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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정조, 삼강오륜의 보급을 확대하다

1797년(정조 21)

오륜행실도 대표 이미지

오륜행실도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다. 특히, 전국의 백성들에게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이념을 보급하고자 했다. 삼강은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으로,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어린이, 친구 간의 인간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실천덕목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삼강오륜의 실천이 민간 풍속을 교화하는 최선책으로 보았다.

삼강오륜의 윤리를 널리 확산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관련 서적의 보급이었다. 이에 따라 삼강오륜을 과거의 여러 인물이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글로 기록하고[行實], 그 내용의 일부를 그림으로 표현하여[圖] 결합시킨 행실도(行實圖)의 편찬이 이어졌다.

우선 1434년(세종 16)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삼강행실도』를 통한 교육과 포상 규정이 있는데, 이는 행실도를 통한 백성 교화가 국가의 기본 정책으로 자리 잡아 가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행실도의 편찬은 이어졌다. 1481년(성종 12)에는 『삼강행실도』의 언해본, 즉 한글로 작성한 판본이 간행되었다. 1514년(중종 9)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1518년(중종 13)에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1617년(광해군 9)에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가 편찬·간행되었다.

1797년(정조 21)에 편찬된 『오륜행실도』는 기존에 간행되었던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합본이다. 즉, 삼강오륜의 윤리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이전과 같이 그림과 문자를 같이 활용함으로써 누구나 오륜 윤리를 체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국문으로 설명하여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하였으며, 시를 읊어놓아 읽는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였다.

2 『오륜행실도』의 편찬 배경

정조는 24년의 재위 기간 동안 150여 종(약 4천 권)에 달하는 문헌을 편찬, 간행하였다. 집권 후반기인 1790년대에는 서적 간행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1797년(정조 21)에는 『오륜행실도』를 비롯한 교화서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정조가 기존 행실도 서적을 보완하겠다는 뜻을 밝힌 시기는 1795년(정조 19) 화성(華城)에서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회갑을 치른 후이다. 그는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가 유포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뒤섞인 곳이 점점 많아졌고, 본래부터 잘못되어 있던 곳을 편찬자들이 애초에 살피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하나하나 꼼꼼하게 조사하여 바로잡은 수정판의 편찬을 심상규(沈象奎), 이병모(李秉模) 등에게 명하였다.

그는 또한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가 백성을 감화시키고 풍속을 좋게 하는 근본이 될 뿐 아니라 향음례(鄕飮禮)를 설행하는 데에도 표준이 될 것으로 여겼다. 향음례(향음주례)는 향촌의 선비들이 향교나 서원에 모여 학식과 연륜이 높은 사람을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면서 잔치를 여는 의례였다.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 단위로 향음례를 개최하며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 우애, 이웃 간 화목 등을 권장하였는데, 정조는 향음례 시행에 지침이 될 만한 문헌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 『오륜행실도』와 함께 『소학(小學)』, 『향례합편(鄕禮合編)』 등의 문헌이 간행되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정조는 백성이 『소학집주』와 『오륜행실도』를 배워 유학의 기본 덕목을 익히고, 이 두 책을 충분히 학습한 후에 『향례합편』을 배우도록 하였다. 정조는 당대의 풍속을 일신하고 백성 모두가 삼강오륜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소학』, 『오륜행실도』, 『향례합편』 등으로 이어지는 학습 과정을 마련하였다.

3 『오륜행실도』의 체재와 내용

정조는 1797년의 새해 첫날에 『소학』, 『향례합편』과 함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5권 4책)를 편찬하도록 했고, 같은 해 7월에 인쇄·반포하였다. 『오륜행실도』의 편찬이 기존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의 오류를 바로잡고 재정리하는 선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금 빨리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미 상당히 많은 도서를 편찬했던 규장각 각신들의 경험이 효과적으로 작동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오륜행실도』의 체재와 내용은 기존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오륜의 행실이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은 후 전기(傳記) 형식으로 편찬하는 방식도 동일하다. 앞에 그림이 있고, 뒤에 한문과 국문으로 된 설명이 있다. 그리고 관련 시(詩)와 그를 찬양하는 찬(贊)이 있다. 수록된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인이고,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효자 4인, 충신 6인, 열녀 5인뿐이다. 각 권의 내용과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총 5권 중 권1은 효자도(孝子圖)이다. 민손단의(閔損單衣), 자로부미(子路負米), 고어도곡(皐魚道哭) 등의 제목으로 모두 33명의 효행이 수록되어 있다.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호랑이를 찾아 죽였다는 고려사람 최루백(崔婁伯)의 이야기[누백포호(婁伯捕虎)],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당해 총 6년간 여막살이를 했다는 김자강(金自强)의 이야기[자강복총(自强伏塚)],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아버지의 병을 낫게 했다는 유석진(俞石珍)의 이야기[석진단지(石珍斷指)] 등이 실려있다.

권2는 충신도(忠臣圖)이다. 용방간사(龍逄諫死), 난성투사(欒成鬪死) 등의 제목으로 33명의 충렬 행위가 소개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물로는 정몽주(鄭夢周)가 주목되는데, 수록 내용은 실록 등에서 언급되는 서술과 비슷하다. 정몽주가 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고려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죽임을 당했지만, 태종이 즉위한 후에 그의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시호를 하사했다는 내용이다.

권3은 열녀도(烈女圖)이다. 백희체화(伯姬逮火), 여종지례(女宗知禮) 등 35인의 열행(烈行)이 수록되었다. 고려 때의 사례로는 왜구를 꾸짖었다는 최씨의 이야기[최씨분매(崔氏奮罵)], 왜구에게 겁탈당할 것을 거부하고 물에 뛰어든 배씨의 이야기[열부입강(烈婦入江)], 조선시대의 사례로는 남편의 시신을 부여잡고 두 달 가까이 밥을 넘기지 못하다가 죽은 김씨의 이야기[김씨동폄(金氏同窆)] 등이 있다.

권4와 권5는 모두 중국인들의 사례만 실려있다. 먼저 권4는 형제도(兄弟圖)이다. 급수동사(伋壽同死), 복식분축(卜式分畜) 등 35편의 사례에서는 형제 간의 우애와 종족 간 화목을 다루었다. 권5는 붕우도(朋友圖)이다. 누호양려(樓護養呂), 범장사우(范張死友) 등에서 친구 간의 의리와 스승에 대한 신의를 강조하였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은 한문으로 기록된 본문 다음에 한글 해설 부분인 언해(諺解)를 이어 수록하고 있어 국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시(詩), 찬(贊) 부분은 한문으로만 기술되어 있지만, 주요 내용의 언해는 한문 없이 한글로만 되어 있어 독차층의 확대와 내용의 이해도 상승에 기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20세기 초에 언해 부분만 필사하여 편찬된 『오륜ᄒᆡᆼ실』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오륜ᄒᆡᆼ실』은 18세기 말 『오륜행실도』 편찬 당시의 한글을 그대로 필사하지 않고, 100여 년이 지나 변화한 한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어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4 달라진 판화 형식과 정리자 활자 인쇄

『오륜행실도』가 기존 행실도 서적과 다른 특징은 정조대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림[圖]에서 그러한 변화는 주목된다. 기본적으로 『오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의 화면 일부를 차용하고 있다. 즉, 『삼강행실도』에서는 각 이야기의 서사를 여러 장면으로 분할해 한 페이지에 그렸다면, 『오륜행실도』의 그림은 그 중 하나의 장면을 선택하여 그렸다.

일부를 옮겨 그렸다는 판화의 특징은 창작미술이 지니는 독창성과 배치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한 장면을 집중해서 그렸기 때문에 이전 그림보다 정교한 편이다. 인물의 표정이 생생하고, 배경도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또한 하나의 이야기 중 일부 장면을 부각하여 시각화하였기 때문에 독자는 『오륜행실도』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림은 목판화이지만, 글자는 정리자(整理字) 활자를 활용했다. 정리자는 정조가 1796년(정조 20)에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간행하기 위해 주조한 활자이다. 이후 1858년(철종 9)에 다시 주조된 정리자[再鑄整理字]와 구별하기 위해 초주정리자(初鑄整理字)라고도 불리는데, 『오륜행실도』를 비롯하여 『홍재전서(弘齋全書)』(1814), 『진찬의궤(進饌儀軌)』(1829) 등 19세기 문헌의 상당수를 인쇄하였다.

5 『오륜행실도』의 간행과 보급

『오륜행실도』를 서울에서 간행하여 보급하기에는 필요한 부수가 많았다. 따라서 중앙의 규장각에서 인쇄하여 그 인쇄본을 각 지방 감영으로 보내면, 감영에서는 목판을 다시 만들어[飜刻] 간행 부수를 늘렸다. 이처럼 중앙과 지방에서 같이 간행해서 보급하는 방식은 기존 행실도류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간행된 후에는 주요 관청과 문신들에게 배포되었고, 편찬에 참여한 규장각 각신과 초계문신들에게도 하사되었다. 그리고 서울의 오부, 팔도 감영, 사도(四都) 유수부, 주현의 관리와 향교에도 각각 한 질씩 배포되었다.

이렇듯 조선시대 행실도 관련 서적은 매우 많이 보급되었다. 『삼강행실도』부터 『오륜행실도』까지 현재 전해지는 서적의 부수가 수천 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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