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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民畵]

서민에게 확산된 그림 문화

미상

민화 대표 이미지

까치호랑이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민화는 주로 조선시대 무명 화가들이 정통 회화를 모방하여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 대체로 전문적인 회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유로운 기법으로 그렸다. 그리하여 민화가 문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해학적으로 재치 있게 표현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민화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으며, 생활공간을 치장하거나 기복 혹은 액막이를 하는 등의 용도로 활용되었다.

2 민화란 무엇인가

조선시대에는 민화를 ‘속화(俗畫)’라고 불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따르면, 민간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속화로 일컬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민간의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그림은 신분제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민화의 수요는 급증하였다. ‘속화’라고 해서 민간에서만 유행했던 것은 아니고, 왕실, 관청, 사찰, 신당에 이르는 다양한 곳에서 민화를 향유하였다.

‘민화(民畵)’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이다. 20세기 전반 일본에서 민중예술 이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가운데, 야나기는 조선 민화에 대한 연구와 수집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민화를 ‘민중에 의해 태어나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사용된 그림’이라고 정의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채화(彩畵)’라는 용어를 제안하는 학자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민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1960년대 이후 여러 학자들은 ‘민화’, ‘한화(韓畫)’, ‘겨레그림’ 등의 용어를 제시하며 민화를 민족의 그림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는 민화에서 민중 미술의 특성을 부각하기도 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민화’의 용어 적절성을 논하며 새로운 대안이 될 만한 단어를 찾으려고 여전히 노력 중이다.

민화를 보다 폭넓게 정의하면 선사시대 암각화, 고대 고분벽화 등도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민화를 주로 서술하고자 한다.

3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를 담은 가지각색의 민화들

민화는 기능 측면에서 문인화와 구분된다. 문인화는 사대부의 기상과 흥취를 담은 감상이나 교훈을 주는 용도의 그림이 많다. 반면, 민화는 감상용도 없지는 않지만 복을 기원하거나 액막이를 하고, 그림으로 집을 장식하는 등의 용도로 주로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쉽고 간단하면서도 자유롭게 그렸기 때문에 구도, 원근, 움직임 등에 있어서 매우 창의적이다.

주제 역시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 어해도(魚蟹圖), 작호도(鵲虎圖), 십장생도(十長生圖), 산수도(山水圖), 풍속도(風俗圖), 문자도(文字圖), 책가도(冊架圖), 무속도(巫俗圖) 등 다양하였다. 심지어 문인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옛 경전이나 역사서에 나오는 사건이나 인물을 묘사한 그림)도 그려졌다. 사실 관직생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일반 서민에게 고사인물화의 고상한 담론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18∼19세기에는 신분 질서가 변화하면서 문화의 향유 계층이 대폭 확대되었다. 따라서 당시 서민 계층에서는 양반 문화를 모방하는 사례들이 나타났던 반면, 한편으로는 그들의 독자적인 의식을 담아낸 창의적인 문화 양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고사인물도 역시 서민의 다변화된 문화적 욕구를 반영하면서 민화로 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기존의 그림 문화가 지배층에 의해 전유되었다면, 조선 후기에는 점차 그 향유 계층이 민간에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다만 민화의 제작 방식은 기존의 문인화와 많이 다르다. 일례로 산수화가 민화로 그려질 때 그림 수요자의 요구로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기도 했다. 금강산도(金剛山圖)에 승려 혹은 유람객을 부각하여 그려 넣기도 하고, 신선이 노닐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 등을 자유롭게 삽입함으로써 그림 수요자가 생각하는 금강산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즉, 민화에는 산수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욕구가 친근하게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화를 제작하고 감상했던 데에는 민간의 소박하고 다양한 욕구가 반영되었다. 그림 소재가 되었던 십장생·복숭아는 장수, 포도·석류·수박·연밥은 다산, 모란은 부귀, 원앙은 부부의 애정 등을 의미하였다. 특히, 어해도(물고기 등의 바다 생물을 그린 그림)의 범주에 들어가는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의 경우는 잉어 등이 튀어 올라 용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는 과거 급제와 관련되는 것으로, 이른바 ‘등용문(登龍門)’에 들어서고자 했던 입신양명의 꿈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같은 용을 그려도 구름과 함께 있는 용은 다른 의미를 지녔다. 즉, 운룡도(雲龍圖)는 기우(祈雨)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낸 사례는 자주 있었다. 조선 후기 민화 형태의 운룡도는 화려한 채색이 가미되었으며, 용의 형상은 조금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띠는 등 민간에 친숙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구름을 다양하게 변형시켜 장식성을 높였다.

운룡도는 작호도, 즉 까치호랑이 그림과 짝을 지어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문배도(門排圖)라고 하는데, 정월 초하루인 설날에 대문에 나란히 붙여 놓았다. 또한 문배도로 용과 호랑이 그림을 나란히 그려 놓기도 했다. 호랑이는 재액을 막아주고 까치와 용은 길상의 조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물들은 세화(歲畫)로 활용되기도 했다. 세화 풍습과 관련한 기록은 고려, 조선시대에 자주 등장한다. 새해가 되었을 때 궁궐·관청·가옥 내에 한시적으로 그림을 붙여놓아 나쁜 일은 물러가고 좋은 일만 생기기를 기원하였던 풍습인데, 호랑이 뿐 아니라 십장생, 가을 매가 토끼를 잡는 그림 등 다양한 형태가 확인된다. 조선 전기에는 궁궐에서 세화를 제작하면서 많은 비용이 들어 논란이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까지 널리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소장자의 욕구가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그림으로는 문자도가 있다. ‘효제충신 예의염치(孝悌忠信 禮儀廉恥)’, ‘수복강녕 부귀다남(壽福康寧 富貴多男)’, ‘백수백복 만수무강(百壽百福 萬壽無疆)’, ‘길상(吉祥)’, ‘희(囍)’, ‘용호(龍虎)’, ‘귀(龜)’, ‘성(星)’, ‘심(心)’, ‘천왕(天王)’, ‘수목토(水木土)’ 등의 각종 문구가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문자도는 민화가 유행하기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유교 윤리가 확산되면서 문자도의 수요 계층이 늘어나자 그 형태도 다양해졌다. 글자 획을 꾸미는 화려하고 독특한 장식 무늬와 색감은 참신한 발상의 타이포그래피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되고 있다.

4 민화의 유통

민화가 언제부터 보편적으로 제작·유통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19세기 무렵 서울의 시장에서는 그림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수도 한양의 모습을 노래한 『한양가(漢陽歌)』에는 종로 광통교 아래에서 백자도(百子圖),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구운몽도(九雲夢圖), 십장생도(十長生圖), 신선도(神仙圖) 등이 병풍이나 낱장으로 제작되어 유통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에도 광통교 아래 가게에서 백자도 병풍을 팔았다. 백자도는 백 명의 아이들을 화폭에 담아 자손의 번성, 건강, 행복 등을 기원하는 그림으로, 일반 가정의 혼례병풍이나 집 내부의 장식품으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곽분양행락도는 중국 당의 무장 곽자의(郭子儀)의 생일잔치를 그림으로써 부귀, 장수 등을 바라는 그림이다. 구운몽도의 경우는 김만중(金萬重)의 소설 『구운몽』의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하여 민화가 많이 그려졌다. 또한 십장생도, 신선도 등도 불로장생,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민간의 소원을 담아 유통되었다.

20세기 초에 우리나라에 이탈리아 총영사로 와 있었던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의 저서 『꼬레아 꼬레아니(Corea e Coreani, 1904년 출간)』에는 “한국의 어느 집에나 같은 그림들이 걸려있고, 종로에 복제화와 종이를 파는 상인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몇 전만 주면, 용이나 호랑이, 날개 돋친 말, 옛 전사들의 환상적인 형상들을 구할 수 있다.”고 기술하였다. 20세기 초 민화의 수요가 보편적이었고, 민화 구입도 쉬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 민화의 예술적 가치

민화의 확산은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을 반영한다. 임진왜란 이후 전란을 극복하면서 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그림을 비롯한 기존 지배층의 문화가 서민에게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민화를 그린 ‘이름 없는’ 화가들은 기존 그림 문화를 답습하면서도 그림에 담긴 의미를 자신들에게 주어진 여건 내에서 자유롭게 변용시켰다. 이러한 민화는 대중의 삶과 정신을 윤택하게 해준 보편적이고 실용적인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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