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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조선의 세시풍속을 기록하다

1849년(헌종 15)

동국세시기 대표 이미지

동국세시기

e뮤지엄(대전광역시시립박물관)

1 개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홍석모(洪錫謨)가 지은 조선의 세시 풍속서이다. 1월부터 12월까지의 주요 명절, 풍습, 음식 등이 망라되어 있다. 1849년(헌종 15)에 썼다고 추정되며, 모두 1책 4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본은 두 가지가 전해진다. 하나는 1911년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에서 발간한 활자본으로,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와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가 합편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필사본이다.

2 18세기 후반 이후, 많은 세시풍속 서적이 편찬되다

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전반기까지는 다른 시기에 비해 조선의 세시풍속에 대한 기술이 유독 많다. 유만공(柳晩恭)의 『세시풍요(歲時風謠)』처럼 책으로 간행한 것도 있지만, 풍속에 관한 시를 자신의 문집에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시풍속서의 대표작은 『동국세시기』와 더불어 『경도잡지』(18세기 말 무렵) , 『열양세시기』(1819년)를 꼽을 수 있다. 『경도잡지』, 『열양세시기』가 수도 한양의 풍속을 주목했다면, 『동국세시기』는 전국의 풍속을 염두에 두고 찬술이 이루어졌다. 물론 『동국세시기』도 수도 한양의 세시풍속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세시풍속서가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우선 청 연행(燕行)을 통해 명과 청의 총서(叢書)와 유서(類書)가 대량으로 도입되었고, 광범위하고 심도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세시 풍속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당시 유행하던 고증학적 학풍은 조선의 세시풍속에 대해 고증하고 분석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한 당시 국가가 정치·사회적 위기에 봉착하여 과거의 풍속을 그리워하며 회고하는 과정에서 세시풍속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는 견해도 있다. 후대의 기술이기는 하지만 1909년 장지연(張志淵)은 『경도잡지』의 서문에서 옛 문물의 융성함을 통해 조국에 대한 생각을 감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3 홍석모는 어떤 사람인가

홍석모(1781~1857)는 19세기의 문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호는 도애(陶厓)·구화재(九華齋)이다. 어렸을 때에는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조부 홍양호(洪良浩)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순조 때 음사(蔭仕)로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지만, 관직 활동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한편, 1826년(순조 26)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파견된 아버지 홍희준(洪羲俊)을 따라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약 1개월 간 청의 연경에 다녀왔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연경에서 청의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문을 모아 연행록 『유연고(遊燕藁)』를 남겼다. 더욱이 그가 머물었던 곳은 유리창(琉璃廠)이었다. 유리창은 청 전역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곳으로, 문방구·골동품·서적·서화 등을 파는 서점과 시장이 많았다. 그는 주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 문인들을 만나 시를 주고 받으며 교류하였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동국세시기』를 쓸 때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자유(李子有)의 서문이 1849년(헌종 15)에 쓰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동국세시기』의 저술 시기도 그 무렵으로 여겨진다. 연행에서 돌아온 지 한참 뒤의 저술이지만, 홍석모는 조선 풍속을 서술하면서도 중국 풍속과의 관련성을 항상 고려하였다. 그는 연행을 통해 외국의 풍물을 접했고, 이를 통해 자국의 풍속을 국제적인 시각으로 객관화하여 설명할 수 있었다. 한편, 『유연고』에서 “소중화(小中華)인 조선이 중화의 제도를 얻었으니 우리들은 본래 그대와 같은 사람”이라고 서술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 홍석모가 같은 중화문화를 구비한 조선과 중국의 동질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4 『동국세시기』의 구성과 내용

『동국세시기』는 이미 편찬된 『경도잡지』, 『열양세시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예기(禮記)』 월령(月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등을 망라하여 세시풍속을 정리하였다. 정월부터 12월까지 1년 간의 행사와 풍속을 23항목으로 분류해 서술하였고, 어느 날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은 그 달 안의 끝에 별도로 설명했다. 그리고 12월 다음에 윤달에 관계되는 풍속을 실었다.

몇 가지 주목되는 풍속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월은 설날이 있다. 삼정승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새해 문안을 올리고 정전 뜰로 가서 조하(朝賀)를 드렸다.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차례(茶禮)], 어린이들은 새 옷을 입으며[설빔[歲粧]], 어른들을 찾아 뵙고 절을 올리고[세배(歲拜)], 새해의 음식[세찬(歲饌)]과 술[세주(歲酒)]을 마셨다. 각 관청의 서리와 영문(營門)의 교졸(校卒)들은 종이를 접어 이름을 쓴 명함을 관원이나 선생의 집에 드렸다[세함(歲銜)]. 이외에도 많은 일들이 행해지는데, 일일이 거론하지는 않겠다.

입춘(立春)에는 대궐 안에 춘첩자(春帖子)를, 경·사대부와 민가 등에서는 춘련(春聯)을 붙였고[춘축(春祝)], 관상감에서는 붉은 글씨로 귀신을 물리치는 산사문(酸邪文)을 붙였다. 여기에는 정조 때 은중경(恩重經)을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 혹은 경기도의 양근, 지평, 포천 등과 함경도의 지역적 풍속이 서술되기도 했다.

3월에는 삼짇날(3일), 청명(淸明), 한식(寒食) 등이 있다. 삼짇날에는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해서 둥근 떡을 만들었고, 기름에 지져서 화전(花煎)을 부쳐 먹었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 국에 띄어 꿀을 섞고 잣을 곁들여 화면(火麵)을 먹었다. 이날부터 4월 8일까지는 여성들이 무당을 데리고 삼신당(三神堂) 등에 가서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청명에는 봄 밭갈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식에는 채마밭에 씨를 뿌리기 시작하고,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5월에는 단오(端午)가 있다. 속명(俗名)으로는 술의일(戌衣日)이라고 하는데, 술의는 우리말로 수레[車]이다. 수레바퀴 모양의 떡을 만들어 먹기에 수렛날이라 했다. 이날 궁중에서는 쑥으로 만든 호랑이 형상[애호(艾虎)]과 공조에서 바친 단오부채[端午扇]를 각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 관상감에서 만든 붉은 부적을 대궐의 문설주에 붙여 재액(災厄)을 막게 하고, 내의원에서는 일종의 청량음료인 제호탕(醍胡湯)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어린이들은 창포탕을 만들어 세수했고, 민가의 남녀들은 그네뛰기를 했으며[추천희(鞦韆戱)], 젊은 남자들은 남산의 예장동이나 북악산의 신무문 뒤에 모여서 각력(角力, 씨름)을 하며 승부를 겨루었다.

8월에는 추석(秋夕) 즉, 가배절(嘉俳節)이 있다. 신라 풍속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로 거론하고 있지만, 세부 설명은 설날, 대보름, 단오 등에 비해 매우 소략하다. 새 곡식으로 송편을 빚고 닭고기, 막걸리 등을 먹으며 실컷 놀았다. 제주(濟州) 풍속으로 남녀가 모여 편을 갈라 줄다리기 하는 풍속[조리희(照里戱)]도 기록되어 있다.

12월의 마지막 날에는 제석(除夕)이 있다. 이때에는 고위 관료들이 대궐에 들어가 지나간 한 해에 대해 문안을 드렸고, 민가에서는 친척 어른들을 찾아가 묵은 세배를 올렸다.[구세배(舊歲拜)]. 징과 북을 올려 역질 귀신을 쫓아내거나 폭죽을 터트려 귀신을 놀라게 했다. 집에서는 여러 곳에 등잔을 켜 놓고 밤새도록 자지 않았다[수세(守歲)].

윤달[閏月]에는 결혼하기도 좋고, 수의(壽衣)를 만드는 데도 좋은 달이다. 봉은사(奉恩寺)에서는 윤달이 들면 한양에 사는 여인들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불공을 드리고 돈을 탑(榻) 위에 놓는 풍습이 있었다.

한편, 월내(月內) 부분에는 각 월마다 어느 명절, 풍속으로 특정하기 어려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일례로 10월에는 그 달 1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내의원에서 우유를 만들어 바친다거나[조우유낙(造牛乳酪)], 서울 풍속에 숯불을 화로에 피워놓고 양념한 쇠고기를 구워 화롯가에서 먹는 모임[난로회(煖爐會)]을 열고, 메밀가루로 세모 모양의 변씨만두(邊氏饅頭)를 만들어 먹었다.

5 『동국세시기』의 특징과 가치

『동국세시기』는 조선 사회의 특징에 따른 풍속이 수록되어 있다. 우선 농본국가라는 특성상 그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농사와 관련된 습속을 월별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유교, 불교, 민간신앙 등을 바탕으로 조상과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복이 오기를 바랐다. 액막이는 주로 전염병과 관련된 것이 많고, 금기는 외출을 금지하거나 근신하는 사례가 많다. 액막이와 금기 모두 1월에 가장 많은 조항이 있는데, 이는 한 해의 시작을 신중하게 시작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는 건강과 부귀를 기원하는 내용이 많다.

『동국세시기』에는 계층별 세시풍속의 차이에 대해서도 서술되었다. 국왕, 관료, 사대부, 일반민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행해지던 습속을 구분해 놓았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지역에 따른 세시풍속 분류도 행해졌다. 한양에 집중되기는 했지만, 경주, 안동, 삼척, 춘천, 강릉, 보은, 고성, 제주 등지의 지방 풍속을 다양하게 수록하였다. 지방에서는 제주 풍속이 가장 많이 소개된 점이 주목된다. 섬이라는 특성상 다른 지역과 다른 특수한 습속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단옷날의 경우, 여러 지역의 풍속이 서술되어 있다. 김해에서는 아이들이 좌우로 편을 갈라 북을 치며 석전(石戰) 놀이를 했고, 금산에서는 직지사(直指寺)에 수백 수천 명씩 모여 씨름을 하였으며, 군위에서는 아전이 고을 사람들을 데리고 김유신(金庾信) 사당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이외에 『동국세시기』에는 당시 습속, 놀이문화, 생활방식, 생활용품 등을 알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이 있다. 특히, 음식 종류도 다양하게 확인된다. 음식은 크게 떡, 면, 채(菜), 술, 다과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떡의 경우에 송편[松餠], 시루떡[甑餠] 등 약 20여 종이 확인된다. 삼복더위에는 개장국[狗醬]을 먹기도 했다. 개를 삶아 파를 넣고 푹 끊이는데,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고 하였다. 면 중에서는 냉면(冷麪)도 있다. 11월의 음식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메밀국수를 무김치,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섞는다고 했다. 평안도냉면이 최고라는 필자의 견해도 주목된다. 이처럼 『동국세시기』는 옛 음식문화를 알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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