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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史庫]

국가 주요 서적의 보존과 관리

1398년(태조 7)

사고 대표 이미지

평창 오대산 사고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시대 사고(史庫)는 국가의 주요 서적들을 보존·관리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사각(史閣)이라고도 칭했고, 실록을 반드시 보관했기 때문에 실록각(實錄閣)이라고도 불렀다. 사고는 한양에 있던 내사고(內史庫)인 춘추관사고(春秋館史庫)와 지방의 여러 곳에 있던 외사고(外史庫)로 구분되었다.

조선 전기 외사고는 충주, 전주, 성주 등의 세 곳에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간신히 전주사고에 있던 서적만 병화를 피했다. 조선 후기에 외사고는 서적들을 더욱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적상산으로 이전), 강화부(정족산으로 이전) 등지에 옮겨 설치되었다.

2 조선 전기 사고의 설치

우리의 역사와 학문은 기록으로 전승되었고, 그 기록은 서적에 담겼다. 그러나 목판 간행, 활자 인쇄, 필사 등으로 행해진 서적의 편찬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최종 간행된 부수가 소량에 불과하여 보관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짓고 원본은 “명산에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서울에 둔다.”고 하였고, 고려와 조선의 관리들도 사고를 서울과 지방에 분산 설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한 곳에서 불의의 재변이 발생하더라도 다른 곳의 서적을 바탕으로 재간행 할 수 있게 대비한 방책이었다.

고려시대 사고는 개경과 산속 사찰에 설치되었고, 조선 건국 이후 사고는 수도 한양과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총 4곳에 분산 설치되었다. 한양의 춘추관 사고와 충청도 충주 사고가 먼저 건립되었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충주 사고의 경우 1412년(태종 12) 전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9년(세종 21)에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 사고가 신설되었고, 『세종실록』, 영릉 비문(英陵碑文) 등의 국가 주요 문헌들을 네 곳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한편,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는 화재나 외적의 침입이 우려되어 각 사고를 인근 산 속으로 옮겨 설치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조는 그의 뜻에 수긍했을 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각 사고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했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보수가 가능했다. 1538년(중종 33)에 성주 사고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의 일이었다. 화재 조사를 위해 내려간 경차관은 관노가 사고 누각 위의 비둘기들을 잡다가 떨어진 불 때문에 실화한 것으로 보고했지만, 조정에서는 수령을 모함하는 자의 소행이라는 의견이 빗발쳤다.

아무튼 조정에서는 춘추관 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하여 책 수가 많은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을 활자로 간행하였고, 나머지는 베껴 쓰도록 하였다.

3 임진왜란과 전주사고

전쟁이 나면서 사고는 네 곳 모두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남겼는데, 각종 서적도 예외는 아니었다. 왜란 당시 일본군이 전투 경로에 있었던 성주, 충주, 전주, 춘추관의 사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그나마 전주 사고에 보관되었던 서적들만 옮겨져서 보존될 수 있었다.

전주사고의 서적들은 전라감사 이광(李洸), 태인의 선비 손홍록(孫弘祿), 안의(安義), 경기전(慶基殿) 참봉 오희길(吳希吉) 등을 비롯한 여러 백성이 지켜냈다. 그들은 사고의 전적과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어진을 내장산으로 옮겨 병화를 피할 수 있게 했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 일본이 호남 지역을 침범하려 하자 조정에서는 춘추관 대교 조유한(趙維韓)을 파견하여 전적을 넘겨받도록 하였다. 이때 해주로 이동해 보관하다가 강화부 , 영변부 , 다시 강화부로 옮기며 보관했다. 1660년에 이르러서야 정족산 사고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때 전주사고에서 구해 낸 서적은 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여지승람』, 『동문선』, 『병장설(兵將說)』, 『역학계몽(易學啓蒙)』, 『초학자회(初學字會)』, 『역대병요(歷代兵要)』, 『진법(陣法)』 등이 있었고, 중국의 전적도 많았다. 이런 서적들은 몇 차례나 옮겨 다녔지만 물에 젖거나 진흙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란은 이후에도 있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춘추관 사고가 불에 탔고, 1636년(인조 14)에 발생한 병자호란 때에는 전주사고본 실록에 낙권, 낙장 등의 피해가 있었고, 빗물로 인해 훼손되거나 흙에 오염되기도 했다. 이처럼 손상된 부분은 전쟁이 끝나고 또다시 보수되었다.

4 조선 후기 사고, 산 속 깊숙이 숨다

조선 후기의 외사고는 임진왜란 때의 뼈아픈 경험을 계기로 모두 산속에 설치되었다. 1606년 오대산과 태백산에 사고를 신설하면서 춘추관 사고, 강화부 사고, 묘향산 사고 등과 함께 다섯 사고 체제를 갖추었다.

조선 전기에는 사고가 고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전담 관리와 인력을 배치하거나 물자를 공급하는 등의 업무가 수월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에는 전란으로 인한 경험 때문에 산, 산성, 섬 등으로 사고를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관리 측면에서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고 인근 불교 사찰의 승려들에게 수호하도록 하였다. 정족산 사고는 전등사(傳燈寺), 적상산 사고는 안국사(安國寺),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覺華寺),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月精寺)가 수호사찰이었고, 각 사찰 주지는 수호총섭(守護摠攝)이 되어 실록의 수호를 맡았다.

각 사고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면서 「경외사고수직절목(京外史庫守直節目)」도 새로 제정하였다. 절목에는 사고를 총괄하는 참봉(參奉)과 수직하는 고지기[庫直]를 두었고, 사고를 수호하는 실질 업무를 승려에게 맡기도록 하였다. 또한 승려의 각종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했으며, 수호 사찰에 위전(位田)을 설정해 줌으로써 경비를 조달하도록 하였다.

5 사고 관리의 어려움

조선 후기 깊은 산 속의 사고 관리는 결코 쉽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서적 목록이 잘 정리되어야 했고, 습기·누수·충해 등으로 책이 손상되지 않는지 점검해야 했으며, 사고 건물 자체도 관리해야 했다. 그리고 외적의 침략이나 화재도 대비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쇄(曝曬)·포서(曝書)·거풍(擧風) 등으로 불렸던 정기적인 서적 점검 작업이다. 포쇄는 서적이 습기에 의해 부식되거나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고 밖으로 실록 등을 꺼낸 뒤에 햇빛을 가리고 바람이 통하도록 하는 조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선대 임금의 실록은 3년마다 춘추관 당상관이 열어 살펴보고 포쇄한다. 지방에는 사관을 보낸다.”라는 규정이 있듯이 3년마다 한 번씩 포쇄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주로 봄, 가을에 포쇄했는데, 3년이라는 주기가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이때에는 실록의 상태도 전체적으로 살폈고, 실록을 넣는 궤도 점검하였다. 그런 후에야 봉과(封裹), 즉 실록을 붉은 명주 보자기에 싸서 궤에 보관하고 천궁가루와 창포가루가 들어간 주머니를 함께 넣어 습기와 벌레를 방지하는 작업을 행하였다. 한편, 『박학사포쇄일기(朴學士曝曬日記)』에는 1871년에 포쇄관으로 임명된 박정양(朴定陽)이 적상산 사고와 태백산 사고의 포쇄를 수행하는 여정이 국문 가사 형태로 남아있어 주목된다.

사고는 아무 때나 열지 못했다. 세종은 충주 사고의 서적 목록에서 열람할 것을 고른 후 예문관 관리를 보내 가져오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고의 문은 더욱 굳게 닫혔다. 포쇄할 때,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특정 업무와 관련된 선례를 확인할 때[고출(考出)]에 주로 사고 문을 열어 책을 꺼냈다. 그나마 19세기 이후에는 더욱 횟수가 줄었다. 18세기에 각종 의례서와 의궤가 많이 제작됨으로써 국가 의례의 틀이 잡히어 고출의 필요성이 줄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관리 실태는 『형지안(形止案)』에 기록되었다. 『형지안』은 오늘날의 도서 관리 대장과 비슷하다. 각 『형지안』에는 서책에 대한 정보 및 보관 상태, 사고의 수개(修改), 포쇄·봉심·보수 등의 이유로 사고의 문을 열었을 때 점검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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