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 十層石塔]

조각과 장식이 세련된 조선시대의 석탑

1467년(세조 13)

원각사지 십층석탑 대표 이미지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1467년(세조 13)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석탑이다. 대리석을 사용하여 조성한 석탑으로, 높이는 약 12m에 달한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3층의 기단부와 10층의 탑신부로 구성되었으며, 상륜부는 멸실되었다. 각 층의 면석에는 용, 모란, 연꽃, 각종 인물 등이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조선시대 석탑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국보 제2호로 지정되어 탑골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석탑의 훼손이 심하여 1997년부터 유리로 된 보호각을 만들어 석탑의 풍화를 막고 있다.

2 세조, 원각사를 창건하다

원각사는 조선 건국 이후 도성에 개창된 사찰로서, 원래 이름은 흥복사(興福寺)였다. 개국 초에는 조계종(曹溪宗)의 본사(本社)가 되었다가 후에 폐지되고 관청이 되었다. 남아 있는 흥복사의 전각 중 서쪽 선당(禪堂)을 관습도감(慣習都監)으로, 동쪽 선당을 예장도감(禮葬都監)으로 사용하였고, 대전(大殿)의 북쪽은 중학의 유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삼았다.

이후 1464년(세조 10) 4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경기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원각 법회(圓覺法會)를 열었는데, 법회 도중 여래(如來)가 공중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수백 개의 사리가 분신(分身)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세조는 이처럼 상서로운 일이 발생하자 그해 5월 다시 흥복사를 중건하여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도록 하였다.

원각사의 공사는 1464년(세조 10) 6월에 조성도감(造成都監)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찰의 조성에는 효령대군, 임영대군(臨瀛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 영순군(永順君)과 영의정 신숙주(申叔舟), 좌의정 구치관(具致寬) 등이 도제조(都提調)를 맡아 진행하였다. 이때 조성 공사에 참여한 군사는 2,100여 명 정도였고, 인근의 인가 200여 채가 모두 철거되었다. 철거된 집터에 대한 정부의 보상도 이루어졌다. 집터가 시전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기존 땅값의 3배를 쳐서 보상하였다. 아울러 원각사의 대종(大鐘)을 주조하기 위해, 동(銅) 5만 근(斤)을 개성부, 경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사들였다.

원각사는 공사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1465년(세조 11) 4월 완성되었다. 이때 세조가 참석하여 낙성식을 열었는데, 승려 128명이 참석하여 어정구결(御定口訣)로 번역한 『원각경』을 읽었다. 또한 세조는 승려 2만 명에게 공양을 베풀었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후 ‘숭유억불’을 내세웠지만, 왕실에서는 불사(佛事)에 소홀하지 않았다. 세조는 원각사를 창건하고 절의 동남쪽에 따로 어실(御室)을 조성하였고, 예종은 원각사에서 세조의 백일재(百日齋)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원각사는 왕실의 기복뿐 아니라 기청제와 기우제도 지내는 등 민생 안정을 기원하는 사찰로도 운영되었다.

그러나 점차 유생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1474년(성종 5) 원각사의 어실이 폐지되고, 사찰의 수직군사들도 철수하는 등 왕실 사찰로서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급기야 1488년(성종 19) 원각사에 불이 나 성종이 중수를 명하였으나 억불을 주장하는 대신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후 연산군 대에는 원각사의 탑이 훼손되었고, 법당의 불상을 회암사로 옮기는 한편, 사찰의 승려들을 내보내 폐사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원각사에 흥청(興淸)·운평(運平) 등 기생을 두면서 연방원(聯芳院)을 만듦으로써 승려들이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원각사를 철거하여, 그 재목을 연산군 때 집을 헐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원각사 터를 한성부 청사로 활용했으나 판윤 전림(田霖)이 이곳에서 병을 얻어 죽은 이후로 사람들이 불길한 곳이라고 생각하여 이전 청사로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이처럼 왕실의 주도하에 건설된 원각사는 점차 사찰로서의 역할을 잃었으며, 1554년(명종 9)과 1565년(명종 20) 두 차례 화재로 절터의 흔적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3 화려한 조각과 기교의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원각사가 창건된 지 1년 후인 1467년(세조 13) 사월초파일에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원각사에서 연등회(燃燈會)를 베풀고 낙성하였다. 석탑의 높이는 12m이며, 전체를 대리석을 이용해 만들었다. 형태가 특이하고 장식적 요소가 풍부하여 세조 대 조선을 찾았던 일본 승려 도은(道誾)은 ‘중국의 사찰을 두루 관람하여 보았지만, 원각사의 탑이 천하에서 제일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구조를 보면, 우선 기단부는 3층으로 이루어졌다. 평면은 아(亞)자 형태로 사면이 돌출된 모양을 이루고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 기단저석, 면석(面石), 갑석(甲石)의 순서로 8매의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상대, 중대, 하대 각 층의 면석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조각이 장식되었다.

1층 하대면석 각 면에는 용, 사자,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2층 중대면석에는 긴 석장을 들고 있는 현장(玄奘)의 모습과 나무 아래 합장하고 무릎을 꿇은 사람, 황제로 추정되는 인물과 앉아 있는 승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관음보살, 상서로운 구름 등 『서유기(西遊記』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갑석에는 모란 등의 무늬를 새긴 띠를 두르고, 하부와 상부에 연꽃이 위아래로 피어 있는 모습의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을 새겨 놓았다. 3층의 상대면석에는 『서유기』의 내용뿐 아니라 관을 쓴 인물, 소와 돼지의 머리를 한 요괴, 나한(羅漢), 나한을 향해 합장한 6인 등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부처가 전생(前生)에 행한 6도(六度, 열반에 이르기 위해 보살이 수행해야 하는 여섯 덕목)의 행업(行業, 불교의 도를 닦음)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본생경변(本生經變)과 석가모니의 일생을 나타낸 것이다.

탑신부는 10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층마다 난간석, 탑신석, 옥개석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난간석은 모두 그 위의 건물 축에 해당하는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난간석 모서리에는 엄지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연잎을 새긴 법수(法首)로 장식하였다. 탑신부의 1층에서 3층까지는 기단의 형태와 같이 사면이 돌출된 모습을 하고 있다. 각 면의 양쪽 모퉁이에는 용무늬가 새겨진 기둥을 세웠고, 각 면에는 불화도상(佛畵圖像), 인왕상(仁王像), 불좌상(佛座像)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의 4층부터는 일반 석탑의 형태와 같은 정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울러 탑신부 각 층의 옥개석에는 다포계 목조건물의 세부를 상세히 묘사해 놓아 조선초기 목조건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세부적으로 다포계의 공포와 처마, 지붕이 새겨져 있다. 처마는 층마다 서까래와 부연(附椽)을 사용한 겹처마로 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름다움을 더했다.

석탑의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따라서 10층 탑신의 지붕은 십자지붕으로 마무리하였다. 전체적인 석탑의 형태, 세부 구조, 면석에 장식된 불상의 조각, 각 층의 옥개석의 모양 등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국보 제86호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과 매우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석탑 조성에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4 유리 보호각으로 뒤덮인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가 폐사된 후 절에 남아 있던 대종(大鐘)은 1536년(중종 31) 남대문으로 옮겨졌으며, 원각사 터에는 십층석탑과 비(碑)만 남아 있었다. 이후 1897년 총세무사(總稅務司, 개항장의 세관을 관리하던 관직)로 초빙되었던 영국인 브라운(Brown, J. McLeavy, 伯卓安)이 원각사 터를 공원으로 개발해서 보존할 것을 건의하여 탑골공원이 조성되었다. 탑골공원은 공원 내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파고다(pagoda) 공원이라고도 불렀다.

1934년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부사(京城府史)』에 따르면 원각사지 십층석탑처럼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나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의 경우 하얀색을 띠기 때문에 속칭 백탑(白塔)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백탑이라는 음이 전화(轉化)하여 ‘파고다’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또한 ‘파고다’라는 말은 ‘신에 귀의한다’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파가바티(bhagavati)’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말은 영어로 파고다(pagoda)라고 하며, 탑골공원에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어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다가 1992년 이 지역의 명칭이 ‘탑마을’, ‘탑골’, ‘탑사동(塔寺洞)’이었기 때문에 옛 지명에 따라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이러한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현재 국보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석탑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뛰어날 뿐 아니라 일반 석탑과는 달리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대리석이 다른 석재보다 무르기 때문에 산성비나 미세먼지, 황사 등 대기오염 물질이나 조류의 배설물 등에 의해 석탑이 쉽게 부식되거나 변색되는 단점도 발생하였다.

따라서 1990년대에 들어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훼손이 심해지자 이에 대한 보호 대책과 보호 시설의 건립이 논의되었다. 이에 1997년부터 새의 배설물과 산성비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장기적인 보존 대책으로 석탑에 유리로 제작된 보호각(保護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