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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

제자 이상적에게 준 김정희의 그림 선물

1844년(헌종 10)

세한도 대표 이미지

김정희 필 세한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세한도(歲寒圖)〉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대표작으로, 그가 1844년(헌종 10)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린 작품이다. 그림 오른쪽 윗부분에는 ‘세한도’라는 화제(畵題)와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이라는 글자와 낙관이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림의 왼쪽 부분에는 김정희가 해서체로 그림의 제작 이유를 적어놓았다. 이를 통해 〈세한도〉가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세한도의 작가, 김정희의 삶

김정희는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원춘(元春)이다. 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외에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병거사(炳居士),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과파(果坡) 등 100여 개의 호를 수시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특히 중국의 명차 가운데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의 맛을 잊지 못해 스스로 승설도인(勝雪道人)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김정희의 집안은 조선 후기 왕실의 인척으로,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사위였다. 그는 영조가 총애했던 둘째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고, 조카 김이주(金㶊柱)를 양자로 들여 가계를 잇게 하였다. 김이주는 바로 김정희의 할아버지이다.

김정희는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친아버지를 떠나 월성위 집안의 장손으로 예법과 학문을 익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북학파 박제가(朴齊家)의 제자가 되어 학문적 기초를 닦았다. 24세 때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에 가는 아버지를 수행하여 고증학과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정희는 1819년(순조 1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순조는 사악(賜樂, 임금이 신하에게 음악을 내려 줌)뿐 아니라 월성위(月城尉)의 봉사손이 등과했음을 기뻐하며 공주의 묘(廟)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이후 김정희는 규장각 대교를 거쳐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 검상 ,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등 주요 관직을 거쳤다. 그러다가 55세 되던 1840년(헌종 6)에 동지부사가 되어 청에 갈 기회를 가졌으나 윤상도(尹商度) 옥사에 휘말려 1848년(헌종 14)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66세인 1851년(철종 2)에는 김정희와 가까이 지내던 권돈인(權敦仁)이 철종의 증조인 경의군(敬義君)을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그 위패를 종묘의 본전(本殿)에서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기는 조천례(祧遷禮)를 논하다가 파직당하고 유배되었다. 이때 김정희 또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2년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난 김정희는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과천에 기거하며 학문에 몰두하다 1856년(철종 7)에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완성하였고, 또 화론(畵論)에 밝았으며,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금석학과 관련해서는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곁 비봉(碑峯) 위에 비석이 김정희에 의해 신라 진흥왕순수비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문집으로는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 『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 『완당선생집』이 있다.

3 세한도의 구성

〈세한도〉는 화제(畵題), 도인(圖印), 그림 및 제문(題文)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림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화제를 크게 썼으며, 작은 글씨로 ‘우선시상 완당(藕船是賞阮堂)’이라 쓰고 낙관을 찍었다. 그림 좌우 아래에는 ‘正喜(정희)’와 ‘阮堂(완당)’이라는 도인을 찍었다. 수묵화의 경우 먹선과 먹의 농담, 여백의 아름다움이 중요한 요소였다.

〈세한도〉의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 단순하기 그지없다. 물기를 뺀 붓으로 한 채의 초가집이 덩그러니 그려져 있다. 지붕이나 벽면은 단순하게 선으로 묘사하였고, 둥근 창 하나만을 그렸을 뿐이다. 집의 오른쪽으로는 가까이 붙어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고, 왼쪽에는 잣나무 두 그루가 대칭을 이루며 성글게 그려져 있다. 두 그루의 나무가 기대고 있는 듯한 형상을 통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공생(共生)을 연상할 수 있다. 또한 세필법(細筆法)으로 처리한 노송의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가지 끝 부분은 생동감과 공간감을 확보하는 구성을 보이고 있다. 집과 배경은 대담하게 생략하는 대신 소나무와 잣나무를 통해 지조의 상징만을 요점적으로 나타냈다. 〈세한도〉라는 제목처럼 집 한 채와 고목에서 풍기는 스산하고 적막한 겨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림 자체의 기교보다는 김정희 내면의 정취와 심경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김정희가 직접 쓴 발문이 있다. 장문의 발문을 통해 세한도의 제작 동기와 이념을 알 수 있으며, 그림과 김정희 특유의 서체가 어우러져 작품의 격을 높이고 있다.

이처럼 〈세한도〉는 화제(畵題), 도인(圖印), 그림 및 제문(題文)이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구분되기보다 한 개의 작품처럼 어우러져 있다.

4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

〈세한도〉라는 제목은 말 그대로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다. 외적으로 한겨울의 추위를 담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외딴 제주도에 유배된 채 처연히 생활하고 있는 김정희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제목 끝에는 세로로 ‘우선시상’이라 썼는데 해석하면 “우선(藕船)이 보게”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우선에게 이 그림을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선은 한어역관(漢語譯官) 집안 출신의 중인인 이상적의 호이다. 그는 김정희의 제자로, 스승보다 18세 연하이다.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준 이유는 그림의 왼쪽에 있는 김정희가 쓴 발문(跋文)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발문에 따르면, 이상적은 제주에 유배되어 있는 김정희에게 두 차례에 걸쳐 청대 학자의 서적들을 보내주었다. 먼저 청대 학자이자 서예가인 계복(桂馥)이 쓴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橒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를 보내주었다. 『만학집』은 8권으로 이루어져 판각된 책으로, 김정희와 교류했던 옹방강(翁方綱)이 책명을 쓰고, 완원(阮元)이 서문을 지었다고 한다. 다음해에는 하장령(賀長齡)이 편집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김정희에게 보내 주었다.

이런 책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적이 역관으로 여러 차례 중국을 여행하고 청대 저명한 문인과 교유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정희는 구해서 가져오기도 힘든 책을 이상적이 권세와 이익이 있는 곳에 주지 않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한 자신에게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였다. 그는 사마천이 “권세나 이익만을 좇은 사람들은 그 효력이 끝나면 교류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음에도 유배 온 자신에게 이상적이 여전히 많은 책을 구해주고 위로하는 모습에서 “사마천의 말이 틀렸다는 것인가”라며 반문하였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답례로 제자인 1844년(헌종 10)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김정희는 〈세한도〉에서 변치 않는 마음을 보여준 이상적을 주인공으로 하였다. 『논어』에 나오는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라는 구절을 빌어서 이상적의 인품을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와 신의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아울러 김정희는 발문에서 사마천이 처한 궁형(宮刑)을 언급하며, 자신의 유배가 억울하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세한도〉 속에 표현된 김정희의 외로움과 적막함, 이상적에게 보내는 고마움 등의 묘사 외에 세상의 인심에 대한 울분, 실망 등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에게 〈세한도〉를 선물 받은 이상적은 그림의 끝에 닥종이를 이어 붙여서 이듬해인 1845년(헌종 11) 1월 청으로 갔다. 청 문인인 오찬(吳贊)의 집에서 그를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자, 이상적은 연회에 참여한 장악진(章岳鎭), 반희보(潘希甫), 조진조(趙振祚), 반증위(潘曾瑋), 장요손(張曜孫) 등 16명에게 〈세한도〉를 보이고 이어 붙인 닥종이에 그들의 찬시(讚詩)를 받았다.

5 세한도가 다시 국내에 들어오게 된 내력

〈세한도〉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학문을 연구하고 많은 자료를 발굴했던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 1879~1948)가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추사 김정희 연구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정희에 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지츠카 치카시가 일본으로 귀국하자 소전 손재형(素荃 孫在馨, 1903∼1981)이 일본으로 거금을 들고 가서 석 달이 넘게 팔기를 설득하였다. 이때 후지츠카는 손재형이 매일 세한도를 돌려달라고 청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후지츠카는 ‘조선의 유물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에게 유언하여 자신이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던 추사 친필 글씨 26점, 관련 서화류 70여점 등 1만 여점을 과천시에 기증하였다.

〈세한도〉는 1974년에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세한도〉는 기교와 형식에 치우치기보다는 김정희 자신의 정신세계를 회화로 표현한 서화 일치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한도〉가 갖고 있는 함축적 표현은 매우 정갈하면서도 공허한 느낌을 주기도 하여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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