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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유교 윤리를 바로잡다

1617년(광해군 9)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대표 이미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내사본)

e뮤지엄(국립한글박물관)

1 개요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을 보급하고 그것을 통해 백성들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각종 행실도(行實圖)가 편찬되었다. 1434년(세종 16)에 집현전에서 『삼강행실도』가 편찬되었고, 성종대에는 언해본이 만들어졌다. 중종대에는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가 편찬되었다. 이때 『이륜행실도』는 기존에 삼강행실도 편찬, 증보 과정에서 다루지 않았던 붕우(朋友), 장유(長幼)의 윤리까지 다루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1617년(광해군 9)에 광해군이 주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간행하였다. 목판본으로 총 18권 18책의 방대한 분량이다. 이 책은 ‘동국’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로만 사례를 뽑아 수록하였다. ‘신속’이라는 명칭은 기존의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를 계승하는 한편, 기존과 다른 면모를 갖추었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수록된 효자, 충신, 열녀의 인원은 1,587명이다. 효자와 충신이 각 7백 명 정도이고, 충신은 상대적으로 적다. 또한 총인원 중에서 약 7백 명은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정문(旌門)을 받은 사람이고, 8백 명 정도는 임진왜란 이후 정문을 받은 이들이다. 이들 중 약 90% 이상이 조선시대 사람들이다. 부록에 수록된 사람들까지 감안하면, 책 전체 내용은 고대 삼국시대부터 조선 광해군 집권기까지의 기간을 아우른다.

2 임진왜란의 발생과 충신, 효자, 열녀의 포상

1592년(선조 25)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이어졌다. 오랜 전쟁은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가져왔고, 국가 기강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렸다. 충효 이데올로기가 근간이었던 나라에서 국왕의 피난 행렬을 뒤따랐던 신하가 얼마 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났다. 심지어 어가에 돌을 던지거나 피난 경로를 일본군에게 알려주는 백성까지 있었다.

국왕의 권위와 무너진 기강을 세울 방법이 필요했다. 국가에서는 성리학적 윤리를 더욱 강조하였다. 전쟁의 와중에도 삼강(三綱)의 윤리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백성들에게 표창을 내렸다. 신하가 국왕을 위해 죽은 경우, 자식이 부모를 위해 죽은 경우, 아내가 절개를 변치 않은 경우, 노비로서 의(義)를 지킨 경우에는 일일이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세금을 면제시켜 주었다. 수도 한양을 회복한 후에는 수도에서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을 정표(旌表)하기도 했다.

1595년(선조 28)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선조는 전란 중에 절개를 지켜 정표를 받은 사람들의 행적을 간행, 반포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는 충(忠), 효(孝), 열(烈)의 윤리를 실천하려다 죽음에 이른 사람들을 책에 수록하여 반포함으로써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발생한 데다가 충신, 효자, 열녀의 수가 증가하면서 검증 작업에 시일이 걸렸다. 예조에서는 장계(狀啓)와 첩보(牒報) 등의 문서가 방대하여 진위를 밝히기 위해 탐문이 필요하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조사에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대에는 자료를 수집과 분류하는 수준에 그쳤고, 결국 책의 간행은 이뤄지지 못했다.

3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간행과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광해군대에도 대대적인 정문(旌門)이 이루어졌다. 즉위 후 4∼5년 사이에 7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정문이 행해졌다. 『광해군일기』에는 정문이 규모에 비해 너무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져서 뭇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는 기록까지 있다. 물론 『광해군일기』가 인조 즉위 후에 편찬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실록의 저술 원칙이 사실 그대로를 쓰는 직서주의(直書主義)에 입각한다고 하지만, 인조반정 세력의 정치적 입장은 『광해군일기』의 내용에 비판적인 역사 인식을 담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과 간행은 1612년(광해군 4)부터 1617년(광해군 9)까지 약 4∼5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편찬은 1615년(광해군 7)에 완료되었지만, 간행에 많은 비용이 들어 각 도에서 분담하여 책을 만들어내느라 1617년(광해군 9)까지 소요되었다.

이 기간에는 계축옥사(癸丑獄事),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폐모론에 대해서는 효와 충의 이분법적인 논쟁까지 더해지면서 삼강 윤리에 대한 격론이 이어졌다. 자식이 어떻게 어머니를 처벌할 수 있는지 항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후가 반역을 꾀하면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반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광해군이 비용이 많이 드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 간행을 이뤄낸 데에는 국왕에 대한 충을 보다 강조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따라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은 국가적인 차원의 큰 규모로 행해졌다. 찬집청이 설치되고 의궤가 편찬되었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는 역대 행실도 중에서 유일하게 의궤가 남아있는 경우이다. 의궤에는 편찬 방식에 대한 논의나 찬집청의 관원, 사자관(寫字官), 화원(畵員) 등의 명단이 담겨져 있다.

책을 편찬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책임자는 기자헌(奇自獻),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이었고, 실무는 이성(李惺), 한찬남(韓纘男) 등이 맡았다. 특히, 의궤가 있었기 때문에 행실도의 핵심인 그림 제작에 김수운(金水雲), 이징(李澄) 등 당대 최고의 화원이 동원되었다는 것도 파악된다. 기존 연구에서 세종대 『삼강행실도』의 그림은 안견(安堅)이, 정조대 『오륜행실도』의 그림은 김홍도(金弘道)가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정확한 근거로 삼을 만한 기록이 없는 것과 비교된다.

4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내용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구성은 앞에 서문(序文), 전문(箋文)이 있고, 본문에서 효자, 충신, 열녀 총 1,586명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효자편 8권(제1권∼제8권) 8책, 충신편 1권(제9권) 1책, 열녀편 8권(제10권∼제17권) 8책, 부록 1권(제18권) 1책이다. 부록 1권은 이전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에 나온 우리나라 인물들을 뽑아서 재편집한 것이다.

효자편에서는 『삼강행실도』에서도 나타난 효와 충이 일치한다는 사상적 개념이 이어졌다. 전통적 유교사회에서는 예로부터 가정 내에서의 효도가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진다는 관념을 중시했는데, 이는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모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충신편에서는 전쟁 중에 외적에 맞서 싸우다가 죽임을 당한 사례가 가장 많다. 이외에도 망한 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키고, 반란에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며, 군주의 명령이 혹여 부당하더라도 명을 거스르지 않고 죽임을 당하는 등 충신의 사례가 수록되었다. 충신도는 분량 면에서는 효자도, 열녀도에 비해 매우 소략하다.

열녀편에는 대부분 전란의 와중에서도 정절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여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왜적의 겁탈에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겁탈을 우려하여 미리 자살을 택하는 경우이다. 이외에 자신을 구하려는 남성과 신체적 접촉을 할 수 없어 죽음을 선택하는 사례도 있다.

5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특징과 의미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이전 행실도의 편찬 전통을 계승하고 있고, 내용과 그림을 함께 배치하는 체제도 같다. 판화에 여러 장면이 함께 그려졌다는 것도 동일하다.

한편, 이전 행실도와는 다른 몇 가지 특징도 있다. 일단 서적을 간행하는 목적이 달랐다. 이전 행실도는 백성에 대한 교화를 목표로 했다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실추된 국왕 권위와 무너진 국가 기강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책 분량의 반 이상이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기록이다.

수록된 인원이 1,586명이나 된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세종대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330명의 5배에 달한다. 삼국시대부터 광해군대까지 다양한 지역, 신분의 사람들이 등재되었다. 출신 지역별로는 임진왜란 중에 피해가 극심했던 경상, 전라, 충청도, 한성부, 경기, 강원도 등에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신분별로는 양반에서 천민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열녀도에 실린 여성의 수가 많기 때문이지만 책의 전체 수록 인물의 남녀 성비도 비슷하다.

『삼강행실도』의 내용은 우리나라보다 중국 고대 이래의 충신, 효자, 열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다듬어져 온 반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임진왜란 무렵 십여 년 간의 사례들을 단기간에 모은 것이기 때문에 각 인물의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단선적이고 짧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목판화는 약간 세련되지 못하지만, 일부 그림에서는 신체의 훼손 상태를 적나라하게 그림으로써 순절인의 정신을 강렬하게 전달하려 했다. 또한 효자도의 경우는 산수 배경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여묘살이를 하는 장면에서 산이 표현되어 있다. 일례로 ‘득온여묘(得溫廬墓)’에서는 산에 여막을 설치해두고 제례를 지내는 주인공이 절하고 있고, 그 앞에서 정려문이 표현되어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당대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대목도 많다. 전쟁 중에 백성들이 겪었던 비극과 상처들, 정문 조치와 서적 편찬을 통해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위정자들, 국가의 기강과 윤리를 바로잡으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치열한 정쟁의 논리들, 여성들의 정절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강박적인 모습을 보이는 남성들, 충·효·열의 가치에 대한 당대의 논리적 충돌 등 다양한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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