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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안평대군의 꿈이 안견의 화폭에 담기다

1447년(세종 29)

몽유도원도 대표 이미지

몽유도원도(복제품)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꿈 이야기를 안견(安堅)이 그린 그림이다. 꿈은 안평대군이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복사꽃밭[桃園]을 거닐었다는 내용이다. 그림에는 안평대군이 쓴 제서(題書)와 시 1수, 당대 명사 21명의 찬문(讚文)이 덧붙여 있다. 따라서 이러한 그림과 시문들을 아울러 〈몽유도원시축(夢遊桃園詩軸〉, 〈몽유도원시권(夢遊桃園詩卷)〉, 〈몽유도원도권축(夢遊桃園圖卷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 안평대군과 안견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1418년 세종의 즉위 직후에 태어났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종친의 일원이었지만, 왕자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다. 당대의 명사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최고 예술품들이 그의 사저에 수집되었다. 하지만 건국 초기 왕위 계승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여러 차례 있었다. 1453년(단종 1)에는 계유정난이 발생했고, 이때 안평대군은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안평대군은 각종 예술에 관심이 많을 뿐 아니라 시, 서, 화에 재능을 보였다. 『용재총화』에서는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당호)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에 유독 뛰어났다. 서법(書法)도 걸출하여 천하제일이 되었고, 그림과 음악도 잘 했다. … 당대의 이름난 유학자로서 그와 교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그의 다재다능한 실력과 폭넓은 인맥을 언급하였다. 특히 그의 서체는 원의 서예가 조맹부의 것을 따라 그 변화무쌍함이 신의 경지에 들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이외에도 안평대군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식견, 당대 문사와 예술인과 폭넓은 교유 등과 관련된 내용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는 그림과 글씨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신숙주(申叔舟)는 ‘비해당이 서화를 사랑하여 누군가 한 자의 편지나 한 조각의 그림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구입하여 그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여 표구를 만들어 수장하였다.’고 하였다. 그가 기록한 안평대군의 수집품은 총 222점이었다.

안평대군의 수집 목록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안견의 그림이었다. 조선 전기 화단에서 안견의 실력이 뛰어났던 데다 안평대군과 교유한 세월도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신분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었지만,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신분을 뛰어넘는 교감을 나눴다.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그림 그려 줄 것을 여러 차례 청했다. 그는 중국의 유명 산수도를 안견에게 그려달라고 하고, 거기에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곤 했다.

어느 하루는 세종이 양화진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둥하여 여러 사람들이 따라갔다. 그 날 저녁 안평대군은 성삼문(成三問), 임원준(任元濬)과 함께 술을 마시며 달구경을 했는데, 이때 세자(문종)가 보내온 귤 두 쟁반에는 시문이 쓰여 있었다. 안평대군은 그 날의 풍광을 시문으로 썼고, 안견에게는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의 시문과 그림을 본 서거정(徐居正) 등이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만약 이것이 남아있다면, 아마도 〈몽유도원도〉와 같은 걸작으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안평대군과 안견은 기록상 많은 작품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실물이 전해지는 것은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 안견의 경우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등의 몇 작품이 있지만, 안견이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3 안평대군의 꿈, 도원을 희망하다

1447년(세종 29) 4월 20일, 안평대군은 밤에 깊이 잠이 들면서 꿈을 꾸었다. 꿈은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어느 산 아래를 걷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러다가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어느 쪽으로 갈지 몰라 머뭇거리던 터에 한 사람이 나타나 길을 알려주었고, 그곳을 따라 계속 가다 보니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을 지나자 그들에게는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도원이 나타났다. 꽃향기에 취해 이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때, 그들 곁에 최항(崔恒)과 신숙주가 와 있었다. 네 사람은 함께 도원의 풍광을 즐겼고, 그러다가 잠에서 깼다.

안평대군에게 도원은 매우 긍정적인 메시지였다. 그의 꿈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에 나오는 내용, 즉 무릉 지방의 어부가 계곡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별천지 ‘도화동(桃花洞)’을 천 년 만에 찾아 유람하였다는 이야기와 관련되기도 한다. 경전과 역사서에 기록된 고사(故事)에서 이상적인 삶을 찾았던 당대 지식인들에게 도원을 꾼 꿈 이야기는 매우 신비롭게 여겨졌던 듯하다. 안평대군은 사저인 수성궁으로 안견을 불러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리도록 하였고, 자신은 기문(記文)을 작성하였다.

4 안견, 안평대군의 꿈을 그리다

안견은 3일 후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왔다. 산수화였다. 조선 전기 그림은 주로 산수화였고,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아주 작게 등장한다. 화폭의 주인공은 주로 자연이었다. 〈몽유도원도〉에는 사람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안평대군은 하나하나 설명한 풍경 그대로가 비단 화폭에 살아있다고 평하였다.

물론 그림에 대한 평가는 정답이 없다. 사람마다 그림이 달라 보일 수 있고, 한 사람이 보더라도 시시각각 다른 감상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도 〈몽유도원도〉는 찬문이 여러 편 있으니, 그 내용을 화폭의 그림을 관련지어 살펴보자. 꿈은 반대라는 말이 있다. 〈몽유도원도〉를 볼 때는 화폭의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천천히 보아야 한다. 꿈 이야기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레 전개된다. 시작점인 왼쪽에는 산 아래의 풍경이 펼쳐져 있고, 가운데에는 계곡이 흐르며, 오른쪽에는 종착지인 도원이 묘사되어 있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도원이 화사하지만, 구름안개가 자욱하여 신비로운 느낌이 있다. 오른쪽 위에는 비탈에 집들이 있고, 그 뒤로는 대나무 숲이 있다.

〈몽유도원도〉의 원근은 삼원법을 활용하였다. 일단 화폭을 왼쪽, 중간, 오른쪽으로 나눠 보자. 왼쪽에는 눈높이를 화폭의 중앙에 두고 자연스럽게 앞을 바라보는 구도인 평원법이, 중간에는 아래쪽에서 계곡과 절벽을 위로 올려다보는 고원법이 쓰였다. 그리고 도원이 펼쳐진 오른쪽에는 위에서 아래로 도원의 화사함을 내려다보는 심원법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그림 속 산수는 매우 입체적이다. 더욱이 붓의 필체는 흔적 없이 번지듯 스며들었고, 농담을 조절하여 그린 기암절벽은 깎아지른 듯 솟아있다.

5 박팽년과 그의 동료들, 몽유도원도에 시문을 붙이다

꿈속에서 도원을 함께 거닐었던 박팽년은 〈몽유도원도〉의 서문을 작성했다. 서문을 보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에 상당히 매료되었던 듯하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 정도였다. 옛 중국 동진 시대의 무릉도원의 이야기가 안평대군의 꿈속에 나타난 것에 대해 매우 다행으로 여겼다.

뒤따라 합류했던 신숙주와 최항은 뒤에 붙은 제영(題詠, 정해진 제목에 따라 읊는 시)을 지었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정인지(鄭麟趾), 김종서(金宗瑞), 강석덕(姜碩德), 이개(李塏), 서거정, 성삼문, 하연(河演), 이현로(李賢老), 고득종(高得宗) 등 이른바 세종대의 유명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도원을 인간 세상과는 다른 곳, 신선이 노는 곳으로 인식하였다. 그림 속 도원 역시 매우 신비로웠다. 최항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데 따라 꿈과 더불어 경치로 변해가는 글과 그림이 모두 신묘하여 마음에 더욱 사무친다.”고 하였고, 고득종은 ’마치 신선에 사는 곳에 오른 듯하다.‘고 서술했다. 다음은 성삼문의 시문 중 일부이다. 그 역시 안평대군과 안견에 의해 제작된 〈몽유도원도〉에 경이로움을 드러냈다.

아침에 도원의 그림을 보고 / 朝見桃源圖
저녁에 도원의 기문을 보았네 / 暮見桃源記
고금에 도원이 있다는 말을 이제야 믿을 수 있겠으니 / 始信今古有桃源
신선에 관한 말 허탄한 것이 아니어라 / 神仙之說非誕僞

안평대군은 1450년(문종 즉위) 무렵 자신의 사저 부근인 백악산 서북쪽 계곡에서 꿈에서 본 도원과 비슷한 장소를 발견하고 거기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그러나 그 곳은 매서운 정치적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고, 결국 계유정난 이후 안평대군, 박팽년, 성삼문 등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림 속 도원의 꿈은 현실 속 정치적 갈등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은 사후에라도 꿈속의 도원을 찾아갔을까.

6 몽유도원도의 역사적 가치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 최고 수준의 시, 서, 화가 집약된 걸작으로 평가된다. 시문은 당대 지식인의 소양을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에 문학적 가치가 높고, 각자의 친필로 써져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가치가 크다. 그리고 안견의 그림은 후대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회화로서의 가치가 독보적이다.

특히, 〈몽유도원도〉의 그림은 기존 연구에서 북송대 이성과 곽희의 산수화풍(이곽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안견이 우리나라 회화의 전통을 반영하여 새롭게 재창조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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