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동국통감

동국통감[東國通鑑]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 통사

1485년(성종 16)

동국통감 대표 이미지

동국통감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동국통감』은 1485년(성종 16)에 편찬된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官撰) 통사(通史)이다. 서거정(徐居正), 이극돈(李克墩), 표연말(表沿沫), 최부(崔溥) 등이 총 56권 28책에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수록하였다. 체재는 편년체이지만, 강목법(綱目法)도 따른다.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인 통사를 편찬하는 작업은 조선 태종대부터 시도되었다. 권근(權近)이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를 정리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저술하였고, 세종은 권제(權踶) 등에게 명해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노래 형식으로 엮은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를 편찬하였다. 다만 『동국사략』은 권근 개인이 쓴 사서로 고려의 역사가 포함되지 않았고, 『동국세년가』는 악장(樂章) 형태의 사서이다.

한편, 『동국통감』은 여러 편수관의 노력으로 조선 건국 이전까지의 역사를 모두 집약하였다. 몇 차례 편찬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세조의 명으로 편찬되기 시작해서 약 30년이 걸려 성종대에 완성하였다. 세조의 훈구 공신 세력이 주도한 편찬 작업이 성종대 사림이 주도하는 형태로 연결되면서 훈구와 사림의 합작품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2 조선 성종, 그는 왜 성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나

일반적으로 조선 성종대에는 국가의 문물과 제도가 완성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대에도 그런 인식이 있었고, 이는 그가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성종이 정비했다는 문물과 제도는 각종 문헌으로 증명이 되는데, 역사 분야의 증거가 바로 『동국통감』이다. 조선 건국 이후 정부 차원에서 각종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세종은 우리나라의 역대 사적 중에서 정치적 귀감이 될 만한 사실을 간추려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완성하였고, 문종은 전 왕조 고려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했다. 세조는 『동국통감』의 제작을 명했고, 그 작업은 성종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성종대에는 『동국통감』 외에도 역시 세조대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마무리했고, 『세종실록』 지리지의 작업을 바탕으로 하여 전국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했으며, 역대 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완성하였다. 또한 국가의례를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완성도 이 시기였다. 조선 건국 이후부터 행해진 각종 편찬 작업이 성종대에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3 『동국통감』의 편찬 과정

『동국통감』의 편찬은 1458년(세조 4)부터 시작되었다. 세조는 우리나라에 통사(通史)가 없기 때문에 삼국과 고려 역사를 합해 편년체 역사서를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편찬 작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국왕과 사관들은 편찬 방향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달랐다. 세조는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역사를 서술하려 했던 반면, 사관은 성리학적 명분론이나 정통론을 강화하는 입장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1466년(세조 12) 참여 인력을 늘리며 본격적인 편찬작업이 시작되는 듯 했지만,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발생하고 1468년(세조 14)에는 세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국통감』의 편찬은 중단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에도 『동국통감』을 편찬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한 달 뒤에 예종이 승하하면서 시작하지도 못했다.

본격적인 편찬 작업은 성종대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1476년(성종 7) 고대사 부분만을 편년체의 『삼국사절요』로 간행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서거정이 『동국통감』 편찬을 재개하자고 제안한 것은 1483년(성종 14) 경연 자리에서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484년(성종 15)에 『동국통감』이 완성되었는데, 이듬해인 1485년(성종 16)에 편찬자들의 사론(史論)을 추가해서 56권의 『동국통감』을 마무리했다.

4 『동국통감』의 구성과 내용

『동국통감』은 앞부분에 서거정 등의 「진동국통감전(進東國通鑑箋)」, 이극돈의 「동국통감서(東國通鑑序)」, 서술 원칙을 실은 범례와 목차에 해당하는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전체 구성은 「외기(外紀)」, 「삼국기(三國紀)」, 「신라기(新羅紀)」, 「고려기(高麗紀)」로 이루어졌다.

우선 「외기」에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사군(四郡), 이부(二府, 平州都督府·東府都督府)), 삼한(三韓)이 포함되었다. 자료 부족으로 간략한 편이지만, 고려 후기부터 나타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단군조선부터 삼한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삼국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역사를 대등하게 서술했다. 기존 『삼국사기』, 『동국사략』이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삼국사를 기술한 반면, 『동국통감』은 범례에서 어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내세우지 않겠다는 점을 밝혀두었다.

「신라기」는 통일신라의 역사이다. 『삼국사절요』에서는 「삼국기」 안에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포괄했던 반면, 『동국통감』은 통일신라를 분리하여 「신라기」를 구성하였다. 통일신라를 별도의 ‘기(紀)’로 분류한 것에 대해 지금의 역사가들은 다양한 평가를 내린다. 『동국통감』의 찬자들이 삼국을 대등하게 서술하겠다는 점을 밝혀두었음에도 은연중에 신라가 통일의 주역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후대의 평가가 있다. 또한 기존 사서에서는 삼국 중에서 신라가 맨 마지막까지 존속한 나라라는 점을 통해 신라를 부각했다면, 『동국통감』에서는 공식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려기」는 고려 역사인데, 『고려사절요』의 체재와 내용을 따르고 있다. 『동국통감』의 57권 중 「고려기」가 44권에 달한다. 한편, 「고려기」의 시작은 936년(태조 19)으로, 그 이전은 「신라기」에 서술되어 있다. 이는 918년(태조 1)의 고려 건국을 중요하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5 『동국통감』의 특징

『동국통감』은 기본적으로 『삼국사절요』, 『고려사절요』를 기반으로 하여 편찬 체계를 잡고 일부 번잡한 내용을 삭제하였다. 또한 기존 『삼국사기』나 『삼국사절요』의 오류를 수정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기존의 『삼국사절요』, 『고려사절요』와 세세한 차이는 많지만, 완전히 다른 내용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존 사서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는 과정에서 편찬자들의 역사관이 개입했고, 이것이 『동국통감』의 여러 특징적인 면으로 드러났다. 이는 성종대 사림의 등장 이후 역사인식의 변화로 파악하기도 한다. 몇 가지만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고사 서술에 있어서의 일부 차이가 나타난다. 외기의 기사는 중국측의 사서를 통해 대폭 보완하였다. 『동국통감』은 상대적으로 기자조선에 대한 내용이 풍부하다. 중국의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에서 자료를 뽑아 기자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는 사군, 삼한 등의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다.

둘째, 삼국시대 이후의 기사는 『삼국사절요』, 『고려사절요』의 내용보다 삭제된 것이 많다. 각종 천재지변이나, 불교 행사, 외교 사절, 외국인의 귀화[來投], 각종 제도 설명 등이 대폭 삭제되었다. 심지어 고려 공양왕 때 시행된 과전법 제정에 대해서도 생략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기록된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셋째, 신라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등을 ‘여왕’이 아닌 ‘여주(女主)’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절요』에서 왕으로 기록한 것과 다른 인식이다.

넷째, 고려 후기 정몽주를 비롯한 충의지사(忠義之士)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절의론에 대한 관심이 커졌음을 보여준다. 이미 정몽주의 절의는 그를 죽인 태종에 의해 부각된 바 있었다. 그런데 사서에서도 절의론을 강조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6 『동국통감』의 사료적 가치

앞서 서술했듯이 『동국통감』은 단군 이래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외기」, 「삼국기」, 「신라기」, 「고려기」로 체계화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 사서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등의 기존 사서는 대부분 단대사였는데, 『동국통감』은 우리나라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엮었다.

『동국통감』 이후에는 정부 주도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사업이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동국통감』은 이후의 학자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읽힌 통사가 되었다. 16세기 이후에 개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찬(私撰) 사서들은 대부분 『동국통감』을 대본으로 하여 저술되었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