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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조선시대 야사(野史)의 집대성

미상

연려실기술 대표 이미지

연려실기술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연려실기술』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저술한 조선시대 역사서이다. 아버지 이광사(李匡師)가 책 이름을 휘호하였다. 형식은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야사류의 기록을 중심으로 편찬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총 500권 이상의 저서가 인용되었으며, 술이부작(述而不作, 기술할 뿐 창작하지 않는다)의 원칙으로 서술되었다. 책은 크게 태조부터 현종까지의 사건을 엮은 ‘원집(原集)’, 이긍익의 생존 시기인 숙종대의 사건을 서술한 ‘속집(續集)’, 조선시대 관직, 제도, 천문지리 등을 편목으로 나누어 서술한 ‘별집(別集)’으로 구성되었다. 여러 종류의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으며, 개인이 저술한 저서 가운데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2 어릴 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이긍익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은 1736년(영조 12)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장경(長卿)이며, 호는 연려실(燃藜室)이다. 이긍익의 집안은 조부인 이진검(李眞儉) 때부터 신임사화(辛壬士禍), 이인좌(李麟佐)의 난등에 연루되었으며, 그의 나이 20세 때에는 아버지 이광사가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로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집안이 붕당 간 권력다툼에 희생되어 정치적 진출이나 사회활동에 어려움이 있자, 이긍익은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을 야인으로 생활하였다. 전 5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인 『연려실기술』은 그의 평생의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이긍익이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을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이긍익은 출세를 포기하고 초야에 머물면서 어릴 적 13살 때 꾸었던 꿈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다. 왕이 자신에게 시를 짓게 하였고. 완성하지 못한 시의 구절을 왕이 ‘임금 모시는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네’로 완성해 주는 내용이었다. 그 꿈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 이광사는 어전에서 붓을 가질 징조라고 하면서 역사를 편찬하는 사관이 될 꿈이라고 해몽하였다. 훗날 이긍익 스스로 “어릴 적 꿈이 현실로 이루어져 『연려실기술』을 편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3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으로 서술된 『연려실기술』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의례(義例)에서 편찬 목적을 밝히고 있다. 우선 그는 조직적인 체계를 가진 역사서의 서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긍익은 당시 조선시대 야사를 대표할 수 있는 『대동야승(大東野乘)』, 『소대수언(昭代粹言)』 같은 저술의 단점을 지적하였다. 두 책의 경우 여러 사람이 지은 책을 모으기만 했기 때문에 체제가 산만하고 중복된 내용이 많아 읽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충분한 자료 수집을 요구하였다. 이긍익은 편년체로 역사서를 썼더라도 자료 수집을 하지 않은 채 졸속으로 책을 만들게 되면 자세한 부분은 자세하고 소략한 부분은 소략하여 역사서의 균형감이 떨어진다고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객관적인 사실(史實)을 중심으로 책이 서술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긍익은 당시의 역사서들이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문집에 있는 역사 인물에 관한 논평을 많이 실었기 때문에 주관이 많이 개입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당대 야사류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들이 가진 단점을 극복, 보완하기 위해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기사본말체의 형식을 추구하였다. 그가 추구한 기사본말체는 기전체와 편년체의 단점을 보완한 것으로 역사를 시대순으로 구성하되, 사건의 시말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이긍익은 기사본말의 형식으로 서술하여 후대의 사람이 추가로 자료를 보충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의 편찬을 위해 500여 권이 넘는 책들을 읽고 그 곳에서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하였다. 자신이 쓴 기사 밑에는 오늘날 참고문헌을 쓰듯이 인용한 책 이름을 첨부하였다. 아울러 과거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지 않고 술이부작의 원칙에 입각하여 객관적 사실만을 서술하였다. 『연려실기술』을 저술할 당시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친구의 권유에 이긍익은 “이 책은 온 세상에 전하여 사람들의 귀나 눈에 익은 이야기들을 모아 분류대로 편집한 것이지 나의 사견으로 논평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데서 역사서 서술에 객관적 자세를 지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4 왕대별 주요 사건을 서술한 원집(原集)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원집, 속집, 별집으로 구성되었다. 원집은 태조부터 현종까지 왕대별로 일어난 주요 사건들을 서술하였다. 여기에서는 편년체 형태를 띠면서 각 왕대에 발생했던 중요한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려고 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서술된 왕대별 주요 사건을 보면, 태조대의 경우 조선왕실의 세계를 비롯하여 조선 건국과 한양천도, 고려 왕씨(王氏)의 유배, 왕자의 난, 태조의 함흥 주필(咸興駐蹕) 등의 사건에 대해 서술하였다. 태종대의 주요사건으로는 민무구(閔無咎) 옥사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위가 서술되었으며, 세종대에는 집현전 설치, 강상인(姜尙仁) 옥사, 임군례(任君禮) 옥사, 왜(倭)와 야인(野人) 토벌, 4군6진(四郡六鎭)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단종대에는 세조의 계유정난(癸酉靖難), 이징옥(李澄玉)의 난, 단종 복위 모의, 금성대군(錦城大君) 옥사가 기술되었고, 세조대는 이시애(李施愛)의 난, 성종대는 폐비 윤씨 사건이 서술되었다. 연산군대는 폐비 윤씨의 복위,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서술되었으며, 중종대에는 신씨(愼氏) 폐위와 복위,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光輔) 옥사, 유자광(柳子光)의 죽음, 삼포왜변(三浦倭變),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서술되었다.

선조대에는 선조의 대통(大統) 계승을 비롯하여 덕흥군(德興君)의 추존(追遵), 정여립(鄭汝立) 옥사(獄事), 길운절(吉雲節) 옥사, 임진왜란 전란의 양상과 승전, 의병 등과 관련된 내용들이 서술되었다. 광해군 대에는 임해군(臨海君) 옥사, 공빈(恭嬪) 추숭(追崇), 박응서(朴應犀) 옥사, 인목대비 폐모와 서궁(西宮) 유폐, 심하(深河) 전쟁 등이 서술되었고, 인조대에는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 심기원(沈器遠) 옥사, 강빈(姜嬪)옥사 등이 서술되었다.

원집에는 이러한 주요 사건 외에도 묘정 배향(廟庭配享)을 비롯하여 각 왕대마다 그 시대에 활동했던 주요 인사들을 상신(相臣), 문형(文衡), 명신(名臣) 등으로 분류하여 말미에 서술하였다.

5 숙종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속집(續集)

속집에서는 저자가 생존했던 숙종 당대의 사실을 기록하였다. 원집에서 기사마다 인용된 전거자료를 제시한 것과 달리 속집에서는 일일이 밝히지 않았다. 또한 원집에는 각 왕대 앞에 왕과 왕비의 인적사항, 왕의 이력 등이 서술되고 말미에 당시 주요 인사들의 명단이 서술된 반면, 속집에서는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숙종대의 경우 정치적으로 붕당이 격화된 시기이므로 『연려실기술』의 서술 또한 정치적 사건에 집중되었다. 이긍익은 이 시기의 각 사건들을 시대순으로 배열하였다. 구체적으로는 현종(顯宗) 상사(喪事)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 논의, 정사년 증광시(增廣試)의 시제(試題) 사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의 분당, 허견(許堅)이 첩의 언니를 구타하고, 윤휴가 소나무를 베는 등에 대한 남구만(南九萬)의 소, 허목(許穆)의 허적(許積) 공격, 승려 처경(處瓊)의 옥사 등을 서술하였다.

경신대출척 후 남인에 대한 처형과정과 서인 내부의 노론과 서론으로의 분열, 인현왕후 폐비문제를 둘러싼 노·소론의 대립과 이에 대한 남인의 입장과 자세, 왕세자인 경종 보호를 둘러싼 분쟁이 서술되었다. 구체적인 항목으로는 경신년 대출척(大黜陟)과 허견(許堅)의 옥사, 윤휴 사사,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의 옥사, 원자(元子) 경종 탄생 및 정호(定號), 노이익(盧以益)의 상소문, 언문 편지와 환약(丸藥)의 옥사, 요승 여환(呂還)의 옥사, 세자의 청정(聽政) 등이 있다. 이처럼 속집의 서술은 주로 남인 정권 하에 일어난 남인과 서인의 대립 상황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덧붙였다.

6 별집(別集)의 구성

별집에는 국조(國朝), 사전(祀典), 사대(事大), 관직, 정교(政敎), 문예, 천문, 지리, 변어(邊圉), 역대(歷代) 등을 전고(典故)라는 제목을 붙여 분야별로 편찬하였다. 여기서 전고는 고사(故事)를 의미한다. 이긍익이 별집을 마련한 목적은 조선의 예악·형정·법제 등의 변화 뿐 아니라 관직의 연혁이나 변방의 일의 경우 『연려실기술』이 편년체 서술이 아니므로 연월의 차례로 기재할 수 없기 때문에 별도로 수록하여 ‘전고별집(典故別集)’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쉽게 찾아서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조전고(國朝典故)에는 연표(年表), 묘호(廟號)와 시호(諡號), 휘피(諱避), 비빈(妃嬪), 왕세자, 공주(公主)·부마(駙馬), 종실(宗室), 외척(外戚) 등이 서술되어 있으며, 사전전고(祀典典故)에는 국상(國喪) 및 복제(服制), 산릉(山陵), 원(園)·묘(墓)·궁(宮)·묘(廟), 묘정 배향(廟庭配享), 상례와 제례 등의 서술이 있다. 사대전고(事大典故)에는 중국 조정[皇朝]의 상사(喪事), 조사(詔使), 빈사(儐使), 공헌(貢獻), 주전(奏箋), 사신(使臣), 역관(譯官) 등이, 관직전고(官職典故)에는 기사(耆社), 의정부, 비변사, 육조, 사헌부, 사간원 등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주요 관사의 연혁을 서술하였다.

정교전고(政敎典故)에는 전제(田制), 제언, 조세, 공물, 조운, 창고, 화폐, 진휼, 호적 및 호패, 병제(兵制), 강무(講武), 양역(良役), 균역(均役), 서얼 금고(庶孼禁錮), 개가 금지, 형옥(刑獄), 금령(禁令), 도량형, 제택(第宅), 노비, 창기(娼妓) 등 국가 운영 전반의 제도와 신분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문예전고(文藝典故)에는 국조의 유현(儒賢)과 유일(遺逸)을 각 왕조별로 자세하게 붙였으며, 화가, 족보(族譜, 주자(鑄字)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한 각종 서적을 예서류(禮書類), 문집, 야사류, 병서류(兵書類), 역가류(譯家類)로 분류하여 서술하였다.

천문전고(天文典故)에는 역법(曆法), 첨성(瞻星), 기후, 재변 등을, 지리전고에는 도성, 궁궐, 주군(州郡), 산천, 온천 등이 서술되었다. 변어전고(邊圉典故)에서는 성지(城池), 관방(關防), 산성(山城), 봉수, 강도(江都), 제도(諸島), 황당선(荒唐船) 등을 서술하였다. 역대전고(歷代典故)에서는 고조선, 예맥, 삼한, 삼국, 후백제, 태봉, 발해 등 상고사에 대한 서술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처럼 별집은 문화, 제도, 역사 전반을 항목별로 나누어 통시대적으로 기술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원집과 속집이 각 왕별로 사건을 기술한 정치사가 주요 내용으로 조선왕조에 국한한 서술이라면, 별집은 그 시기를 상고사까지 확대시켜 조선의 법제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7 조선시대 대표적인 역사서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은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던 기사본말체의 형식을 사용하여 독자적인 역사 서술 체제를 이루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데 주력하여 각 사건의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역사 서술에서 이긍익은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없이 자신의 서술에 대한 전거를 반드시 밝혀 역사 서술의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즉 술이부작을 원칙으로 내세우며, 철저한 문헌 고증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바라보고자 하였다. 더불어 역사 뿐 아니라 별집을 통해 조선시대 법제, 문화, 사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당시 사회문화의 모순점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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