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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퇴계의 자취가 서린 곳, 영남 유림(儒林)의 중추가 되다

1661년(현종 2)

도산서원 대표 이미지

도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도산서원(陶山書院)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토계리 680)에 위치한 조선 시대 서원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사후 그를 주향으로 하여 퇴계 문도 및 향촌 사림에 의해 1574년(선조 7)에 창건되었으며, 이듬해인 1575년(선조 8)에 사액되었다. 이황에 대한 숭모 분위기와 더불어 조선 후기 영남유림의 본거지로 명성을 떨쳤다. 서원 내 퇴계의 위패가 봉안된 상덕사(尙德祠)는 보물 제211호로,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로 지정된 바 있다. 서원을 중심으로 한 임야 및 전답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2 퇴계의 고향은 조선의 추로지향

이황이 제향된 도산서원은 오늘날 유학의 고장으로 인식되는 안동에 위치하고 있다. 도산서원이 위치한 안동시 도산면은 조선 시대에는 예안현에 속해 있다가 20세기 들어와 안동시로 편입되었다. 조선 시대의 예안현은 안동부(安東府) 본부의 바로 북쪽에 연접한 지역이었는데 예안현의 북쪽지역은 다시 안동부의 영역이었으므로, 예안과 안동을 위시한 부근 지역은 모두 이황과 그 문도들의 활동지역에 포함되었다. 안동이 조선유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성리학 문화를 완성한 이황과 그 문도들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도산서원이 위치한 안동과 그 부근지역은 역사적으로 새로운 사상을 빠르게 흡수하고 정교하게 발전시켜왔던 곳이다. 신라시대 의상(義湘)이 중국에서 화엄학을 배워와 영주에 부석사를 창건한 이래, 안동을 위시한 지역은 그 영향권 아래에서 화엄교단의 근거지로 자리 잡는다. 또한 고려시대이래 이 지역은, 재지사족이 강성하였을 뿐 아니라 주거 조건도 유생들이 선호하는 피병(避兵), 피세(避世)의 안정적 자연 지세를 갖추고 있어 일찍부터 사림의 집단 주거지로 각광받았다. 조선 시대에는 16세기 이황과 그 문도들의 집성지가 되면서, 사림의 대표적인 배출지로서 조선 후기 성리학계를 선도하는 유학의 중심지가 된다.

이처럼 안동지역이 고려 말 조선 초 유학자의 학맥이 이어져 영남지역 사림의 본고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기는 16세기를 거치면서이다. 이 시기는 안동, 예안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당대의 대유(大儒) 퇴계 이황의 학문 활동과 제자 양성, 서원 건립의 노력이 두드러지는 때이기도 하다. 그 문하에서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과 같은 석학들까지 줄줄이 배출됨으로써 이 지역은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추로지향이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을 의미하는데, 그만큼 이황이 조선 성리학과 사림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급기야 16세기 후반 조선의 정계와 학계를 주도했던 사림들은 대부분 이황의 문하를 출입하다시피 하였다 할 정도가 되었고, 이황이 우거하던 도산서당과 그 일대는 자연스레 많은 유학자들이 모여드는 학문적 중심지로 자리 잡는다. 특히 이황 사후인 1574년(선조 7)에 그가 머물던 도산서당 뒤로 도산서원이 창건되어 사액되고, 안동의 여강서원에 이황의 위패가 봉안되면서 이 지역은 명실상부하게 이후 조선 시대 영남 유림의 정신적 중추가 되었다.

3 서원제도의 성립과 퇴계, 그리고 도산서원

조선에서 서원제도가 성립되는 시기는 16세기 중반이다. 서원은 이 시기 관학인 향교의 문제점을 보완할 대안으로 등장하였고, 17세기 들어 제례 봉행과 강학의 기능을 갖춘 사족층의 교학기구이다.

조선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에 건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건립 과정을 보면 사묘(祠廟)와 서원이 별개로 간주되었고, 서원은 사묘의 부수적인 존재였다. 사묘는 교화를 위한 존현처이고 서원은 단순히 유생의 독서처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서원을 명실상부하게 유생의 강학소로 만든 이가 바로 이황이었다. 즉, 조선의 서원제도는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설립으로 나타났지만, 이 서원을 조선사회에 보급하고 정착시켰으며 그 성격을 규정하여 발전의 토대를 만든 이가 퇴계 이황인 것이다. 퇴계는 향촌의 선비들에게 주자학적 정치이념과 학문체제를 가르치고 수련하도록 하여, 차후 향촌사회를 주도할 적극적인 교학체제를 확립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때문에 송나라 때 주자(朱子)에 의해 창안된 지방 사학인 서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퇴계는 풍기군수를 역임하던 때에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을 받도록 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을 출현시켰고, 그 문인들과 함께 서원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명종 말년까지 건립된 서원이 17개 정도였으며 그 중 절반 이상에 퇴계가 관여하였는데, 이로 인해 조선의 서원은 퇴계에 의해 사림의 학문적 기반으로 정착, 보급, 확산되었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퇴계의 주도로 세워진 중종 이후 명종 대까지의 초창기 서원들은 강학의 기능을 강조하며 발전해 나갔다. 이후 선조 대에 이르면 서원은 명종 대까지의 일정한 제약에서 벗어나 사림의 활동기반으로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룬다. 특히 당시의 예안, 현재의 안동에 위치한 영남의 대표적 서원 도산서원이 설립되면서 서원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4 도산서원의 건립

이황이 출생하고 활동한 예안은 당시 안동부의 서북쪽에 연접한 지역으로, 이황은 일찍이 이 지역에 도산서당을 지어 자신과 문도들의 강학처를 마련하였다. 또 이황의 주도로 그 문도들과 예안 사림들이 주축이 되어 1568년(선조 1)에는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다. 역동서원은 당시 지역 사족층의 강학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다 이황 사후 그의 문도들을 중심으로 도산서원이 설립되었다. 도산서원은 이전까지의 여타 서원과 구별되는 특징을 지닌다. 즉 역동서원이 지역 사족의 강학처 정도였다면, 도산서원은 이황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퇴계학파의 강학처라는 성격이 강했다. 도산서원은, 역동서원과 이후 건립되는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아우르며 예안지역 서원의 운영을 주도하였다. 이 세 서원은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는데, 즉 도산서원의 원장이 다른 서원의 원장을 겸임하였고 원생도 도산서원에서만 선발하는 식이었다.

도산서원은 1557년(명종 12)에 시공하여 1561년(명종 16)에 준공한 도산서당에서 비롯되었다. 도산서당을 지을 당시 승려 법련과 정일이 그 공사를 주관하고, 조목(趙穆), 금난수(琴蘭秀), 이교(李㝯) 등 이 시기 예안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재지사족인 동시에 퇴계문도들인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 퇴계는 말년을 이곳 도산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육성하였다. 퇴계의 사후 4년 뒤인 1574년(선조 7)에 문도와 지역 사림들의 발의로 기존 도산서당을 모체로 그 뒷자리에 서원이 창건되었고 이듬해인 1575년(선조 8)에 사액되었다. 사액 당시 한석봉(韓錫琫)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하사받았다.

도산서원이 위치한 지역은, 말년의 이황이 은거하며 제자를 교육하고 그 사후 문도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면서 퇴계학의 본산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황에 대한 이러한 존숭의식은 지역사회에서뿐 아니라 유림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었으며, 조선 후기 유림들은 도산서원을 한 번쯤은 와봐야 할 명소로 여기게 되었다.

5 유림의 참배소, 도산서원

조선 후기 이름난 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안동지역을 여행하며 퇴계의 발자취를 돌아보는데, 먼저 청량산에 들렀다가 도산서원을 찾아 ‘도산서원을 배알한 기문[謁陶山書院記]’을 남겼다. 그 내용에는 먼저 “영남 사람들은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선생의 어버이와 스승에 대해서도 모두 추중(推重)하고 향모(向慕)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선생의 유적이 있고 가르침을 베푼 곳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공경하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라며 지역민들이 이황과 그를 제향한 도산서원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적고 있다.

이익 역시 이황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는데, 도산서원을 답사한 후 도산도(陶山圖)를 제작하며 쓴 발문에서 “우리나라에서 이선생(李先生, 이황)에 대한 사랑과 경모는 매우 극진하여, 문집을 통해 그분이 하신 말씀을 읽고, 문인들이 기록한 행록을 통해 그분의 행적을 읽는다. 이번에 또 도산도(陶山圖)를 통해 그분의 동정과 노닐던 모습들을 모두 상세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무릇 바위 하나 물가 한 곳까지도 손으로 어루만지며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니, 흡사 수염과 눈썹의 올까지도 셀 수 있을 것만 같고 개연히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 라고 하여 그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익은 도산서원의 구조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말에서 내려 공손히 바깥문으로 들어갔다. 서쪽에 동몽재(童蒙齋)가 서당과 마주 대하고 있는데, 동몽재는 어린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곳이라고 한다. 다시 진덕문(進德門)으로 들어가니 또한 좌우에 재(齋)가 있는데, 동쪽은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쪽은 홍의재(弘毅齋)이다. 가운데에 남쪽을 향하여 강당(講堂)을 두었는데 편액을 전교당(典敎堂)이라 하고, 당의 서쪽 실(室)이 한존재(閑存齋)이다. 한존재는 원(院) 내에 반드시 장임(長任)을 두어서 그로 하여금 제생(諸生)을 통솔하며 항상 거처하게 한 곳이고, 박약재와 홍의재는 곧 제생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였다. …… 배알하는 절차를 상세히 물은 뒤에 감히 들어가니, 상덕사(尙德祠)라는 세 글자 편액이 높이 걸려 있었다. ” 라고 하였다.

도산서원을 배알한 기문이나 도산도 발문에서 보듯이, 이익은 도산서원과 그 일대를 돌아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서원 일대를 글과 그림으로 묘사하여 남겼다. 이와 같은 일은 비단 이익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사족들에게 널리 유행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도산도만 10여 점에 이르며 그 제작시기도 이황 생전부터 20세기 초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현존하는 유명한 도산도는, 강세황(姜世晃)의 것이다. 강세황은 도산서원을 실제로 가보지는 못하였으나 1751년(영조 27)에, 병으로 누워있던 이익의 부탁을 받아 기존의 도산도를 참고하여 그림을 그리고 발문을 썼다고 한다. 강세황의 도산도는 현재 보물 제522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황 만년의 은거지였던 도산은, 그를 제향한 도산서원으로 대표되며, 퇴계학의 명맥을 잇는 사람들에게는 스승에 대한 숭모의 마음을 담은 답사지이면서 여타 유림들에게도 한 번 쯤 방문해 보아야 할 명소로 자리 잡게 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조선 후기 1720년(숙종 46)부터 1745년(영조 21) 사이 도산서원의 하루 평균 방문객은 2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대부분이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도산서원은 명실상부하게 조선 후기 유림의 정신적 근거지이자 영남유림의 본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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