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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東國正韻]

우리나라의 바른 한자음을 정하다

1448년(세종 30)

동국정운 대표 이미지

동국정운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동국정운(東國正韻)』은 1448년(세종 30)에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등이 간행한 운서(韻書)이다. 책 제목이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인 것처럼, 조선의 표준 한자음을 제정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물론 이러한 『동국정운』 편찬은 1443년(세종 25)에 한글이 창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즉, 『훈민정음』이 있었기에 한자음을 표음할 수 있었다.

현재 『동국정운』은 두 개의 판본이 전해진다. 간송미술관 소장본(국보 제71호)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권1, 권6이고, 건국대학교 소장본(국보 제142호)은 1972년에 강릉에서 중종 때의 문신인 심언광(沈彦光)의 수택본(手澤本, 곁에 두고 자주 이용하여 손때가 묻은 책)으로 전해오던 6권 6책의 완질이다.

2 운서(韻書)란 무엇인가

『동국정운』은 운서이다. 신숙주는 『동국정운』 서문에서 성리학 연구에는 한자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한자 뜻을 알기 위해서는 음운[聲韻]부터 알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학문의 기초로서 음운의 중요성을 피력한 것이다. 그 결과 세종대에 『동국정운』을 비롯하여 『사성통고(四聲通攷)』,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등의 운서 편찬이 행해졌다. 세 운서 모두 『훈민정음』 창제 직후 편찬 작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운서들은 중국에서 편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중국의 한족(漢族)은 예로부터 하나의 자음(子音, 한어(漢語)를 기록한 한자의 음)을 어두 자음[성모(聲母)]과 운(韻)으로 나누는 반절법(反切法, 두 자음을 이용하여 하나의 자음을 나타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한족이 이런 방식을 쓰게 된 것은 한시(漢詩)를 지을 때의 규칙인 압운(押韻)과도 관련이 있었다. 압운은 시를 지을 때 운을 맞추는 규칙이다. 완전히 똑같은 운을 가진 자음끼리 꼭 맞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같은 운끼리 맞춰서 시를 지었다.

중국에서는 수많은 운서들이 발간되었다. 일반적으로 운서를 편찬할 때에는 우선 모든 한자들은 사성(四聲, 평성(平聲)·상성(上聲)·거성(去聲)·입성(入聲))을 구분해서 나눈다. 그리고 같은 성조(聲調)를 가진 한자들은 다시 운이 같은 한자들끼리 모은 다음에 또 다시 성모(聲母, 한어(漢語)의 음절 첫머리에 나타나는 자음)가 같은 한자들끼리 모은다. 사성별·운별·성모별로 한자들을 배열하는 것이다.

한편, 조선은 중국과의 오랜 교류에서 한자로 소통해 왔다. 한자를 이용한 향찰(鄕札), 이두(吏讀) 등의 차자문자(借字文字)를 활용하였고, 한자의 정확한 뜻과 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중국 운서들이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지식인층에서는 중국 음운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게다가 과거에서 시부(詩賦)를 시험하게 되면서 압운을 해야만 하는 지식인층에게 운서는 필수가 되었다.

조선 건국 무렵에는 명의 『홍무정운』이 수입되었다. 1375년(홍무 7) 명의 홍무제가 몽골과 같은 북방 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당대의 한자 발음을 수정하여 표준 발음을 만든 것이다. 이 『홍무정운』은 조선의 『동국정운』의 책명, 체제, 구성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3 세종대 언어 연구

1443년(세종 25) 한글이 창제되었다. 세종은 일반 백성도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을 우선적으로 밝혔다. 백성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단을 갖게 해주겠다는 배려였고, 유교적 강상 윤리를 알려 교화하겠다는 통치 방식의 일환이었다.

한글을 활용한 문헌 편찬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444년(세종 26)에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하도록 명하였다. 1445년(세종 27)에는 악장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447년(세종 29)에 『동국정운』,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등이 연이어 완성되었다. 또한 세종은 『홍무정운』도 한글로 번역하라는 명을 내렸고, 1455년(단종 3)에 『홍무정운역훈』을 완성하였다.

한글을 사용한 편찬 사업은 국가 운영 전반에 걸쳐 있다. 일단 『용비어천가』를 통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려 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척불’을 표방했음에도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통해 불교의 권위에 기대어 왕실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을 총동원하다시피 해서 중국 한자의 우리말 표기를 일원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엄밀히 당시의 가장 중요한 언어는 한자였다. 그런데 조선 건국 이후 실제 사용되는 한자음과 외래어로서의 한자음은 상당한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표준 한자음을 만드는 다양한 편찬 작업이 행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국정운』 간행과 함께 『고금운회거요』, 『홍무정운』의 번역 작업, 『사성통고』의 재정리 등이 행해졌다. 특히, 『동국정운』은 중국의 운서를 번역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훈민정음』을 활용하여 한자의 우리말 음운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4 동국정운의 구성과 내용

『동국정운』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成三問), 박팽년, 이개(李塏), 강희안(姜希顔), 이현로(李賢老), 조변안(曺變安), 김증(金曾) 등의 집현전·승문원 관리들이 민간의 관습과 각종 문적을 상고하여 편찬하였다. 권1에는 첫머리에 신숙주가 지은 서문[序]과 목록이 있고, 권1부터 권6까지 본문이 구성되어 있다. 우선 서문에는 『동국정운』 편찬의 기본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민간에 쓰이는 관습을 채택하고, 오랜 서적들을 상고하며, 한 글자가 여러 음으로 쓰일 때에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을 택하고, 예전부터 전해 오는 협운(協韻, 본래 같은 운에 속하지 않는 글자를 동일한 운으로 사용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 아래 『동국정운』은 중국식 반절법 대신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음을 표시하였다. 운목(韻目, 압운이 허용되는 운에 속하는 한자들을 하나로 묶어 배열한 목록)을 표시한 뒤에 행을 바꾸어 자모(字母)를 음각(陰刻)으로 표기하였고, 각 자모 아래에는 그에 속하는 한자들을 배열해 놓았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한글에 평성·상성·거성·입성의 성조 표기를 하였는데, 그 표기 방법은 글자의 왼쪽에 둥근 점으로 표기하였다. 이에 『동국정운』에서도 평성·상성·거성·입성의 순서로 자모에 맞는 한자들을 배열하였던 것이다. 91운목(평성 26운목, 상성 25운목, 거성 25운목, 입성 15운목)으로 분운(分韻)하였으며, 18,775개의 글자(중복을 제외하면 14,243자)를 수록하였다.

5 동국정운의 보급과 활용

1448년(세종 30)에는 『동국정운』을 각 도와 성균관·사부학당에 내려 익히게 하되, 오랫동안 민간에서 사용되어 오던 운(韻)에 익숙한 사람들을 억지로 고치게 하지 말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배우게 하라고 하교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진사시(進士試)의 응시자들에게 『동국정운』을 활용하여 압운(押韻)하도록 하였으며, 1460년(세조 6)에는 문과 초장에서 『동국정운』을 『훈민정음』, 『홍무정운』과 함께 시험하도록 하였다. 1481년(성종 12)에는 『동국정운』의 음을 교정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시행 여부는 알 수 없다.

명종 때에는 『동국정운』 강학이 오랫동안 폐지되었으니 다시 경연·성균관·사부학당 등에서 읽게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국정운』은 당시 실제 쓰이던 음운과 동떨어졌다는 평가가 있다. 이에 『동국정운』은 불경 원전을 한글로 번역한 불경언해(佛經諺解) 등에서 발음을 표기하는 것으로 사용되다가 16세기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6 동국정운의 역사적 의의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하는 방식과 체계를 담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동국정운』을 통해 표준 한자음을 제정하였다는 것은 중국 한자어와 조선의 언어에 대해 상당한 연구가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국정운』은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그리고 각 자모의 음가 연구에 있어서도 주요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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