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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임금님께 이르는 문, 도성의 남문

1395년(태조 4)

숭례문 대표 이미지

숭례문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숭례문(崇禮門)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시대 도성의 남문으로 남대문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이다.

2 조선의 수도 건설과 도성의 문(門)

조선 건국 이후 태조는 한양으로의 천도를 추진하였고, 1394년 10월 25일 천도를 하게 되면서 궁궐, 종묘 및 여러 관아 등을 신축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창업의 시기에, 왕위에 오른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수도를 옮길 것을 지시하였으며 왕조의 이름을 바꾸는 것보다 천도문제를 먼저 서두르는 모습을 보인다. 태조는 도성 쌓을 터를 수차례에 걸쳐 직접 둘러보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들과 누차 토론하는 등 도성 축성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렇게 정해진 도성으로서 한양의 입지는 북쪽의 백악산(342m), 동쪽의 낙산(타락산, 125m), 남쪽의 목멱산(265m), 서쪽의 인왕산(338m)의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형성하는데, 이 산들의 능선을 따라 성곽을 쌓았다. 1396년(태조 5)의 『태조실록』에는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인부들을 돌려보냈다 …… 각문(各門)의 월단 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라고 하여, 성 쌓는 일을 끝내고 성문들의 이름을 지은 일을 싣고 있다. 즉 도성의 성문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흥인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청문의 사대문(四大門)을 두고, 그 사이에 홍화문(동소문), 소덕문(서소문), 광희문(수구문), 창의문(북소문)의 사소문(四小門)을 두어 도성의 안팎을 연결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도성의 성문이란, 왕이 거주하는 왕성(王城) 및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있는 곳을 도성이라 하는데 그 성곽의 성문을 말하는 것이다. 도성 문의 방향은 역(易)사상에 입각한 주역 8괘를 사용하여 4대문과 4소문의 8개소로 설치하였다. 그러나 절대적 방위의 개념으로 정확하게 성문의 위치를 정하지는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기본적 방위를 부여한 후 자연 지세에 맞도록 문을 내었다. 한양의 지형은 대체적으로 남북방향보다 동서방향이 더 평탄하여 동서방향으로 성문이 집중된 모습을 보인다.

조선 도성의 사대문 이름에는 목금화수토(木金火水土)의 음양오행설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유교적 오덕(五德) 관념을 함께 이용하였다. 하여 동(東)-목(木)-인(仁)-흥인문, 서(西)-금(金)-의(義)-돈의문, 남(南)-화(火)-예(禮)-숭례문, 북(北)-수(水)-지(智)-숙청문(훗날 다시 홍지문이 건립됨)으로 하였으며, 중앙에 중(中)-토(土)-신(信)-보신각(普信閣)을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숭례문 건립과 중건의 역사

숭례문은 도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지은 것으로, 1962년 해체수리 시 확인된 상량일은 1396년(태조 5) 10월 6일이다. 실록의 기록에 1398년(태조 7) 2월에 도성의 남문이 완성되어 태조가 친히 왕림하여 관람하였다는 기록 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숭례문은 상량 후 16개월 뒤에 완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세종 때에 숭례문의 개축 문제가 언급된 기사 를 보면 애초에 남대문이 위치한 지세는 지금보다 낮고 평평하며 양쪽 산맥과 뚝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세종은 남대문의 지대를 높이 쌓도록 지시하여 1447년부터 약 1년 동안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때의 공사는 중건이라기보다 새로 만든 것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관련한 기록이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실려 있다. 이렇게 고쳐지은 숭례문은 건물이 기울어지는 바람에 1479(성종 10)에 다시 중건하게 된다. 이후 400여 년 간 숭례문 자체는 큰 중수 없이 내려오다가 6․25 전쟁으로 부분 파손되어 1961~1963년에 해체 수리하였다. 1962년에는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1907년에 일제에 의해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이 모두 헐리고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성곽이 헐린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이 생기면서 숭례문은 도로 사이에 고립된 형태로 남게 되었다. 결국 현대의 숭례문은 도성의 성문이라는 그 군사적, 조형적 기능을 상실한 채 도심지 조형물로서만 인식되기에 이른다. 2005년에는 숭례문 주변으로 광장을 조성하고 숭례문을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2008년 2월 10일에 방화로 인한 화재로 숭례문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소실되고 홍예문과 석축만 남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에 2010년부터 3년여에 걸쳐 복구공사가 진행되었고 2013년 4월에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에 재개장 되었다.

4 도성의 관문, 도로망의 시작, 숭례문

도성의 사대문 중 인왕산의 남쪽 기슭에서 남산의 북서쪽 기슭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숭례문이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대문이었던 숭례문은 당시 방어적 성곽의 관문으로 군사적 방어로서의 일차적 기능이 있었다. 숭례문은 성곽의 문이라는 그 군사적 기능에 충실하게 축조되었는데 화강암 석재로 6~7m의 높이로 육중하고 견고하게 육축을 쌓았을 뿐 아니라, 출입문 또한 12cm의 두꺼운 판목에 철엽을 덧씌워 내화성을 보강하는 등 외적 방어의 기능을 잘 갖추고 있다.

또한 숭례문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그러나 단순한 통로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왕이 지나고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등 국가적 의례 시 통로로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표현 또한 중층 건물로서 전국에서 가장 유능한 기술자들에 의해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과 구조로 표현되었다. 숭례문은 전체 규모 뿐 아니라 출입을 위한 홍예문도 높이가 약 7m에 통후(通厚) 약 12m로, 다른 성곽 문에 비해 큰 규모를 갖는다. 이는 숭례문이 도성의 문이기 때문인데, 임금의 행차에 따른 어도(御道)나 국가 의례 행차, 혹은 임금의 상(喪) 때 대여(大輿)가 지나갈 수 있도록 폭과 높이를 갖추어야 했다.

숭례문은 조선 도로망의 기점이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도성 내의 주요대로는 동서방향의 운종가와 종로 네거리 보신각 앞에서 남대문거리, 경복궁 정문에서 황토현(현 세종로 네거리)까지의 거리였으며, 성문을 통하여 전국으로 9개의 도로망이 구성되었다. 특히 도성 내 주요대로 끝단에 위치하고 있던 숭례문은 전국으로 뻗는 도로망의 시작이었으며 도성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5 도성의 재액을 막는 상징, 숭례문

숭례문을 비롯한 도성의 문은 나라를 대표하는 문으로 인식되어 그 상징성이 매우 컸다. 앞에서 보듯이 문의 수나 명칭에 조선의 정치이념과 사상이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라 기복의 상징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예컨대 숭례문에는 도성 입지에 대한 풍수지리적 비보(裨補)의 관념이 반영되기도 하였다. 비보란 터의 풍수적 취약점을 특정 시설물로 보완, 보충하려는 것이다. 한양의 지세를 풍수로 해석했을 때 조산인 남쪽의 관악산은 불의 산으로 화기가 매우 강하다고 보았다. 이에 남쪽의 강한 화기를 막기 위해 숭례문 바로 앞(남대문로 5가 1번지로 추정)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또 화기를 화기로 막는다는 개념으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써서 달았는데, ‘숭(崇)’자는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불이 더 잘 타오를 수 있도록 현판을 세로로 세워 관악산의 화기를 방어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 현판의 글씨를 쓴 사람은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료의 기록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유진동(柳辰同) 등의 이름이 달리 실려 있어 이설이 분분하다.

도성의 남문으로서 숭례문이 갖는 이러한 상징성은 음양을 다스려 재앙을 막는 기원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는데, 농업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가뭄이나 홍수 등의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그 인식이 더욱 잘 드러났다. 『세종실록』에는 “날이 가문다고 하여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고 저자를 옮겼다.” 라고 하였다. 또한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예조가 아뢰기를, 날씨가 가물면 남문은 닫고 북문을 열며 북 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음(陰)을 보존하고 양(陽)을 억제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가뭄 끝에 장마가 개지 않아서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으니, 전례에 따라 숙청문을 닫고 숭례문을 여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라고 하였다. 즉, 남쪽은 양(陽)과 화(火)의 방위이고 북쪽은 음(陰)과 수(水)의 방위이므로 가뭄이 심할 때는 비를 기원하는 의미로 도성의 남문인 숭례문을 닫고 북문인 숙청문을 열어두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비가 너무 내려 장마가 지면 숭례문을 열고 숙청문을 닫았다.

6 숭례문 주변의 풍경, 그리고 현재

숭례문은 2008년 화재로 문루가 소실되기 전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었으며, 도성의 남문으로서 조선의 성곽 문 중에 가장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경복궁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 즉 육조거리가 세종로 네거리에서 종루 십자가를 거쳐 숭례문에 이르는 그 길은, 궁궐에서 도성의 남문을 향하는 임금의 행차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성문 안팎으로 도성의 행랑 및 시전과 광장이 형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업의 장이 되었으며, 백성들에게 지배자의 통치행정을 알리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숭례문을 지나 서쪽으로 칠패시장이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다시 한강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청파, 용산, 한강나루가 점점이 생활권을 이루고 있었다.

숭례문을 위시한 이 길의 대강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유효하며, 도성의 남문인 숭례문을 끼고 있다 하여 현재 ‘남대문로’라고 부른다. 남대문로 주변으로 각종 대형 백화점과 남대문 시장이 들어서 유동인구가 많고, 대규모 빌딩 및 업무시설이 즐비하여 서울의 대표적인 업무지구로 꼽힐 뿐 아니라 각종 주요 은행의 본점이 몰려 있어 한국 금융의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다. 숭례문 주변은 조선시대나 현재나 수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중심경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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