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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조선 후기 종합 무예서

1790년(정조 14)

무예도보통지 대표 이미지

무예도보통지 표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1790년(정조 14) 정조(正祖)의 명으로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백동수(白東脩) 등이 편찬한 종합무예서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창, 검 등의 근거리 무기, 즉 단병(短兵) 전법 및 기술이 도입되어 발달하였으며, 이를 해설하는 무예서들이 편찬되었다. 『무예도보통지』는 이들을 집대성한 무예서로, 정조 대에 완성된 조선의 전법 체계를 구현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2 조선 전기의 전법

조선 전기 국경을 위협하는 세력은 북방의 여진족과 남방의 왜구였다. 특히 북방의 여진족과는 조선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으며, 이를 위해 조선 정부에서도 수차례 여진족 정벌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전기의 사군육진 개척과 이어진 사민정책(徙民政策) 또한 북방 여진족과의 갈등 속에서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한 전략 중 하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 여진족은 주적(主敵)이다시피 하였으므로, 조선의 전법 또한 여진의 기병에 대응하기 위한 방식으로 발달하였다.

여진족은 기병 위주로 구성되어 기동력이 뛰어났으므로, 병력의 집합 및 분산이 매우 신속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여진족은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키지 않고 소규모로 침입하여 약탈하고 신속히 퇴각하는 전법을 활용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 군대는 장병(長兵) 중심의 전법을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원거리 화포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이어 궁시(弓矢)와 기창(騎槍) 등의 장병(長兵) 무예를 활용하여 여진의 기병에 대응하였는데, 여진에는 화포 기술이 전해지지 않아 이러한 전법이 매우 유효하였다.

해안지방에 침입한 왜구 또한 여진족에 대응한 것과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해안에 출현한 왜구의 선박에 대해서는 먼저 화포로 공격하고 해안에 접근한 적들에 대해서는 궁시로 공격한 후, 최종적으로 상륙한 왜구들을 기병이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조선 전기 무과(武科) 과목에서는 기창 외에는 궁시를 사용한 기예만을 요구하였다.

3 임진왜란과 『무예제보』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상황은 돌변하였다. 장기간의 내전으로 조총을 위주로 한 집단 전법을 발전시킨 일본군 앞에서 장병 중심의 조선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패배하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단병(短兵)을 이용한 접근전에 강하고 화포와 같은 장거리 무기에서 열세였다. 그러나 조총을 대량으로 도입하고 이를 이용한 전술을 훈련하여 장병(長兵)에서의 열세를 만회하면서, 특기였던 접근전 또한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조총과 검술을 적절히 배합한 일본군의 전투 방식은, 여진족과 소규모 왜구를 상대로 한 장병 전술에 특화되어 있던 조선 군대에게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초반의 연전연패는 바로 전법과 무예에서 열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법에서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특히 평양성 전투에서 명군 남병(南兵)의 전법이 일본군을 상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남병(南兵)은 명나라 절강성에서 파견된 부대로 왜구와의 싸움에 익숙하였으며, 척계광(戚繼光)의 전법을 연마하여 일본군의 전법을 효과적으로 상대하였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이 전법이 일본군을 상대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점을 직시하고 명군으로부터 이 전법을 직접 전수 받았으며, 또한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진법(陣法)과 창검술을 익히는 것으로 훈련 방식을 바꾸었다.

『기효신서』 체계에 의한 전법 변화는 무과 과목에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기효신서』의 내용은 그림 중심으로 상당히 소략한 편이었기 때문에, 과거 응시자들이 새로운 무예를 익히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예서의 편찬이 필요하였다. 이에 편찬된 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서인 『무예제보(武藝諸譜)』이다. 1598년(선조 31) 한교(韓嶠)가 편찬한 『무예제보』는 임진왜란 이후 익힌 절강 전법의 정리 및 보급 노력의 일환으로, 당시 살수(殺手)들의 근접전에 필요한 단병 무예인 곤(梱), 패(牌), 선(筅), 장창(長槍), 파(鈀), 검(劍) 등 6기(技)를 정리한 것이다.

이후 단병 무예를 정착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어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단병 무예가 소개되었다. 이에 다시 한 번 무예서가 편찬되어 이들 무예를 정리하였으니, 바로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이다. 특히 『무예제보번역속집』은 기마병에 대항하기 위한 단병 무예인 언월도(偃月刀), 협도곤(夾刀棍), 구창(鉤槍) 등이 실려 있다. 이는 당시 실질적인 위협 세력으로 성장한 북방 여진족을 상대하기 위한 전법 개발에 힘쓰던 당시 상황과 연관된 것이다. 이 시기 편찬된 훈련 교재인 『연병지남(練兵指南)』에는 여진족 기마병을 상대하기 위한 전거병(戰車兵), 기병, 보병의 통합 운용 전법이 실려 있는데, 전반적으로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실린 무예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방 여진족이 흥기하는 상황에서 광해군이 다소 소극적인 전략을 취하자 단병 전술의 비중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여진족을 평야에서 맞아 싸우는 것보다는 성채를 쌓고 화포를 중심으로 성채를 지키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단병 무예보다는 다양한 화포의 제작이 중요해졌고, 특히 여진 철기병의 철갑을 뚫을 수 있는 조총의 수입과 보급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명군과 연합하여 여진족과 맞섰던 심하전투에서 여진 기병의 빠른 돌격을 포격의 재장전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여 참패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따라서 다시 한 번 근접전에서 유능한 살수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또한 화포의 느린 발사 속도를 보완하기 위해 궁시를 담당하는 사수 육성 또한 중시되었다. 이에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 체제가 자리 잡게 된다.

4 화기(火器)의 진보와 마상무예, 그리고 『무예도보통지』

조총 등의 화약무기는 궁시에 비해 발사 속도가 느리고 또한 비가 와서 화약이 젖거나 바람이 세서 화약이 날리면 장전할 수가 없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궁시가 계속 필요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 조총이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궁시를 담당하는 사수의 역할과 비중이 적어지기 시작하였다. 기계식 활인 궁노(弓弩)가 제작되어 실전에 배치되기 시작한 것도 사수의 비중이 적어지는 데에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화약 무기를 담당하는 포수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살수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대두되기 시작했다. 포수의 비중이 높아지면 포수를 엄호해 줄 수 있는 살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나, 당시 화포 개량 등에 심혈을 기울이는 와중에 살수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다시 한 번 살수의 중요성이 제기되고, 『무예제보』의 중간(重刊), 『무예신보(武藝神譜)』 편찬으로 이어졌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편찬을 주도한 『무예신보』는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무예제보의 6기(技)에 12기(技)를 더하여 곤(梱), 패(牌), 선(筅), 장창(長槍), 파(鈀), 검(劍),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권법(拳法), 편곤(鞭棍) 등 조선 특유의 18반 무예를 정립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의 18반 무예는 중국의 그것과는 달리 궁시가 제외된 채 철저히 단병 무예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당시의 전법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화포의 발달은 조선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보병 위주의 전법으로는 기동력이 떨어져 적의 포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따라서 숙종 대에는 기동력이 높은 기병부대의 필요성이 높아져 기병이 각 군영에 배치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기병들이 사용하는 단병 무예가 정리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785년(정조 9) 『병학통(兵學通)』 편찬은 바로 영조 연간 이후 실험을 거듭하던 기병 중심의 전법을 집대성한 성과이다. 또한 『병학통』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편찬된 무예서가 바로 『무예도보통지』이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영조 연간에 편찬된 『무예신보』에 실린 18기 외에 마상무예가 추가되어 총 24기의 무예가 실려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정조가 직접 지은 서문(序文)이 실려 있어, 당시 이 책의 편찬을 명하였던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정조는 먼저 궁시에만 집중되어 왔던 조선 전기의 훈련 방식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된 무예서의 편찬에 대해 서술하며, 『무예도보통지』가 이 무예서들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로 보아 『무예도보통지』를 조선 무예서들의 집대성으로 평가하고, 또 이 책에 실린 무예를 조선 무예의 완성판이라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어 정조는 전법과 개인 무예는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전법과 개인 무예는 서로 씨와 날을 이루어 상호보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간행으로 말미암아 각 군사들이 날랜 무사가 되어 국가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무예도보통지』와 같은 무예서를 발간하는 취지라며 끝을 맺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와 같은 무예서들은 당시의 전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뜻으로, 이로 볼 때 『무예도보통지』는 임진왜란 이후 끊임없이 실험과 개편을 거듭하다 정조대에 완성된 조선의 전법 체계가 구현된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5 『무예도보통지』의 체제

『무예도보통지』 권두에는 정조 자신이 쓴 서문이 실려 있다. 다음으로는 총목(總目)에 이어서 범례(凡例) 21조가 실려 있는데, 『무예도보통지』의 편차와 내용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이다. 병기총서(兵技總敍)에는 조선 초부터 『무예도보통지』에 이르기까지 정부 차원에서의 군제 개편, 전법과 무예 서적 간행 등의 사실을 대략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이덕무와 박제가가 조선 후기의 입장에서 전법 및 무예의 변화를 서술한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다음으로는 『기효신서』를 저술한 척계광과 『무비지(武備誌)』를 저술한 모원의(茅元儀)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어 기예질의(技藝質疑)는 한교(韓嶠)가 명의 허유격(許遊擊)에게 기예에 관해 질의하고 대답한 내용이다. 본 내용에 앞서 인용한 서목 145종의 서명과 저자명이 있는데, 조선의 무기와 무예가 어떻게 전래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본격적으로 무예의 내용을 살펴보면, 권1에 장창, 죽장창, 기창(旗槍), 당파(鎲鈀), 기창(騎槍), 낭선(狼筅) 등 여섯 가지, 권2에 쌍수도(雙手刀), 예도, 왜검 등 세 가지, 권3에 제독검, 본국검, 쌍검, 마상쌍검, 월도, 마상월도, 협도, 등패(藤牌) 등 여덟 가지, 권4에는 권법, 곤봉, 편곤, 마상편곤,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 등 여섯 가지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등패(藤牌)를 일반적으로 요도(腰刀)와 표창(鏢槍)으로 분리하여 총 24기의 기예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본다. 24기의 무예를 도식과 도보 등을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무기 또한 중국식과 아국식(我國式)을 분류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는 관복도설(冠服圖說)과 고이표(考異表)가 실려 있는데, 관복도설은 무기에 필요한 옷의 그림과 설명이며, 고이표는 각 군영별로 다른 기법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무예들이 단순히 개인적으로 익히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고 각 군영에서 실제로 전법과 연동되어 쓰이고 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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