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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충, 효, 열의 유교 윤리를 실천하라

1434년(세종 16)

삼강행실도 대표 이미지

삼강행실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삼강행실도』는 1434년(세종 16)에 집현전에서 백성을 교화(敎化)하기 위해 편찬한 서적이다. 국가에서 백성을 대상으로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삼강(三綱), 즉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강령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람들의 사례를 모아 놓은 서적이다. 충신, 효자, 열녀의 사례 각 110인씩 총 330명의 행실을 기록하였고, 관련된 일화를 목판화로 그려 넣었다.

2 고려 말에 성리학을 수용하다

전통시대 유교에서는 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군주를 성심으로 섬기는 것이 기본 덕목이었다. 이에 유교 지식인들은 효(孝)를 근본적인 도덕 규범으로 제시하였고, 효가 군주에 대한 충(忠)의 규범과 일치한다는 사상적 개념을 정립하였다. 더불어 인간관계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덕목인 충, 효, 열(烈)의 삼강(三綱)이 강조되면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부인 간의 상하 질서가 마련되었다. 이들 사이의 상하(上下), 존비(尊卑), 귀천(貴賤)의 차별적 신분 질서는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유교 사상과 질서는 고려 말 성리학의 수용 이후 강화되기 시작했다. 1346년(충목왕 2) 권보(權溥)는 『효행록(孝行錄)』을 편찬하였다. 『효행록』은 특정 인물들의 효행 사례를 구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효의 윤리를 어떤 방식으로 실천해야 하는지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서적이다. 현재 조선시대에 중간된 판본들이 남아있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중국 고대 사회의 효행 사례 53항목, 형제간의 윤리 실천 사례 7항목, 부부간의 윤리 실천 사례 2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건국한 조선왕조도 정치, 사회, 제도, 관습 등의 각 부문에서 유교 윤리를 적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유교 윤리인 충, 효, 열은 이론적인 접근도 중요했지만, 『효행록』처럼 구체적인 실천 사례들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더욱이 글자를 모르는 대부분의 백성에게는 난해한 이론 설명보다 직관적인 그림을 통한 이해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삼강행실도』는 삼강을 실천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기술하고 그와 관련된 이미지를 목판화로 그려 삽입하는 체제를 이루었다. 이는 사회 전반에 유교 윤리를 확산시키려 했던 지배층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3 김화의 아버지 살해사건, 『삼강행실도』 편찬의 계기가 되다

『삼강행실도』 편찬의 직접적인 계기는 1428년(세종 10)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사건이었다. 경상도 진주에 살던 김화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은 유교적 충효 윤리를 중시했던 조선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세종이 이 사건을 계기로 효 윤리의 재정립을 모색하였음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는 여러 신하들에게 효제(孝悌)를 돈독하게 하고 풍속을 순후하게 할 방법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은 『효행록(孝行錄)』과 같은 서적을 널리 반포할 것을 청했고, 세종은 전에 편찬한 24인의 효행에 20여 인의 효행을 더 넣어서 『효행록』을 다시 찬술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 때의 『효행록』은 편찬되었다는 과정이 나타나지 않고 전해지는 판본도 없다. 당시 세종의 명령은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던 듯하다. 권보의 고손자인 권채(權採)가 쓴 『삼강행실도』 서문에서도 『효행록』을 저본으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집현전 부제학 설순(偰循)을 비롯한 학자들은 『효행록』과 명(明)의 『효순사실(孝順事實)』 등을 참고하여 1432년(세종 14)에 편찬을 완료하였다. 이어 1433년(세종 15)에 판각, 1434년(세종 16)에 반포하였다.

4 삼강행실효자도, 삼강행실충신도, 삼강행실열녀도

『삼강행실도』는 역대 중국과 우리나라의 제왕, 후비, 공경, 서민을 대상으로 하여 삼강(三綱)에 모범이 될 만한 행실이 수록되었다. 내용은 크게 삼강행실효자도(三綱行實孝子圖), 삼강행실충신도(三綱行實忠臣圖),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세 부분이다. 각 책마다 반포 교지, 전(箋), 서(序), 발(跋)이 실려있는데, 이는 전국 각 도에서 재량껏 세 책을 모두 간행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한 책만 낼 수도 있도록 책마다 독립된 체체를 갖추도록 한 것이다. 각 인물별로 행적을 담은 표제와 그림이 배치되었으며, 전기, 시찬(詩贊)은 뒤에 있다.

일례로 삼강행실효자도에는 부모를 잘 봉양한 사례들이 실려있다. 중국인은 효행이 지극했던 순(舜) 임금으로부터 시어머니를 잘 봉양한 명의 유씨(劉氏) 부인까지 89명의 효행이 서술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장님인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부잣집에 여종으로 팔려가기를 원했다는 신라 지은(知恩), 까마귀를 감동시킬 정도의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는 은보(殷保) 등 23명의 효행이 수록되었다.

삼강행실충신도와 삼강행실열녀도에도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 열녀의 사례가 각 110건씩 실려있다. 충신도에는 중국인 95명, 우리나라 사람 15명이, 열녀도에는 중국인 95명, 우리나라 사람 15명이 수록되어 있다.

5 목판화로 표현된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윤리적 교화를 목표로 하였다. 얼마나 많은 수량이 보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궁벽한 마을의 아동, 부녀에 이르기까지 보고 살피지 않는 이가 없게 하였습니다.”라는 기록에서 그 보급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멀고 외딴 지방의 아이들과 여성들이 『삼강행실도』를 봤다는 것은 책을 어렵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집현전에서는 문장, 시, 찬을 모두 권점(圈點)을 찍어 쉽게 해석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림을 그려 문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다.

고려 때 효자 최루백(崔婁伯)의 사례 역시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선 그 내용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최루백은 고려 말 수원 호장 최상저의 아들인데, 15살 때 그의 아버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했다. 최루백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나갔고, 결국에는 호랑이를 잡아 아버지의 뼈와 살을 추려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지내던 어느날 잠깐 잠이 들었는데, 아버지가 나타나 감동의 시를 읊어주었다.

최루백의 사례는 『삼강행실도』의 판화 한 면에 네 장면이 같이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그가 호랑이를 잡겠다고 도끼를 집어들려 하자 어머니가 말리는 장면, 그 위쪽으로 최루백이 배가 불러 누워있는 호랑이에게 도끼를 들어올리는 장면, 맨 위 왼쪽에는 여막살이를 하는 장면, 그 오른쪽에는 잠든 최루백에게 신선이 된 아버지가 나타난 장면 등이 순차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최루백의 이야기와 그림은 『삼강행실도』 뿐만 아니라 이후 꾸준히 편찬된 행실도류의 서적에도 실려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대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는 판각이 조금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거의 비슷하게 그림이 묘사되어 있다. 정조대의 『오륜행실도』에서는 그림이 여러 장면으로 복합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하나의 장면만 표현되었다. 즉, 최루백이 산 속에 있던 호랑이를 도끼로 내려치는 장면 하나를 묘사하여 극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6 『삼강행실도』의 특징과 의의

『삼강행실도』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유교 교화서이다. 대다수의 사례가 중국의 인물들이지만, 그 체제는 중국의 서적과는 조금 달랐다. 『삼강행실도』는 효자, 충신, 열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한 것, 그림[圖], 이야기[傳], 시찬의 체제, 한 도판에 여러 장면을 복합적으로 그려 넣은 형식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김화의 아버지 살해사건을 계기로 하여 편찬된 만큼 편찬 순서가 충신, 효자, 열녀의 순이 아니라 효자, 충신, 열녀의 순으로 된 것도 특징이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시대 백성들의 유교적 교화를 위해 발간된 서적 가운데 제일 먼저 간행되었고 다양한 증보판을 통해 널리 읽혔다. 따라서 『삼강행실도』의 내용은 당시의 유교적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자료가 된다. 또한 『삼강행실도』의 보급은 삼강의 충, 효, 열의 윤리적 규범이 조선 사회에 어떻게 확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현대 한국인의 윤리관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목판화는 회화사적인 가치가 크다. 현재 조선 전기 인물화와 풍속화가 거의 남아있지 않는 상황에서 당대의 풍속,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7 『삼강행실도』의 증보판 : 삼강오륜의 나라

조선의 삼강오륜 보급은 전 시대를 걸쳐 꾸준히 이루어졌다. 『삼강행실도』가 반포된 후 세종은 1년 후인 1444년(세종 26)에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려고 했다. 언문 번역본이 반포되면 어리석은 백성[愚夫愚婦]들 중에서도 충신, 효자, 열녀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첫 언해본은 1481년(성종 12)에야 간행되었다. 이는 효자·충신·열녀의 인원 수를 35명으로 줄이고, 언해를 붙여서 3권 1책의 목판본의 형태로 간행한 것이다.

『삼강행실도』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1489년(성종 20)에는 분량을 줄여 한 책으로 다시 정리했다. 여기에는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35인씩 총 105인이 수록되었다.

이후 행실도는 증보를 거듭하면서 17차례나 인쇄되었다. 대표적인 간행으로는 1514년(중종 9)의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중종 13년(1518)의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광해군 9년(1617)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정조 21년(1797)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이 있다.

8 『삼강행실도』에 대한 후대의 비판적 인식

『삼강행실도』에는 폭력적 서사가 많다. 모범적 사례로 제시된 충신, 효자, 열녀들의 이야기는 철저한 유교적 위계질서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아버지, 군주, 남편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헌신을 강조하였다. 게다가 국가에서는 충신, 효자, 열녀들에게 세금이나 용역을 면제해주고 정려문을 세워주는 등의 포상을 해주면서 장려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충, 효, 열이라는 유교 윤리를 지키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거나[단지(斷指)] 허벅지를 베어내는[할고(割股)] 등의 자해를 서슴지 않았다. 열녀는 남편을 따라 죽는 자살[순절(殉節)]을 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열녀가 남편을 따라 자살하고 이에 대해 국가에서 정려하는 세태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자살을 의(義)에 합당하지 않는 죽음으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정약용도 겁탈에 맞서거나 강압적인 재혼을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는 죽음을 맞는 것은 의로운 행위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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