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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御眞]

왕의 초상화, 근엄함을 드러내다

미상

어진 대표 이미지

조선태조어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어진은 왕의 초상화이다. 어용(御用), 왕상(王像), 어영(御影), 진용(眞容), 진(眞), 수용(晬容), 성용(聖容), 영자(影子), 영정(影幀) 등의 용어로도 불린다. 어진은 삼국시대 이래 면면히 제작되었지만,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이다. 참고로 종묘 경내 공민왕(恭愍王) 사당에 봉안된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魯國公主) 초상도 조선 건국 후에 그려진 것이다.

조선시대에 어진은 왕실 조상을 추모하는 동시에 국왕의 정통성과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제작했다. 태조에서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그려졌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얼마 없다. 일례로 태조 어진은 조선 초기부터 제작되어 수십 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점밖에 남아있지 않다.

2 현재 전해지는 어진은 얼마나 있나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태조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영조 어진, 연잉군(영조의 왕자 시절 군호) 초상, 철종 어진, 익종(효명세자의 추존 묘호, 고종 대에는 문조(文祖)로 추숭) 어진이 있다. 그리고 고종 어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비롯하여 3점이 알려져 있고, 순종 어진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고려대 박물관에 초본 두 점이 있다.

이처럼 어진이 적은 이유는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조선 전기의 어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어진은 한국전쟁기에 거의 소실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궁중 유물이 대거 부산으로 옮겨졌는데, 1954년 12월 인근 피난민 판자촌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3천여 점의 유물이 불에 탔다. 불길 속에서 구해 낸 어진은 몇 점 되지 않았고, 그 일부분은 불에 검게 그을렸다.

3 어진의 제작 과정

어진 제작은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摹寫) 등으로 나뉜다. 도사는 국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용안을 보며 그리는 것이다. 추사는 승하한 후에 생존 시의 모습을 아는 사람들의 기억에 의지해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사는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거나 추가로 그릴 경우에 기존 그림을 모본으로 하여 다시 그리는 것이다.

어진을 제작하여 봉안하는 과정은 왕실의 주요 행사였기 때문에 도감이 설치되었다. 도감의 관료들은 어진 제작 과정을 일일이 감독하였고, 국왕의 모습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구현해 내는지 지속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별도로 의궤를 작성하여 제작 과정의 전모를 기록하였다. 이 중 1735년(영조 11)에 간행된 『세조영정모사도감의궤』에는 영희전에 보관되어 있던 세조의 영정을 새로 옮겨 그려 봉안하는 과정이 담겼다. 그리고 1900년(고종 37)에 간행된 『영정모사도감의궤』는 1900년(고종 37)에 발생한 덕수궁 화재로 선원전(璿源殿)이 불에 탄 후에 그곳에 모셔져 있던 영조 등 일곱 국왕의 어진을 모사하는 작업을 기록한 것이다. 40명이 넘는 화원이 동원되었고, 9개월이 넘는 기간이 소요된 매우 큰 행사였다. 특히, 86면에 이르는 반차도에서는 대대적인 어진 봉안 행렬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어진을 제작할 때에는 화사(畵師, 畵員)의 선발이 매우 중요했다. 일반적으로는 도화서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뽑았는데, 일부 지방의 화사가 추천되거나 일종의 실기 시험을 거쳐 선발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진 제작에 참여한 화사의 수는 일반적으로 10명 내외였다. 집필화사(執筆畵師)는 임금의 얼굴[容顔]을 그렸고, 동참화사(同參畵師)는 얼굴 외의 몸체를 맡았으며, 수종화사(隨從畵師)는 물감 섞는 일을 담당했다. 이외에 장황(粧潢, 어진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족자, 두루마리 등으로 꾸미는 일)을 맡는 첩장(貼匠), 금박을 붙이는 부금장(付金匠), 바느질하는 침선노(針線奴) 등도 제작에 참여했다.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참여하는 만큼, 비단, 종이, 붓, 안료 등의 재료도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하였다.

어진 제작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초본을 그리는 것이다. 기름종이[油紙]에 밑그림을 그려 앞뒤로 채색하여 완성하면 국왕과 신하들이 살펴보며 수정할 곳은 고치도록 했다. 두 번째는 정본 과정이다. 완성된 초본을 비단 위에 옮기고[상초(上綃)], 발색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뒤쪽부터 색을 칠한다[배채(背彩)]. 그리고 앞쪽에서 세밀하게 채색하면서 마무리하는데, 흉배 등은 금을 사용하여 화려함을 더했다.

그림이 완성되면 표제(標題)를 쓰고 장황을 했다. 표제는 어진이 누구를 그린 것이고, 언제 제작한 것인지를 쓰는 것이다. 숙종대에는 표제를 조그만 쪽지에 만들어 누구의 어진인지 쓰고 붉은 쪽지를 덧붙여서 영정에 부착하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어진은 실제 모습과 얼마나 닮은 지에 따라 완성도가 결정되었다. 1773년(영조 49) 1월, 영조의 어진을 도사하는 공역이 마무리된 후 도제조 김양택(金陽澤), 당상 채제공(蔡濟恭) 등은 완성본을 걸어 두고 자신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김양택은 어진 속 용안 혈색이 실제 모습과 거의 같다고 평가한 반면, 채제공은 혈색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고 평했다. 한편, 영조는 얼굴이 화사하고 젊게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며 웃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어진을 제작한 관원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며 치하하였다.

4 어진의 보관

완성된 어진은 길일을 택해 진전(眞殿)에 모셨다. 진전은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며 선왕을 추모하는 공간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설립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여러 국왕의 어진을 봉안하고자 설치하였다. 서울에는 선왕의 어진과 선원록(璿源錄, 왕실 족보)을 봉안한 선원전을 두었고, 지방에는 경주 집경전(集慶殿), 전주 경기전(慶基殿), 평양 영숭전(永崇殿), 개성 목청전(穆淸殿), 영흥 준원전(濬源殿) 등을 건립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어진 대다수가 소실되었고, 진전 운영도 크게 와해되었다. 다시 어진을 그리기 시작한 때는 숙종대로, 태조와 자신의 어진을 그려 봉안하였다. 영조는 10년에 한 차례씩 어진 그리는 것을 정례화하며 10여 본의 어진을 남겼고, 이를 경희궁의 태녕전(泰寧殿), 강화도의 만녕전(萬寧殿) 등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영조·정조·순조 어진은 각기 인연이 있는 궁에 봉안되거나 송에서 천장각(天章閣)에 봉안한 예에 따라 규장각(奎章閣)에 모셔졌다.

진전 내에서 어진은 그 왕이 등극하면 궤에 넣어 안치하고 승하하면 펴서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어떻게 보관해야 의례에 적절하고 손상을 피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였다. 특히, 훼손되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살피고 장마 때에는 햇볕을 쬐게 하는 등의 방안을 마련하였다.

5 화폭에 담긴 근엄한 용안

현재 어진이 남아있는 국왕은 태조, 영조, 철종, 익종, 고종, 순종으로, 각각의 어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태조 어진 속 태조는 붉은 용상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익선관을 썼으며, 어깨와 가슴에는 용을 새긴 파란 용포를 입고 있다. 이는 1872년(고종 9)에 조중묵(趙重黙)이 낡은 원본을 가로 150cm, 세로 218cm의 비단에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영조의 경우는 연잉군 시절의 초상과 국왕 즉위 이후의 어진이 함께 전해진다. 연잉군 초상은 21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금 앳되지만, 왕자의 점잖은 풍모가 있다. 그는 사모(紗帽)를 썼고, 흉배를 부착한 녹색 단령포를 입었으며, 호랑이 가죽을 깐 의자에 앉아 있다. 어진의 오른쪽 일부가 불에 탔지만, 얼굴 모습은 거의 보존되었다. 그리고 영조 어진은 반신좌상으로, 익선관을 쓰고 붉은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다. 이는 1900년(고종 37)에 모사한 것으로, 앞서 〈영정모사도감의궤〉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물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당대의 초상화 제작이 매우 정교했음을 보여준다.

철종 어진은 1861년(철종 12)에 이한철李漢喆), 조중묵 등이 도사한 것이다. 31세 때의 초상으로, 오른쪽 위에 ‘내 나이 31세 초상[予三十一歲眞]’이라는 철종의 친필 표제가 있다. 군복을 입고 있는 유일한 어진이기도 하다. 어진의 왼쪽 상당 부분이 불에 타 버렸음에도 가죽으로 만든 칼집과 그 장식, 무관의 지휘봉인 등채[藤策, 藤鞭], 화려한 깃털이 달린 전립 등이 매우 화려하다.

익종[문조] 어진은 반 이상이 소실되어 얼굴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진의 오른쪽 윗 부분에 쓰인 ‘익종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십팔세어진(翼宗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十八歲御眞)’이라는 표제를 통해 익종이 18세였던 1826년(순조 26)에 그려졌음이 확인된다. 그 바로 왼편에 ‘문조익황제어진(文祖翼皇帝御眞)’이라고 써진 빨간 표제는 대한제국기에 황제로 추숭한 뒤에 붙여졌다. 면복(冕服)과 면류관(冕旒冠)을 착용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고종 어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기준)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변경한 후 황제가 된 후의 모습을 그렸다. 고종은 익선관을 쓰고 황색 곤룡포를 입었으며 용상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특별히 표제가 써져 있지는 않지만, 사진으로 전하는 고종의 얼굴과 같다. 어진 속 차고 있는 호패에 ‘임자생 갑자등극(壬子生甲子登極)’이라고 되어 있어 1852년 출생, 1863년 즉위 사실과도 일치한다. 이 어진은 채용신(蔡龍臣)이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순종 어진은 남아있는 것이 완성본이 아닌 초본이다. 완성본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기름종이[油紙]에 그려진 초본만 남아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은 1909년 무렵 김은호(金殷鎬)가 일본인이 촬영한 사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오른쪽 하단에 계해년(1923년)에 그려졌다고 쓰여 있다. 얼굴 부분만 정확하게 표현되었고, 나머지 복식 부분은 먹선으로만 그려져 있다.

6 어진의 가치

어진은 왕의 초상화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았고, 국왕 그 자체로 간주하였다. 즉, 국왕과 같은 존재였다. 그리하여 어진의 제작과 봉안은 매우 중요한 왕실 행사였고, 매우 까다로운 의례가 뒤따랐다. 진전에 불이 나면 왕실에서는 소복을 갖춰 입고 사흘 동안 곡을 하였다. 이러한 어진은 당대 최고의 화원만이 그릴 수 있었으며, 진전에 봉안할 때에도 상당히 엄숙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는 조종(祖宗)이 영구하기를 꾀하며 왕실을 번영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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