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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조선의 왕이 된 육룡의 노래

1445년(세종 27)

용비어천가 대표 이미지

용비어천가

e뮤지엄(국립한글박물관)

1 개요

『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의 건국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악장(樂章) 문학이다. 더불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밝히고, 그러한 왕조를 계승할 후세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총 125장이고, 이를 10권 5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모두 목판본으로, 중간된 것이다. 초간본은 활자본이었을 것이나 전하지 않는다.

1445년(세종 27)에 정인지(鄭麟趾) 등이 125장의 한글 시가와 그것을 한시(漢詩)로 번역한 것을 함께 지어 바쳤다. 책의 이름은 세종이 지었다. 이후 2년 뒤 1447년(세종 29)에 최항(崔恒) 등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한문으로 된 글을 만들어 최종 완성했다.

『용비어천가』에서는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과 그 선대 4조(四祖)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도조(度祖) 이춘(李椿),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을 ‘하늘을 나는 여섯 용(龍)’으로 신화화했다. 용이라는 상상의 동물이 우리나라 건국 신화에서는 왕의 권위를 나타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조선 건국이 이미 목조의 시기부터 숙명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알리고자 했다. 또한 그는 『용비어천가』를 관현악으로 제작∙연주하게 하였고, 550본을 만들어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주었다.

2 『용비어천가』의 편찬

조선 건국은 ‘역성혁명’으로 평가되지만, 강제적인 권력 찬탈도 행해졌다. 그 과정이 실제 정당한지의 여부는 별개로, 새 왕조의 권위를 강화하고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는 장치가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각종 정책을 행하는 동시에 왕실 선대의 행적을 신화화함으로써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두 차례 발생한 ‘왕자의 난’은 건국 초 왕위 계승의 불안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태종은 ‘형(兄)’ 정종의 ‘세자(世子)’로서 왕위를 이어받았고, 이는 태종이나 세종에게 부담이 되었다. 결국 정종(定宗)은 사후에 묘호를 받지 못했고,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시호만 받았다. 결과적으로 왕위 계승은 4조에서 태조, 태종, 세종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공식화되고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왕위 계승과 그것의 정통성 문제를 공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 건국의 과정을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태조실록』에서 태조 이성계와 그 선대의 행적을 종합하여 실록 앞부분에 기록해두었는데,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조실록』을 열람하여 1차 사료를 확보할 정도로 『용비어천가』의 편찬에 주력하였다.

『용비어천가』에는 역사적 사실도 있지만 신화(神話)적이거나 혹은 신이(神異)한 요소도 곳곳에 결부되어 있다. 도참(圖讖)으로 건국을 예정된 것으로 서술하였고, 왕실 선대의 초월적인 능력을 통해 국왕의 권위를 높였다. 더불어 조선 건국은 천명(天命)에 의해 당연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3 『용비어천가』의 내용

『용비어천가』는 총 125장으로 구성되었다. 각 장은 2행이고, 각 행은 4구로 되어 있다. 단, 1장은 3구, 125장은 9구이다. 각 장은 단편적인 일화를 설명하는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조선 건국의 위대함과 창업 조종(祖宗)의 영웅담을 서사시 형태로 기술하였다.

그런데 『용비어천가』에는 매우 이중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용으로 상징되는 왕들의 노래는 백성의 노래이기도 했고, 영웅들의 신화이면서도 역사의 교훈이 되어야 했다. 또한 유학자인 관료들에 의해 쓰여졌지만, 예언을 담은 도참이나 합리적이지 않은 신이한 이야기들이 매우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그들도 ‘신비롭고 이상한’ 이야기의 한계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유교적 합리주의로 불식시켜려 했다.

전체 내용을 장별로 구분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1∼2장은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전체 주제와 글의 서술 목적이 담겼다. 1장은 “해동(海東)의 여섯 용이 날아 일마다 하늘이 주신 복이니, 이것은 옛 성인들의 고사(故事)와 부합한다.”는 내용이고, 2장은 모든 결과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음을 물과 나무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나니.”라는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익숙한 구절이다.

3∼109장에서는 ‘여섯 용’의 성덕을 찬송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음을 서술하였다. 먼저 3∼8장은 목조에서 환조에 이르는 4조의 행적을 천명과 결부시켜 설명하였다. 9∼14장은 태조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부터 한양 천도에 이르는 내용을 서술하였는데, 태조가 위화도회군 이후 민심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가 어쩔 수 없이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올랐음을 역설하는 내용이다.

15∼26장에서는 전주 이씨가 대대로 덕을 쌓아 천명과 인심이 모였다는 내용을 중국과 고려의 옛 역사를 끌어와서 읊었다. 27∼46장은 태조의 비범한 모습과 하늘의 도움을 받은 신기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47∼109장은 주로 태조의 업적에 대한 기술이다. 무공을 떨친 왜구와의 전투, 활쏘기 재주, 학문, 인격 등에 대한 칭송이다. 『용비어천가』에서는 태조에 대한 서술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는 탁월한 무술을 지닌 백전백승의 장수로 정치적 역량도 뛰어나고 인간적으로도 매우 겸허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87∼89장은 이성계의 뛰어난 자질을 부각하였는데, “말 위에서 큰 범을 한 손으로 때려잡고”, “싸우는 두 소를 양손으로 잡아 싸움을 그치게 했으며”, “갑옷으로 무장한 적장의 입과 눈을 정확히 쏘아 맞히는” 등의 비상한 재주가 담겨져 있다.

110∼124장은 후세 왕들에게 올바른 정사를 펼쳐 국가의 안녕을 지킬 것을 경계(警戒)하라는 내용이 담긴 ‘계왕훈(戒王訓)’이다. 선조들에 대한 도참과 신이함을 다루는 대신에 후대 국왕들이 유교적 학문과 도덕을 갖추어 인정(仁政)을 실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125장은 전체의 결론이다. 한편, 125장을 비롯하여 1, 2, 3, 4장의 다섯 개 장에서는 「치화평(致和平)」 , 「취풍형(醉豐亨)」 , 「봉래의(鳳來儀)」, 「여민락(與民樂)」 등을 곡으로 만들어 조정의 연례악(宴禮樂)으로 사용하였다.

4 『용비어천가』의 언어적 특징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처음으로 그것을 사용한 문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시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일부 연구자는 훈민정음의 창제가 『용비어천가』의 편찬을 염두에 두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문자적 도구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물론 『용비어천가』가 순수 한글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한자가 섞인 것들도 있고, 한문에 우리말 토를 다는 형태도 있다. 다만 『동국정운(東國正韻)』 이전에 편찬된 문헌이기 때문에 한자에 음이 달리지는 않았다.

한글 가사, 한문 주해 속에 등장하는 인명·지명·관직명 등은 국어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지명의 경우 그 용례가 매우 많은데, 당시 땅이름 부르던 법을 알 수 있다. ‘우현(牛峴)’을 ‘소재’로, ‘등산곶(登山串)’을 ‘둥산곶’으로, ‘위화도(威化島)’를 ‘울헤셤’으로 부르는 등 지명만 해도 약 70개 정도가 확인된다.

5 임진왜란 이후 『용비어천가』의 재조명

『용비어천가』는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는 『용비어천가』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란으로 국왕의 권위는 매우 실추되었고, 조종(祖宗)의 위엄을 드러내는 방법이 다시 활용되었다.

첫 번째 중간본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1612년(광해군 4)에 , 두 번째 중간본은 병자호란 이후 1659년(효종 10)에 간행되었다. 그러면서 『용비어천가』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1612년에 중간본이 간행되었을 무렵에 함경도 관찰사 한준겸(韓浚謙)은 『용비어천가』의 축약본을 간행하였고, 1669년(현종 10)에 현종은 정시(廷試)에서 문신들에게 『용비어천가』에 대한 시제(試題)를 내리기도 했다.

숙종대 이후에는 선왕들의 업적을 평가하고 선양하는 시도가 많이 나타났고, 이러한 움직임은 영·정조대에 극에 달했다. 영조는 스스로 『용비어천가』의 구절을 숙지하였고, 1765년(영조 41)에는 세 번째 중간본을 제작했다. 정조대에는 홍양호(洪良浩)가 옛 사적을 직접 답사하여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확충하고, 각 사적에 대한 어제시문과 관료들의 작품들 망라하여 『흥왕조승(興王肇乘)』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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