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석보상절

석보상절[釋譜詳節]

세종과 수양대군,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하다

1447년(세종 29)

석보상절 대표 이미지

석보상절 권9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석보상절』은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447년(세종 29)에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세종은 둘째 아들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 세조)에게 명하여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 불교의 전래 과정 등을 담아 책을 펴내도록 하였다. 수양대군은 『석가보(釋迦譜)』, 『석가씨보(釋迦氏譜)』, 『법화경(法華經)』, 『아미타경(阿彌陀經)』을 비롯한 각종 불전에서 관련 내용을 뽑아 한글로 된 언해서를 완성하였다.

책명에서 석보(釋譜)는 석가모니의 전기(傳記)를 뜻하고, 상절(詳節)은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상세하게 서술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간략하게 줄인다는 의미이다. 『석보상절』은 불교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문장도 유려하여 조선 전기 문학, 한글, 인쇄 등의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석보상절』은 24권 중 10권만 남아 있다. 현재 전하는 초간본의 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권6·9·13·19의 4책, 호암미술관에 권20·21의 2책이 있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권23·24의 초간본 2책이 있고, 중간본으로는 권3·11이 있다. 이렇듯 『석보상절』은 유실본이 많다. 그러나 세조가 1457년(세조 3)에 편찬한 『월인석보(月印釋譜)』의 내용을 통해 『석보상절』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월인석보』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한 것으로, 전권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10여 권이 전해지고 있다.

2 조선왕실과 불교

조선은 유교국가였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지속되었던 불교의 영향력은 강했다. 조선 초기에는 도성 안에 흥천사(興天寺), 흥복사(興福寺), 흥덕사(興德寺) 등의 사찰이 건립되었고, 각종 불사가 대규모로 행해졌다. 왕실 내불당에서도 불교 의례가 행해졌고, 일부 국왕은 불교에 대한 신앙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태조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태종은 강력한 척불 정책을 실시하면서도 왕비 원경왕후(元敬王后)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치병(治病) 등을 위한 불교 행사를 시행하였다.

세종은 유교정치를 표방하면서도 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궁궐 안 내불당(內佛堂)을 혁파했지만, 이후 대신들의 끈질긴 반대를 뿌리치고 다시 내불당을 세웠다. 또한 세종은 신하들의 척불 관련 요구를 여러 차례 반대하였고, 왕실을 위한 불교 의례도 빈번하게 개최하였다. 더불어 소헌왕후와 효령대군(孝寧大君), 수양대군,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의 왕실 구성원들을 위한 구복(求福), 추천(追薦,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의식) 등의 불사도 자주 행하였다.

조선 초기에 불교신앙이 깊으면서도 불경 간행을 가장 많이 했던 군주는 세조이다. 그는 수양대군 시절 김수온(金守溫), 승려 신미(信眉) 등과 함께 불경 언해를 주도하였고, 『석보상절』의 찬자이기도 하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월인석보』,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대장경(大藏經) 등을 간행하였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수많은 불전(佛典)을 간행하였다.

3 소헌왕후의 죽음과 불교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병이 심각해지자 불교 관련 의례는 더욱 빈번하게 나타났다. 병이 낫기를 바라며 명산 사찰에서 기도하였고, 대군들의 연비(燃臂, 향불로 팔을 태우는 불교 의식) 도 행해졌다. 이러한 의식은 태종비 원경왕후민씨의 병환 중에도 자주 행했기 때문에 세종대에만 나타났던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는 유교 윤리를 내세우는 대간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구복, 치병과 같은 각종 이유로 불교 의례가 행해졌다. 소헌왕후의 치병을 위해 세종과 대군, 그리고 관료들까지도 전국 각지의 산천과 사찰에서 기도하였지만, 그녀는 결국 1446년(세종28)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왕비의 극락천도를 위해 집현전 수찬 이영서(李永瑞), 돈녕부 주부 강희안(姜希顔) 등으로 하여금 성녕대군의 집에서 황금을 이용해 불경을 만들게 하였고, 인순부 소윤 정효강(鄭孝康)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듬해에는 소헌왕후를 위한 천도불사의 일환으로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보상절』을 편찬하도록 하였고, 이를 보고 세종은 친히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세종이 소헌왕후의 죽음을 불경 편찬을 통해 기리고자 했다는 점은 그녀 역시 불교 신자였음을 반증한다. 세종은 “아이들이 어머니를 위해 불경을 만들라고 한다.”면서 편찬을 주장했다. 대군들은 어머니인 소헌왕후에 대한 불사를 먼저 제안했고, 세종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황수신(黃守身), 이순지(李純之) 등의 관리들은 불경을 만드는 것이 소헌왕후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며 반대했지만, 세종은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4 『석보상절』의 편찬 과정

『석보상절』은 편찬 당시인 세종대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다만 세조대에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한 『월인석보』에 『석보상절』의 서문이 있어서 그 편찬 과정을 알 수 있다.

『석보상절』은 처음에는 한문으로 지어졌다가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관련한 그림이 추가된 후에 다시 한글로 번역되었다. 수양대군의 언급에 따르면, 중국에서 편찬된 『석가보』와 『석가씨보』의 내용이 서로 같지 않아 두 책을 합쳐서 한문본 『석보상절』을 편찬하였고, 그 과정에서 후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하여 진상하였다고 한다.

5 『석보상절』에 담긴 석가모니의 전기

『석보상절』은 석가의 전생으로부터 탄생‚ 수행‚ 득도‚ 교화 등 전 생애를 서술하였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여덟 개로 구분하여 팔상(八相)이라고 하는데, 『석보상절』은 이 순서를 따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도솔내의(兜率來儀, 도솔에 온 일), 비람강생(毘藍降生, 남비니원에 탄생한 일), 사문유관(四門遊觀, 출가 전 태자 때 카필라성의 동서남북 4문 밖에 나가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일), 유성출가(逾城出家, 성을 넘어 집을 나간 일), 설산수도(雪山修道, 눈 덮인 산에서 도를 닦은 일), 수하항마(樹下降魔, 나무 밑에서 악마를 항복시킨 일), 녹원전법(鹿苑轉法, 녹야원에서 설법을 한 일), 쌍림열반(雙林涅槃, 쌍림에서 열반에 든 일)이다. 즉, 석가가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난 것에서부터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서 최후의 설법을 마치고 열반한 일을 담고 있다.

『석보상절』은 전 권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가장 앞 권인 권3에는 석가의 유아시절부터 6년 고행이 끝날 때까지의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권23의 경우에는 석가모니의 반열반(般涅槃, 진리를 체득하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한 최고의 경지)과 유교(遺敎, 부처가 후인을 위해 남긴 교법), 장례 과정과 다비(茶毘), 사리 분배와 사리탑 공양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팔상 중에서 마지막인 쌍림열반에 대응하는데, 각 장면을 시간적 추이에 맞추어 약 11장면으로 구성하였다.

6 한글과 『석보상절』

『훈민정음』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되고, 1446년에 반포되었다는 통설은 최근에 부정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443년에 한글 문자가 창제되었고, 1446년에 그 해설서인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세종실록』에 ‘언문(諺文) 28자를 지었고, ...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와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반포 관련 서술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후 한글로 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대다수는 불교 관련 서적이다. 『석보상절』은 한글로 된 최초의 산문자료이며, 한문 불경을 한글로 옮긴 최초의 사례이다. 다른 불경 언해서들과는 달리 한자 원문이나 구결(口訣, 한문을 우리말로 새겨 읽을 때 한문 사이에 들어가는 우리말로 된 토) 없이 번역문만으로 되었다는 것도 특징이다.

7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합편, 『월인석보』

세종은 『석보상절』의 내용을 국문 시로 만든 노랫말로 직접 지어 580여 장 규모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만들었다. 이 역시 한글 문헌이다.

세조는 1459년(세조 5)에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쳐 25권 25책 분량의 『월인석보』를 만들었다. 이 또한 현재 완질이 전해지지 않는데, 『월인석보』 서문에서는 이 책이 세종의 유작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합편 방식은 『월인천강지곡』의 내용을 나누어 앞부분에 배치하고 각 내용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대목을 노랫말에 대한 해설로 잇달아 붙였는데, 그 과정에서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졌다. 세종이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은 거의 그대로 수록되었지만,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편찬한 『석보상절』은 많이 수정되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두 문헌의 내용 차이는 편찬 목적이 다르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석보상절』이 추천 의례에 모인 청중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라면, 『월인석보』는 추천 의식과 관계없이 한문 해독층에게 석가모니의 생애와 불교 교리를 알리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