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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星湖僿說]

성호 이익(李瀷)의 잡다한 이야기

미상

성호사설 대표 이미지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성호사설』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의 저술이다. 『성호사설』의 의미는 이익의 호인 ‘성호’와 쓸데없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란 뜻인 ‘사설’이 합쳐진 것이다. 즉 성호가 쓴 잡다한 이야기란 의미로 이익이 자신의 저술을 낮춰 부른 것이다.

『성호사설』은 30권 30책으로 이루어졌으며,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시문문(詩文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천문, 지리, 경제, 군사, 풍속, 문학, 종교, 역사,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이 수록되었다. 이러한 『성호사설』은 이익이 80세가 되었을 때 이병휴(李秉休)를 중심으로 한 집안의 조카들이 정리하여 편찬하였다. 실학자로서의 이익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2 다양한 서적을 읽은 이익과 『성호사설』의 탄생

『성호사설』을 지은 이익은 경기도 광주(廣州)의 첨성(瞻星)에 살면서 스스로를 성호(星湖)라고 칭했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인 이상의(李尙毅)가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부 이지안(李志安)은 사헌부 지평을 지냈으며, 부친 이하진(李夏鎭)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그러나 아버지 이하진이 1680년(숙종 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평안북도 운산(雲山)으로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1706년(숙종 32)에는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 형 이잠(李潛)이 세자(뒤의 경종) 책봉 문제로 상소를 올린 것이 노론의 반발과 숙종의 진노를 일으켜 국문 끝에 사망하였다. 이에 이익은 1705년(숙종 31) 증광과(增廣科) 초시(初試)에 입격하였으나 출세의 욕심을 버리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는 광주에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성현(聖賢)의 경전 및 퇴계(退溪) 이황의 글을 정독하며 생활하였다.

이러한 이익은 어릴 때부터 독서에 열중해 수많은 서적을 두루 보면서 선인(先人)들의 말과 행실을 기억하고 정리했으며, 경전을 깊이 사고하여 자득한 후 많은 글을 쓰면서 생활하였다. 『성호사설』에 인용된 문헌이 440여 종에 이른다는 것은 이익의 독서량이 상당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익의 가장(家狀)을 쓴 이병휴는 “그가 읽지 않은 책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이익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 등과 역사책 이외에 단편적인 글이나 생각나는 대로 쓴 만록(漫錄)이라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반드시 구해서 읽었다.

이처럼 이익이 독서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에 다량의 서적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하진을 비롯해 그의 선조들이 국가의 주요 요직을 지내면서 사행(使行)으로 중국에 갔다가 상당량의 서적을 구입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이익은 청의 최신 책이나 희귀한 필사본을 주변의 지인을 통해 빌려 보기도 했다. 이익은 붓과 종이를 항상 휴대하고 다니며 읽었던 서적의 내용이나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성호사설』을 비롯한 여러 책들을 저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이익은 자신이 지은 『성호사설』에 대해 ‘희필(戱筆)’이라고 하였다. 그는 전기(傳記), 자집(子集), 시가(詩家), 회해(詼諧) 등이나 웃고 즐길 만한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고 나중에 보기 위해 열심히 기록하였다. 그러다보니 서술 분량이 많아져 이를 문별로 분류하여 권질(卷帙)을 만들었다. 그리고 책의 이름을 「사설」이라 붙였다.

『성호사설』은 이익이 80세가 되던 해에 편찬되었다. 이후 이익은 1763년(영조 39) 83세 때 국가에서 규례에 따라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베풀게 되어 자급이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17일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3 백과전서와 같은 『성호사설』

『성호사설』은 30권 30책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이익의 비망록 약 3,000개 이상의 항목을 조카 이병휴가 1권에서 3권은 천지문(天地門)으로, 4권에서 6권은 만물문(萬物門), 7권에서 17권까지는 인사문(人事門), 18권에서 27권까지는 경사문(經史門), 28권에서 30권은 시문문(詩文門)으로 분류한 것이다.

천지문에는 223항목의 글이 실려 있다. 주로 천문, 역사, 지리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천문과 관련해서는 일월성신(日月星辰), 북신(北辰), 일구(日晷), 천하수세(天下水勢), 시헌력(時憲曆), 성월변(星月變), 혜성, 뇌진(雷震) 등이 서술되어 있다. 지리 및 역사와 관련해서는 동국지맥(東國地脈), 염지(鹽池), 동국지도(東國地圖), 두만강을 경계선으로 삼은 북방의 국경문제인 두만쟁계(豆滿爭界), 도성, 제주와 비양도의 지리 및 역사, 조선지방(朝鮮地方), 신라 시말(新羅始末), 삼한 금마(三韓金馬), 낙랑 예맥(樂浪濊貊), 옥저 읍루(沃沮邑婁), 고려비기(高麗秘記) 등이 있다.

만물문에는 368개 항목이 실려 있다. 말 그대로 갖가지 물건에 대한 사항과 이익의 생각이 서술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거채(居蔡), 번초(番椒), 백안(白鴈), 청조(靑鳥), 금묘(金猫), 남초(南草), 과하마(果下馬), 패대(珮袋), 구(裘), 비색자기(秘色磁器), 복건(幅巾), 경침(警枕), 화총, 병기 등 동식물, 의복, 그릇, 무기, 음식에 관한 것이다. 이 밖에 망원경, 조총, 안경 등 중국에서 수입된 서양물품의 기능과 윷놀이, 장기 등 민속에 대한 서술도 실려 있다.

인사문에는 990개 항목의 글이 실려 있다. 이 부분의 경우 당론(黨論), 붕당, 치도(治盜), 전결, 군정(軍政), 균전(均田), 중강개시(中江開市), 결부지법(結負之法), 병비(兵備), 무과(武科), 암행어사(暗行御史), 상벌(賞罰), 출처(出妻), 압사(壓沙)·낙형(烙刑), 오위(五衛), 묘제(廟制), 형법론(刑法論), 중앙관제의 통폐합, 서얼차대 폐지, 노비제 개혁, 화폐유통문제, 서경제 철폐 등 조선시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서 나타나는 제도, 사상, 인물, 사건에 대한 이익의 비판의식이 담겨져 있다.

경사문에는 1,048개 항목이 실려 있다. 주로 사서육경(四書六經)에 대한 내용, 민간신앙,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였다. 또한 여조 인종(麗祖仁宗), 칭신 폐주(稱臣廢主), 길야은(吉冶隱), 수호전(水滸傳), 왕양명(王陽明), 목은 대절(牧隱大節), 관우 패사(關羽敗死), 모문룡(毛文龍) 등 중국 및 고려, 조선의 역사 및 인물에 대한 오류와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글이 실려 있다.

시문문에는 379개 항목의 글이 실려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시문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비평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시가 2/3정도 차지하며 시문의 교감이나 고증이 중심을 이루었다.

4 안정복, 이익의 부탁으로 『성호사설』을 재편집하다

『성호사설』은 이익이 수십 년 간 작성한 비망기(備忘記)를 모은 것이다. 그는 1762년(영조 38) 안정복에게 자신이 쓴 『성호사설』의 정리를 부탁하였다. 이때 이익은 안정복에게 “이 글은 40년 전에 한가로운 생각을 부질없이 기록한 것이니 망녕된 글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간행하고 싶다면 곧바로 감정(勘定)하되 나에게 묻지 말고 모두 삭제하고 조금만 남겨 둠으로써 끝없는 시비를 모면하게 해주면 다행이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안정복은 약 3천여 개 항목의 『성호사설』을 1천 3백여 개의 항목으로 축소하여 정리하고 10권의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찬하였다.

안정복은 이익이 분류한 5개 분야의 글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들을 선정하여 천지편(天地篇) 1책, 인사편(人事篇) 2~5책, 경사편(經史篇) 4~9책, 만물편(萬物篇) 10책 상, 시문편(詩文篇) 10책 하의 총 10책으로 엮었다. 천지편에는 천문문, 지리문, 부록으로 귀신문이 있으며, 인사편에는 인사문, 논학문, 논예문, 친속문, 군신문상하(君臣門上下), 치도문1,2,3(治道門一二三), 복식문(服食門), 기용문(器用門), 기예문(器藝門)이 있다. 경사편에는 경서문1, 2, 3(經書門一二三), 논사문1,2,3,4,5(論史門一二三四五), 성현문(聖賢門), 이단문(異端門), 만물편에는 금수문(禽獸門), 초목문(草木門), 시문편에는 논문문(論文門), 논시문(論詩門)이 있다.

5 『성호사설』의 의의

성호 이익은 『곽우록(藿憂錄)』, 『성호선생문집』, 『사칠신편(四七新編)』, 『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을 비롯해 약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방대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성호사설』이다. 이 책은 단편적인 지식을 정리하는 수준이 아닌 이들 개별 지식에 범주를 부여하여 분류, 평가하는 유서학(類書學)의 저술이다. 따라서 예설(禮設), 시문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제도, 역사, 지리, 사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그의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을 통해 자신의 지적 관심을 다양한 주제로 서술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양한 학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함께 서양의 문물이나 천주교 등 사상의 수용에 개방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또한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의 각종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의 개혁의식을 표출하였다. 이러한 이익의 서술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나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과도 유사한 점이 있어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학문과 사상은 『성호사설』을 재편집한 안정복, 정약용(丁若鏞), 박제가(朴齊家) 등의 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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