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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현존하는 우리나라 전통시대 유일의 목탑

미상

법주사 팔상전 대표 이미지

법주사 팔상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법주사(法住寺)는 신라시대 창건된 이후 여러 번에 걸쳐 중창을 거듭하면서 법등(法燈)을 이어왔다. 특히 법주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들의 방화로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이후 17세기 전반기에 팔상전(捌相殿)과 대웅보전(大雄寶殿) 등이 차례로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목탑으로 법주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팔상전 내부 벽면에 석가모니의 일생을 8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팔상전은 1968년 해체 수리 시 출토된 금동탑지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왜군들의 방화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될 때 함께 불에 탔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1602년(선조 35) 10월 중창을 시작하여 1605년(선조 38) 3월 상고주(上高柱)가 입주(立柱)되었고, 상량문에 의하면 1626년(인조 4) 6월 상량(上樑)하였다고 한다.

법주사 팔상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전통시대 목탑 중 남아있는 유일한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 법주사 팔상전의 구조와 건축적 특징

법주사 팔상전은 평면 4각형의 5층 목탑이다. 기단부는 석조로 구성되었으며 탑신은 5층의 목조 부재를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상륜부는 철제로 제작되었다. 기단부 사방에는 계단을 마련하여 어느 방향에서나 탑 내부로 들어가기 용이하게 만들어졌다. 탑신부의 1층과 2층의 주간거리는 5칸이며 3층과 4층의 주간거리는 3칸, 5층은 2칸으로 구성되어 있어 상층으로 올라가며 주간거리가 체감되었다. 건물 내부는 사방이 통하도록 했으며 건물 중앙에는 가장 높은 기둥인 심주가 1층부터 5층까지 관통하고 있다. 심주를 둘러싼 사방에는 사천주라 불리는 네 개의 기둥이 가운데 기둥인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에 세워졌으며 심주와 결합되어 있다. 사천주는 1층부터 4층까지 세워져 있다. 심주 아래에는 심주를 받치는 주춧돌인 심초석이 있으며 심초석 윗부분에 구멍을 파서 사리장치를 보관하는 사리공을 만들었다. 사리공은 벽돌로 덮여있었고 그 안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었다. 각 층의 양식과 목재를 결합한 수법이 조금씩 다른데, 1층에서 4층까지는 지붕을 떠받치기 위한 처마부의 공포가 기둥위에만 마련된 주심포식이고, 최상층인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며 지붕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도록 했다.

팔상전은 바닥면이 넓고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체감 비율이 큰 입면형식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목조탑의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구조적 측면에서 고층탑에서 문제시 되는 수평외력에 대한 장인들의 합리적 대응으로 해석되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의 체감 비율은 시각적 안정감을 주어 친밀한 인간적인 척도(human scale)를 부여하기 위한 구조적 개념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팔상전 기단 상면을 덮는 평평한 판석인 상대갑석 위에는 1층 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기단 위에 기둥을 설치하는 방법은 기단 안쪽에 초석을 설치한 후 기둥을 초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팔상전 기단 위에는 1층 기둥이 바로 올려져 있어 기단 안으로 설치되어야 할 기둥이 잘못 처리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은 오히려 하부구조에 충분한 구조적 안정을 이룰 수 있는 시공기법이고 역학적으로도 기단을 안정시킬 수 있는 기법이라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팔상전은 일반적인 중층형 건물이 아니라 목탑이기에 평면형태가 정사각형이다. 이러한 이유로 목탑 지붕의 4면 모두 처마곡선을 잡기 유리하며 현재 팔상전 지붕 처마는 풍만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팔상전의 전체적 형태는 안정적인 체감비를 보여주며 동시에 처마에서 부드러운 곡선미를 성공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팔상전의 내부는 심주를 기준으로 하여 사천주가 에워쌌으며 사천주 사이는 벽체를 형성한 후 각 벽체마다 2개씩의 팔상도를 걸어놓았다. 사천주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벽체는 구조적인 중심이 되며 동시에 종교적인 중심 벽면이 된다. 또한 벽체 주변에는 불단이 설치되어 있다.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는 동에서부터 남·서·북으로 돌아가며 그려져 있다. 이것은 종교적 의미를 나타냄과 동시에 탑 내부의 퇴랑에서 탑돌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팔상전은 한국 장인들의 목조탑 건축기술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구조적 형식과 미학적 특징의 본질을 살펴보면 놀라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팔상전 구조형식의 근본은 사천주와 귀틀로 짜여 진 팔상전 중심에 있는 사각틀이 수직과 수평의 힘을 받치며 동시에 탑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주는 데 있다. 팔성전의 5층에서는 수평력에 대한 보강구조로 귀틀이 적용되어 있고 하부층에는 수평력에 대한 보강과 함께 안정적 입면을 고려한 목조 중층건물 가구기법이 적용되었다. 즉, 팔상전은 고탑에서 문제시되는 횡압에 대한 취약함을 해결할 수 있는 구조적 성능과 함께 안정적인 입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팔상전 가구의 평면 및 입면은 전후 및 좌우로 대칭을 이루어 구조적인 균형과 안정적인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팔상전 각부 및 전체 가구의 구조형식에는 불필요하게 첨가된 부분이 없으며 탑 본래의 구성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탑의 기본개념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구조적으로 발전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장인들은 구조역학적 공식이나 수식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역학적 개념을 직관적으로 터득하여 중력과 자연의 구조적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법주사 팔상전은 고층목조건물로서의 구조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함과 동시에 종교적 상징성과 건축 용도에 부합하는 기능적 측면을 유기적으로 융합시킨 목탑이다. 팔상전은 한국 고건축 중에서 합리적 구조와 종교적인 기능, 친근한 외관미를 합치시켜 이들을 가장 훌륭하게 처리한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3 법주사 팔상전의 재건 과정

승병의 주요 거점이었던 법주사는 1597년 정유재란 중에 왜군의 계획적인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승병대장이었던 사명당 유정이 중창을 주도하였고 이 사리장엄구의 봉안에 관여한 듯하다. 1602년 팔상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1605년 심주를 세웠다. 1618년(광해군 10)에는 대웅보전을 재건하였다. 1626년에는 팔상전의 2차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상량하였으며 1630년(인조 8)에는 대웅보전의 삼신불상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재건사업은 지속적으로 왕실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더불어 왕실의 원찰로서 기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법주사 팔상전에 대한 기록은 1968년의 해체·수리 공사 때 발견되었다. 팔상전에 대한 기록은 심초석 사리공안에 봉안되었던 금동탑지이며 다른 하나는 5층 동면과 서면 목재에 적혀있던 묵서명이다. 이 가운데 금동탑지는 1597년 정유왜란 당시 왜구들에 법주사 건물이 소실된 것을 밝히고 있으며 팔상전을 1602년부터 1605년까지 재건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금동탑지의 기록은 팔상전 공사의 주관을 조선국승대장 유정(朝鮮國僧大將 裕淨)이 맡았음을 밝히고 있는데 조선국승대장이라는 직위를 보았을 때 탑지에 적힌 유정(裕淨)은 사명당 유정(推政)과 동일인물로 볼 수 있다.

금동탑지의 글을 판독한 결과, 그 기록 순서는 남판 내면,남판 외면, 서판 내면, 서판 외면, 동판 내면, 동판 외면, 북판 외면, 천개판 외면 순으로 전개된다. 탑지에 기록된 팔상전 재건 공사 참여자는 총 114명으로 이 가운데 승려가 88명, 속인이 26명이다. 먼저 탑지의 기록에 따라 속인의 역할은 시주 및 화주자로서 팔상전의 사리장엄구 및 고주(高柱)와 기타 재목 등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를 책임지고 공급하였다. 이들 재건 공사 참여자 명단 앞에는 아무런 관직명이 없어 왕실이나 관청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민간의 재력으로 목탑 재건이 추진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리합을 싸고 있던 8겹 비단 보자기에 적힌 묵서의 내용이 기사생(己巳生) 시주(施主) 최 씨가 병자년에 태어난 왕손의 앞날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발원문으로 판독되었으므로 왕실과의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단보자기에 묵으로 적힌 왕손과 최 씨가 누구인지 짐작할 만한 충분한 근거 자료는 아직 없지만, 병자년은 1576년(선조 9)으로 추정되며 선조 8년, 즉 1575년 4월 26일이 광해군(光海君)의 출생일임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왕손’은 임진왜란 당시 큰 역할을 담당했던 광해군일 가능성도 있다.

1605년에 팔상전의 재건을 이끈 승려들은 화엄사(華嚴寺)·해인사(海印寺)·완주 송광사(松廣寺) 등의 재건 공사에도 참여한 승려가 다수 확인된다. 이는 법주사와 이들 사원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고주를 세운 지 21년 만인 1626년에 팔상전을 다시 수리한 묵서명이 5층 동면과 서면의 목조 부재에서 확인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기술적 문제를 승장(僧匠)이 해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목(大木)을 비롯한 목수 전원이 승려이고, 석수 1인만 속인이었다. 5층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화승(書僧)이나 조각승(彫刻僧)은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626년 진행된 주요 공사가 사리장엄구를 탑 심초석 안에 봉안하고 그 위에 찰주를 세워 건물을 짓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나 불화의 조성 및 단청 채색은 그 후에 진행되었을 것이다.

4 법주사 팔상전 출토 사리장엄구와 팔상도

법주사 팔상전 사리장엄구는 1968년 9월 21일 해체수리 과정에서 심초석 상면의 사리공 내부에 봉안된 것이 발견되었다. 현재 이 사리장엄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법주사 팔상전 사리장엄구를 수습할 당시 사리공 상단에는 가로·세로 각각 23.3cm, 두께 4.6cm의 방형 전이 덮여 있었고, 방현전을 들어내자 사리함을 안치하기 위한 22.66cm 깊이의 사리공이 노출되었다. 사리공 내부에는 다섯 장의 금동탑지와 함께 사리장엄구가 봉안되어 있었다.

법주사 팔상전 사리장엄구는 유리사리병 파편이 들어있는 청동사리합과 여덟 겹의 비단보자기에 싸여 있던 대리석제 사리외합, 연화타출문이 새겨진 금동재질의 환형 장식품, 은제사리호, 수정보주 1점, 금구(金具)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밖에 금동탑지 다섯 매도 함께 출토되어 팔상전의 재건과정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팔상전 내에 봉안된 팔상도는 팔상전 내부 중앙에 있는 사천주 사이를 판으로 막아 사방에 벽을 만든 후 각 면에 두 폭식 걸었다. 팔상도 앞에는 불단을 조성한 후 각 불단마다 한 구의 불상을 봉안하였다. 팔상도와 불상의 배열은 모두 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서·북의 시계방향으로 이루어져 북쪽에 열반상이 위치한다.

팔상전에 걸려 있는 팔상도는 19세기 말에 새롭게 제작된 것이다. 당시 주지로 있던 탄응(坦應) 비구의 주도하에 1897년 당시에 유명한 화승이었던 금호당 약효(若效, 1846~1928), 영운당 봉수(奉秀, 1868~1900 활동) 등이 참여하여 제작한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불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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