만 조문 가운데 오류가 명백하거나 숫자, 명칭이 뒤바뀐 경우는 바로잡았다.

증수(增修)된 조목(條目)은 이전(吏典)이 212조, 호전(戶典)이 73조, 예전(禮典)이 101조, 병전(兵典)이 265조, 형전(刑典)이 60조, 공전(工典)이 12조 총 723조이다. 증보조항은 크게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본문과 전반적인 체제를 조정하는 세주(細註)로 구성되었다. 추가된 본문은 새로운 수교의 불필요한 문자나 어구를 삭제한 후 대전에 반영된 내용이며, 세주는 이전의 법제를 일부 조정하여 수정, 보완한 내용이다.

내용적으로 보면 『대전통편』에는 관사의 신설, 혁파, 이관(移管) 등의 상황이 수록되었다. 1760년(영조 36)에 한양 도성 안 개천의 준설과 사산(四山)보호를 위해 설치한 준천사(濬川司)가 신설아문으로 수록되었다. 또한 정조대 국왕의 개혁을 뒷받침했던 규장각과 규장각 신하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부인 헌경왕후(獻敬王后)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에 관한 각종 규정들도 수록되었다. 그 외에 숭덕전(崇德殿), 숭영전(崇靈殿), 선전관청, 수문장청, 수성금화사 등 총 8개 아문이 추가되었다.

관사의 이관 상황도 수록되었다. 교서각((敎書閣)이 규장각으로 이관되었으며, 노비 문서의 관리 및 소송을 담당한 장예원(掌隷院)은 형조로 이관되었다. 관곽(棺槨)의 제조, 판매 및 장례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 귀후서(歸厚署)는 호조로, 국용을 담당한 풍저창(豊儲倉)은 장흥고로 이관되었다. 그 밖에 혁파된 아문으로는 내자시, 내섬시, 사섬시, 사온서, 문소전, 사축서, 수성금화사 등 16개 아문이 있었다.

한편, 국가의 재정 운영체계를 증보하여 명문화하였다. 1750년(영조 26) 종래 2필씩 징수하던 군포(軍布)를 1필로 감하는 균역법으로 인한 세제(稅制)도 『대전통편』에 반영되었다. 균역청의 설치와 1필로 줄어든 것에 대한 부족분을 보충하는 대책으로 어전세(漁箭稅), 염세(鹽稅), 선세(船稅) 등에 대한 사항이 수록되었다.

아울러 1752년(영조 28)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정한 『상례보편(喪禮補編)』을 『대전통편』 체제 안으로 편입시켰다. 국가의 문서행정체계와 그에 따른 국가의 인장(印章)도 재정비되었다. 사대문서에는 대보(大寶)를 사용했으며, 교명(敎命), 교서(敎書), 교지 등 책봉이나 벼슬을 내릴 때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사용하였다. 또한 과거 시험지인 시권(試券), 홍패(紅牌), 백패(白牌) 등 과거 관련 문서에는 과거지보(科擧之寶)가, 서적을 반포할 때에는 동문지보(同文之寶)가 사용되었다. 관문의 글씨체도 군문에서 병조로 관문을 통용할 때 군문에서는 해서로, 병조에는 초서로 쓰도록 하였다.

사법체계도 정비되어 형전이 증보되었다. 추단(推斷)조에서는 군법 외에 효수를 금지하였으며, 난장형을 폐지하였으며, 군문의 경우에만 곤장을 사용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4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 『대전회통(大典會通)』의 기반이 되다

『대전통편』은 『속대전』 이후의 수교를 집대성하기 위한 『수교집록』 속편의 편찬사업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전 시기의 두 법전이 통합되는 형태인 대전류 편찬사업으로 방향이 수정되었다.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은 원전(原典)인 『경국대전』 이후의 변화 내용만을 수록한 증보편이었기 때문에 두 대전의 편(編)과 질(秩)이 달라 보기에 불편하므로 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대전통편』은 두 대전을 통합하여 동일한 편질로 정리했기 때문에 조선초기 이후 18세기 후반까지의 법조문의 양상을 일목요연하게 엮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대전통편』이 『경국대전』 이래로의 영속성을 지니고 발전해 왔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대전통편』의 편찬은 이후 정기적인 법전 편찬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전통편』의 반포 이후 정조는 『전율통보(典律通補)』를 편찬하였으며, 『통편』에 실리지 않은 것과 『통편』 반포 이후 나온 새로운 정식(定式)에 대한 수집도 진행하였다. 정조는 비변사 관원 중에서 편집 당상을 차출하여 『수교집록』의 예에 따라 수집하게 하고 3년마다 첨가해 편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19세기 후반 『대전회통(大典會通)』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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