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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19세기 조선의 박물고증서(博物考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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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오주연문장전산고』는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쓴 백과사전식 저서이다. 총 60권이며, 각 항목을 총 1,416개 항목의 변증설(辨證說)로 구성하였다. 각 항목에 대한 이규경 자신의 주장보다는 해당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 필요한 경우 고증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책은 1910년대에 처음 발견되었다. 광교 근처 군밤 장수의 군밤 포장 종이로 사용된 것을 권보상(權輔相)이란 사람이 입수하여 광문회에 보관하였다가 이후 최남선(崔南善)이 소장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을 거치면서 최남선의 소장본은 소실되었고, 현재는 최남선 소장본의 필사본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조선 후기의 과학사, 기술사, 농업사, 의학사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소중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어 조선의 박물고증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2 이규경과 『오주연문장전산고』

이규경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오주(五洲), 오주거사(五洲居士), 소운(嘯雲)이다. 정조대 규장각 검서관이었던 이덕무(李德懋)의 손자이며, 이광규(李光奎)의 아들이다. 이광규도 정조의 명에 따라 규장각 검서관에 특차 되어 활동하였다. 이규경은 서울에서 태어나 남촌 묵사동(默寺洞)에서 거주하였다. 21세인 1808년(순조 8) 검서관의 취재(取才)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이규경이 거질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각종 명물에 밝았던 그의 조부 이덕무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은 이덕무를 ‘박물자’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이덕무의 명물에 대한 관심은 71권 32책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저술하는 바탕이 되었다. 『청장관전서』의 간행에는 정조의 도움이 컸다. 정조는 특별히 500냥을 하사하여 이광규에게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조부 이덕무의 저술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었다.

이규경이 폭넓은 학문세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서유구(徐有榘), 서유본(徐有本), 최한기(崔漢綺), 최성환(崔瑆煥), 김정호金正浩) 등과의 학문적 교류도 한 몫을 하였다. 이규경은 그들을 통해 다양한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를 다양하게 얻을 수 있었다.

3 고증학의 실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구성과 내용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총 60권이며, 각 항목을 총 1,416편의 변증설(辨證說)로 처리하여 구성하였다. 변증이란 말을 붙인 것으로 보아 이규경 스스로가 고증에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조선이 명목(名目), 사물(事物), 법식(法式), 수량(數量)을 아울러 일컫는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문이 마치 이단처럼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현실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박물지(博物志)』를 지은 장화(張華),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지은 이시진(李時珍) 등 중국의 학문을 적극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을 보면, 천문, 역법, 수리(數理), 지리(地理), 시령(時令)를 비롯하여, 종족(種族), 역사(歷史), 경제(經濟), 문학(文學), 문자(文字), 고기(古器), 전적(典籍), 서화(書畵), 의학(醫藥), 서학(西學), 서교(西敎), 도교(道敎), 불교(佛敎), 음양오행(陰陽五行), 술수(術數), 상서(祥瑞), 재이(災異), 제도(制度), 습속(習俗), 예제(禮制), 복식(服飾), 유희(遊戱), 주거(舟車), 교량(橋梁), 야금(冶金), 병학(兵學), 무기(武器), 양전(量田), 양조(釀造), 종축(種畜), 초목(草木), 조수(鳥獸), 광속(鑛屬) 등으로 나누어 변증의 방식으로 역대의 학설을 다양하게 설명하였다.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저술한 실용의 방향은 다양하였다. 먼저 판적(版籍)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호구의 수로 역사의 성쇠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호구(戶口) 수를 증가시키려고 꾸미는 조선의 현실을 지적하며, 이러한 행위는 문서의 신빙성을 떨어뜨림과 함께 풍속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조선팔도의 이로움과 폐단을 다룬 글에서는 재물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민력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백성이 부유하면 나라도 부유해진다고 설명하였다.

재용(財用)에 대해서는 백성은 음식을 하늘로 삼는데 음식은 재용에서 나오고 재용은 농업에서 나온다고 하며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규경은 강원도 안협, 봉암, 공주, 충주 등 향촌에서 은거하며 채마밭을 파종하는 등의 경험으로 농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외국의 신식 농기구에 대해 분석하고 이를 적극 도입하여 사용하자고 하였다. 이외에도 구황식물로서 고구마의 중요성과 함께 농구, 직구(織具), 어구(漁具)에 관해 고증하였다. 또한 이규경은 상업의 유통도 강조하여 장시의 활성화, 고리대의 폐단, 자원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외국과의 통상도 강조하였다. 이규경은 조선을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원인을 동서교통의 새로운 조류에 조선이 동참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많은 나라와의 교통은 국가가 부유해지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해외교역론을 주장하였다.

이규경은 광물의 채취와 제련법을 습득하여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석탄의 효용성을 서술하고 석탄 뿐 아니라 금, 은, 동, 철, 상아 등 모든 자연 광물의 채취, 가공, 활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불교, 도교, 천주교에 대한 그의 생각도 서술되었다. 이규경은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우위에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불교와 도교의 장점과 함께 성리학과의 공통점을 찾아 성리학이 가지는 한계를 보완하려 하였다. 또한 노자(老子) 및 그의 저서에 대한 평가를 비롯하여 삼국에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교가 전래된 역사를 서술하였다.

서학에 대해서는 천문, 역산, 수학, 수리, 의약,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서 고증하였다. 특히 지구 변증설에서는 지구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을 폭넓게 다루었다. 오대주(五大洲)에 대해서 서양서적을 통해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지구가 둥글다면 모든 곳이 다 지구의 중심이 될 수 있다며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였다.

역사에 관한 내용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역사를 나라의 거울로 정의하며 옛 것을 드러내고 미래를 여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역사 뿐 아니라 안남(安南, 베트남)과 일본, 회부(回部, 동투르키스탄 지역)를 포함한 외국의 역사도 살펴보았으며, 『삼국사기』와 『고려사』를 통해 우리나라역사에 대해서도 세밀한 분석을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에 있는 작은 섬들을 주목하며 신라 우산국 시절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울릉도의 역사와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특히 안용복(安龍福)이 울릉도를 찾기 위해 노력한 사실을 상세히 서술하며 국가 강역에 대한 관심과 함께 양반이 아닌 평민도 국가를 위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한편, 이규경의 관심을 끈 최신의 현상이나 기물들을 보면, 마니교, 태엽인형, 펌프, 정전기 발생기, 뻐꾹 시계, 전화통, 암실 카메라, 모래시계, 망원경 등 다양하였다. 이를 통해 이규경이 박물에 기울인 관심의 범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사후방사추사진영변증설(死後方士追寫眞影辨證說)」에서는 죽은 사람의 초상을 그리는 법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이규경은 이들을 중국의 서적과 견문을 통해 파악하였다. 또한 배 옆에 바퀴를 달아서 사람이 돌려 빨리 가게 만드는 윤선(輪船)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실제 이규경은 윤선을 한강에서 보았는데 매우 엉성하여 가치가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서적 뿐 아니라 중국의 최신정보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아편에 관심을 가지며 아편의 유래, 흡입 방법, 유통 경로, 부작용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더불어 영국 선박이 중국에 아편을 밀매하다가 아편전쟁으로 번져 중국이 패하는 양상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이 밖에 오랑캐의 풍속이 도리어 간편한 이유, 중국의 만족(滿族)과 한족(漢族) 여자들의 의복(衣服) 및 수식(首飾)을 비롯하여 향리(鄕里)의 풍속, 관북(關北) 지방 처녀들이 쪽[髻]을 올리는 이유, 석전(石戰)과 목봉(木棒), 상원절(上元節)의 약밥과 추석절의 가회(嘉會)놀이, 자고(紫姑)놀이, 널뛰기[板舞], 연기[煙]놀이 등 우리나라의 놀이와 풍속에 대해 서술하였다.

4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의의

이규경이 살았던 19세기에는 청나라와 서양의 학문이 수용되고 있었으며, 박물학에 관심을 가지는 지식인들이 많아져 방대한 규모의 백과사전류의 서적이 많이 편찬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지봉유설』, 『성호사설』 등의 유서류의 경향을 잇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이규경은 『성호사설』이 구축한 내용들을 대거 인용하였다. 이러한 유서의 유행은 중국 명청 시대의 서적이 조선에 대량 유입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이 수시로 쓴 것을 모은 것으로서 간행 당시 저자의 정리가 이루어지지 못한 단점이 있다. 따라서 백과사전식의 서술이지만 각종 사물에 대한 분류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내용면에 있어서는 조선후기의 경학(經學)과 문학을 비롯하여 과학사, 기술사, 농업사, 의학사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많은 정보를 수록하였고, 현재도 관련 분야에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아울러 19세기 지식인의 학문적 자세와 실용과 위민(爲民), 지식에 대한 열망, 개방된 사고 등 인식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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