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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 정약용, 조선 후기의 지식을 망라하다

1934년

여유당전서 대표 이미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e뮤지엄(국립민속박물관)

1 개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저술을 정리한 문집이다. 정약용(1762~1836)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여유당은 저자인 정약용의 당호(堂號)이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 사랑채에 여유당 현판이 걸려 있다. 『여유당전서』는 정약용이 생전에 집필한 『목민심서(牧民心書)』와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걸작이 포함되어 있는 문집으로, 활자본 기준으로 154권 76책으로 간행되었다. 여기에는 정약용이 구상한 조선후기 국가체제부터 시와 문장, 의서, 과학서 등이 수록되어 있어 정약용의 사상은 물론 조선 후기 사회상까지 파악할 수 있다.

2 조선 최고의 대학자, 정약용의 저술을 5년에 걸쳐 편찬하다

『여유당전서』는 5년이나 되는 기간을 거쳐 간행이 완료되었다. 1934년 9월 『동아일보(東亞日報)』에서는 “동양의 대석학(大碩學)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작 수백 권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선생 후손의 승낙을 받고 조선학(朝鮮學) 권위자들의 교열을 받아 출판 사업을 시작하였다.”라고 하며 대대적으로 출판을 홍보하였다. 이 당시에 이미 『여유당전서』의 출판을 조선 출판계의 금자탑으로 인정할 정도로 주목하였다.

결국, 5년이 지난 1938년 10월에 완성되었다. 1938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서는 “5년 전에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의 간행을 착수한 이래, 총 400부의 76책이 완간되어 10월 27일에 책의 배달을 마쳤다.”라고 하였다. 신조선사 사장인 권태휘(權泰彙)가 발행의 총 책임자가 되었고 정약용의 외현손(外玄孫)인 김성진(金誠鎭)이 편찬자가 되었다. 여기에 당대 조선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위당(韋堂) 정인보(鄭寅普)와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이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여유당전서』는 조선학을 대표하는 저술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여유당전서』의 간행은 당대 유명인사이던 윤치호(尹致昊), 공성학(孔聖學), 김사정(金思定)이 원조하였다.

『여유당전서』를 간행한 목적은 조선후기 대학자인 정약용의 저술과 학문적 업적을 후대에 남기기 위함이었다. 『여유당전서』가 간행되기 이전인 1925년에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라고 불리는 수재(水災)가 발생했다. 이때 정약용의 생가가 침수되고 필사본이 유실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따라 정약용의 저술을 보존하고 세상에 배포하고자 『여유당전서』를 간행하였다.

이전 1883년(고종 20)에 고종은 정약용 사후 50년을 기념하여 『여유당집(與猶堂集)』을 필사하여 보관하라는 명을 내렸었다. 그러나 그 필사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술이었던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심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이담속찬(耳談續纂)』, 『강역고(疆域考)』, 『마과회통(麻科會通)』 등은 별도로 간행되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정약용의 저작을 하나로 편찬한 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생가에 보존되어 있던 정약용의 시문과 여러 저서가 홍수로 유실될 수도 있는 위기를 겪고 나자 이를 모아 후대에 전하고자 정약용의 문집을 간행하였고, 그것이 바로 『여유당전서』이다. 이는 정약용 사후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정리된 측면도 있었다.

1938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는 이후 2종의 영인본이 존재한다. 하나는 1962년 문헌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정다산전서(鄭茶山全書)』이며, 또 하나는 1970년 경인문화사에서 간행한 『정다산전서』이다. 1962년본에는 다산연보(茶山年譜)가 첨부되어 정약용의 생애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1970년대본에는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의 형태로 5편의 글이 추가되어 있어 1938년본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정약용의 글을 볼 수 있다.

3 문학, 경학, 예악, 정치, 지리, 의학 등을 망라하다

『여유당전서』는 내용에 따라 7개로 분류하여 간행하였다.

우선 제1집은 시문집(詩文集)과 잡찬집(雜纂集)이다. 25권 12책으로 되어 있는데, 정약용이 지은 시와 문장이 망라되어 있다. 여기에는 정약용이 14살 때 지었다고 알려진 회동악(懷東嶽)부터 노년기에 저술한 시까지 수록되었다. 모두 1,312수가 기록되었는데, 대부분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시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정약용이 국왕에게 올린 각종 문서나 글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책문(冊文)과 의소(議疏)라는 이름으로 당대 국가 시책에 관해 진언하였다. 또한 설(說)과 논(論), 변(辯)에는 다양한 과학적, 역사적 내용의 학술적인 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도 정약용이 생전에 여러 선생이나 제자, 지인들과 주고받은 수십 편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어 정약용의 사상적 기반과 현실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제2집은 경집(經集)이다. 48권 24책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유교 경전과 관련된 정약용의 이해가 주로 수록되어 있다.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등 삼경(三經)을 정약용이 직접 정리한 자신만의 해설도 수록하였다. 조선시대 유교 경전은 주로 주자(朱子)가 정리한 주석을 정통으로 여겼기 때문에 ‘주자성리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약용은 주자의 주석뿐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의 주석도 함께 수록하여 유교 경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보여준다. 특히,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는 『논어』에 대한 주석을 총정리하고, 본인의 새로운 견해를 밝혀서 매우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제3집은 예집(禮集)이다. 24권 12책으로 되어 있는데, 정약용이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을 모아두었다. 여기에는 『상례사전(喪禮四箋)』과 『상례외편(喪禮外篇)』, 『제례고정(祭禮考定)』, 『예의문답(禮疑問答)』 등의 저술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예집은 관혼상제 가운데 상례(喪禮)가 다른 의례보다 높은 비중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서양에서 새롭게 유입된 서교(西敎), 즉 천주교(天主敎)에서 상례를 경시하는 풍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상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의도적으로 서술 비중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제4집은 악집(樂集)이다. 4권 2책으로 되어 있는데, 음악과 관련된 저술을 모아둔 것이다. 여기에는 음악과 관련된 『악서고존(樂書孤存)』 4편이 수록되어 있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사라진 악서(樂書)를 복구하기 위해 여러 경전에 흩어진 음악에 대한 글을 모아둔 것이다. 음악보다는 음학(音學)에 가까운 음악이론서이다.

제5집은 정법집(政法集)이다. 39권 19책으로 되어 있는데, 정약용이 생각한 정치와 법률에 관한 여러 저술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정약용의 대표저술로서 일표이서(一表二書)라고 칭해지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여기 수록되어 있다. 이 책들은 정약용의 현실 개혁과 정치관에 대한 뛰어난 견해를 볼 수 있는 저술이다. 『경세유표』는 1817년 저작된 것으로 『주례(周禮)』를 본 따 국가 제도를 논하며 이상향을 담았다. 여기에는 형전(刑典)인 추관(秋官)과 공전(工典)인 동관(冬官)을 제외하고 이전(吏典)인 천관(天官), 호전(戶典)인 지관(地官), 예전(禮典)인 춘관(春官), 병전(兵典)인 하관(夏官)을 갖추었다. 형식은 『주례』를 따랐지만, 현실 개혁의 의도를 담아 당대 조선의 사정에 맞는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의 도리를 담아서 12편으로 기술하였다. 각 편마다 6개의 항을 구성하여 모두 72항으로 지방관에게 요구하는 강령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흠흠신서』는 1819년 저작된 것으로, 목민관의 주요한 업무인 형정(刑政)에 관해 자세히 서술하였다.

제6집은 지리집(地理集)이다. 8권 4책으로 되어 있는데, 지리학에 관한 정약용의 저술인 『강역고(疆域考)』와 『대동수경(大東水經)』이 포함되어 있다. 『강역고』에는 고조선(古朝鮮)부터 한사군(漢四郡), 삼한(三韓) 등 우리나라 고대 역사와 그 영토를 여러 문헌을 고증하여 기록하였다. 『대동수경』에는 우리나라의 역대 물길을 기록하고 있는데 임진강(臨津江) 이북의 물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제7집은 의학집(醫學集)이다. 6권 3책으로 되어 있는데, 의학, 의술과 관련된 저술인 『마과회통(麻科會通)』 등이 수록되어 있다. 『마과회통』은 마진(痲疹) 즉, 홍역에 대한 증세와 치료법 등을 기술한 서적이다. 정약용 스스로 일곱 번이나 고쳐서 썼다고 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저서이다.

4 『여유당전서』의 자료적 가치와 편집상의 한계

『여유당전서』는 다산 정약용의 필생의 학문이 모두 수록되어 있는 방대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상의 정수인 유가 경전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국가 정책과 사회경제적 시책을 담은 여러 저술은 물론, 과학과 의학, 역사를 아우르는 현실적인 지식까지 망라되어 있다. 정약용의 저술은 정약용 자신의 학문적 성과이기도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는 수많은 학자들의 견해도 함께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당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역사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육경사서(六經四書)”로 일컬어지는 경집의 글과 “일표이서”라고 칭해지는 정법집의 저술은 후학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저작이다.

『여유당전서』는 체계적이고 치밀한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편집과 간행에 대한 몇 가지 아쉬움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여유당전서』는 1934년 정인보 등 조선학 전문가의 교열을 거치긴 하였지만, 저자인 정약용의 구상이 모두 반영되지는 못한 한계가 있다.

첫째, 정약용이 구상한 문집의 편찬 체계가 반영되지 못했다. 정약용은 문집의 편찬 체계를 경집, 시문집, 잡찬집(雜纂集)의 순서로 구상했는데, 『여유당전서』는 시문집, 경집, 예집, 악집, 정법집, 지리집, 의학집의 순서로 편집했다. 사실 정약용은 일반적인 문집의 편찬순서인 『주자대전(朱子大全)』의 방식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더욱이 경집에서 정약용은 『시경』과 『서경』, 『역경』 등 육경(六經)을 우선시하고, 『대학』, 『논어』 등 사서(四書)를 뒤에 배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유당전서』는 정통적으로 중요시되었던 『대학』과 『논어』 등 사서를 전면에 배치하여, 육경을 사서보다 우선시하였던 정약용의 본래 의도를 드러내지 못했다.

둘째, 정약용은 자신의 저술에 참여하여 기여한 여러 제자의 실적에 관해 소개하고자 했지만, 『여유당전서』에는 그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

셋째, 정약용의 의도와 상관없이 부분적으로 혹은 저술 전체가 삭제된 부분도 있었다.

이처럼 『여유당전서』는 편집과 간행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홍수로 유실될 뻔한 정약용의 방대한 저술을 76책에 걸쳐 수록해 놓은 것만으로도 『여유당전서』가 가진 역사적, 자료적 중요성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다산 정약용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이 그대로 후학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 자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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