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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

지방 사림, 서원을 중심으로 성장하다

1543년(중종 38)

서원 대표 이미지

병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서원은 1543년(중종 38)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건립을 계기로 각 지방에 만들어진 교육·제향 기관이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선현에게 제향을 지내는 사설 교육기관으로 기능하였다. 성균관·향교 등의 관학에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배향한 것과 다르게 서원에서는 우리나라의 선현을 모셨다는 특징이 있다.

서원은 향촌의 유교 질서를 강화하는 동시에 정치 현안에 대한 사림(士林)의 공론을 형성하였다. 아울러 전국 각지에서 사족의 중심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중앙과 지방의 여론을 이어주는 통로로서 기능하였다. 서원에서의 강학 활동을 통해 각 지역에서 학파가 성립하고 재생산됨으로써 성리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병자호란 때에는 자기 지역의 방어를 위한 의병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원이 지나치게 증설되면서 각종 폐단이 발생했다. 조선 후기 이후 서원의 훼철 논의는 종종 있었고, 실제 헐어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결국 고종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47개 소만 남긴 채 모두 철폐되었다.

2 서원 건립의 배경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의 이름으로 교육 혹은 제향을 담당한 기구는 있었다. 하지만 교육과 제향의 두 기능을 겸비한 곳은 없었다. 1543년(중종 38)에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함으로써 서원이 서재(書齋)와 사우(祠宇)의 역할을 겸하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서원 건립의 배경에는 관학의 쇠퇴와 사림의 등장이 있었다. 우선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중앙의 성균관과 사부학당, 지방의 향교가 중심이 되었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에 참여한 집현전이 폐지되고 연산군에 의해 성균관이 황폐해지면서 관학의 교육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에 중종이 반정 후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면서 성균관 중심의 학문 중흥을 꾀하였지만,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성종대부터 대간과 홍문관의 언론을 토대로 성장해가던 신진 관료들은 네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도 그들의 연대를 강화해갔다. 그들은 성리학 서적을 간행하여 보급하였고, 향약(鄕藥)을 바탕으로 민간 풍속이 성리학 질서에 따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절의와 도덕의 표상이 된 정몽주(鄭夢周) 등의 선현을 문묘에 종사하고자 추진했다. 사림은 점차적으로 중앙 정계를 장악하였고, 이전과 다른 방식의 국가 운영을 모색했다. 나아가 일상의 모든 것에서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성리학적 질서에 맞춘 국가상을 지향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사림은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 서원에서의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다.

3 백운동서원의 건립과 사액서원의 등장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주세붕이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떠 경상도 풍기(현 영주)에 건립한 것이다. 백운동서원은 퇴계 이황에 의해 더욱 발전하였다. 이황은 관료사회의 공도(公道) 회복이 사림세력에 의해 마련될 것이라 기대하였고, 그들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위해 참된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서원을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풍기군수를 역임하던 때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서적·토지·노비를 하사해 줄 것을 명종에게 청하여 ‘소수’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사액서원이 되는 것은 국가로부터 현판을 받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국가에서는 사액서원에 대해 토지, 노비, 면세, 면역 등의 특혜를 주었다. 즉, 합법적으로 서원을 승인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전에는 별다른 호응을 보이지 않던 지역 사족들도 점차 서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황의 경우 10여 곳의 서원 건립에 참여했다. 일단 고향 예안에서 사림과 제자들을 동원하여 직접 역동서원(易東書院)의 건립을 주관하였고, 원규(院規)를 제정하여 서원의 운영 계획과 방안을 마련하였다. 퇴계의 문인들도 서원 건립을 주도하거나 지원하였다.

4 강학과 제향이 겸비된 건축 구조

서원은 사림들이 과거 준비보다는 순수 학문을 통한 성인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지방 관아로부터 조금 거리가 있으면서 산천이 아름다운 곳에 건립되었다. 지방관의 통제를 받았던 향교와는 입지 조건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서원은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이었기 때문에 선현의 연고 지역 가운데에서 한곳을 택해 위치하였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문묘·향교 등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은 선현에게 제향을 지내는 사당과 유학 교육을 시행하는 강당으로 구분되었다. 사당은 보통 서원의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했는데, 별도로 담장을 둘렀으며 삼문(三門)을 두어 출입을 제한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제기고(祭器庫)를 두어 제향 물품을 보관하였다. 강학 공학의 중심 영역인 강당 주변으로는 동재(東齋)·서재(西齋)를 두어 원생 등이 숙식하도록 하였다.

서원은 강학과 제향을 위한 곳이기 때문에 건축물이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주변의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지면서도 단아한 모습으로 조영되었다.

5 서원의 교육

서원 교육은 원장(院長)·강장(講長)·훈장(訓長) 등의 원임(院任)에 의하여 수행되었는데, 원장은 퇴임한 관료나 향촌 내의 이름난 유학자가 맡는 것이 관례였다. 입학 자격은 대체로 초시(初試)에 합격한 생원·진사에게 주어졌다. 그렇다면 서원에서는 무엇을 배웠을까.

서원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통해 도덕적 인간의 완성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적으로 과거가 관직 진출의 통로가 되었던 현실에서 유생들은 과거 공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율곡 이이(李珥)의 은병정사 학규(隱屛精舍學規)를 보면, 이이는 “만약 과거 공부를 하고 싶은 자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유생들이 경서(經書)나 성리서(性理書) 위주로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역사서를 읽는 것은 허용하지만, 서원에서의 과거 공부를 금하고 있다. 한편, 성균관과 관련된 「학교모범(學校模範)」이라는 글에서는 나라의 번영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함을 강조했다. 즉, 이이는 성균관과 같은 관학과 서원의 역할을 구분하며, 서원 내에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근본임을 분명히 하였다. 물론 전국의 수많은 서원의 교육과정은 조금씩 다르다. 화양서원(華陽書院)의 학규를 보면, 과거 공부를 서원의 교육과정에 포함하기도 하였다.

원칙적으로 각 서원에서는 강학에 전념한다는 취지하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하여 『소학(小學)』, 『가례(嘉禮)』 등을 공부하였다. 강학은 언제 행해지느냐에 따라 순강(旬講)·망강(望講)·월강(月講) 등이 있고, 그 방법에 따라서는 암송낭독인 배강(背講, 책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는 것)과 임문낭독(臨文朗讀, 문장을 보고 낭독하는 것)인 면강(面講, 문제 출제자의 얼굴을 보고 읽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낭독 후에는 질의응답을 하여 단순한 암송에 그치지 않게 하였다.

원생의 출석은 도기제도(到記制度, 출석부와 비슷함)를 통해 확인하며, 평가는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不)의 5단계, 혹은 통·약(略)·조(粗)·불의 4단계로 구분하였다. 대통·통은 가장 높은 학습 수준을 보인 원생에게 부여되며, 불은 낙제이다.

6 서원의 절정

서원은 도학(성리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림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조선시대 유교 사회의 대표적 산물로, 선조 대에 사림 정치가 시작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선조 대에 건립된 서원은 60여 개에 이르며, 22개 소에는 사액이 행해졌다.

붕당정치가 행해지면서 서원은 전국 곳곳에 창설되었다. 붕당의 형성에 학연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였고, 서원은 학연의 조직과 확대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즉,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정경세(鄭經世)·허목(許穆)·윤휴(尹鑴)와 같은 붕당의 유력자들은 자기 붕당과 관련이 있는 지역에 서원을 세웠고, 그 지역 유생들도 서원을 기반으로 하여 정계 진출을 도모하였다. 서원은 붕당의 인적·물적 기반이 되었던 셈이다.

서원의 역할이 절정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서원이 단순한 교육기관에 그치지 않았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지역 사족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향회(鄕會)·향안(鄕案)·향약·유향소(留鄕所) 등을 만들고 활동하였다. 향촌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향촌 운영 기구로서의 기능을 더했던 것이다.

7 서원의 지나친 증설과 쇠락

조선 후기 서원은 해마다 증가하여 ‘고을마다 즐비하게’ 되었다. 우선 사액을 명분으로 국가에서 경제적 혜택까지 지원한 것이 서원 증설에 큰 역할을 했다. 지방 유생들은 서원을 통해 결집하였고, 서원과 붕당 간의 유착은 서원의 수가 지나치게 증가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처럼 서원이 증가하자 서원의 본래 목적은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벼슬이 높거나 세력 있는 집안사람이면 향사(享祀)하고, 서로 다투어 제사 지내는 것을 일삼아 이것을 가지고 서로 자랑하며, 또 그것으로 사사로이 명예를 세움으로써 배척과 훼방이 따르기도 한다.’는 식이 비판이 나타났다. 서원에 뛰어난 유학자를 제향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자기 붕당의 이해관계에 맞는 사람들이 배향되었던 것이다. 또한 높은 관직을 지냈거나 고을을 잘 다스린 수령, 자손의 출세를 토대로 선조(先祖) 등이 배향되는 사례도 있었다.

서원 남설은 교육의 질을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각종 폐단까지 야기하였다. 건립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지방관에게서 갹출하는 구청(求請)이 빈번했고, 양정(良丁, 양인 신분의 장정)에게 불법적으로 역을 부담하게 하는 일도 잦았다. 무엇보다 서원이 공론을 빙자하여 당론의 소굴이 되었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한 고을에 여러 개의 서원이 건립되는 것, 한 인물을 배향하는 서원을 여러 곳에 세우는 것 등을 금지한다는 조처를 내렸다. 하지만 서원이라는 명칭을 피해 사우(祠宇)를 건립하는 편법이 행해졌다.

결국 조정에서는 서원 혁파가 논의되었다. 선조는 문폐(文弊)가 심하다는 이유로 긴요하지 않은 서원을 혁파하도록 하였고, 영조는 서원을 당론의 온상으로 지목하여 170여 개소의 서원과 사우(祠宇)를 철폐하였다. 그리고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한 사람을 중복하여 배향하거나[첩설(疊設)] 사사로이 건립된 서원을 조사하여 폐지하였고, 서원과 관련한 각종 불법적인 사안들을 대대적으로 점검하였다. 그리고 만동묘(萬東廟)와 화양서원(華陽書院)을 없앤 이후 서원 정비를 단행하여 1871년(고종 8)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6백여 곳의 서원을 모두 철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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