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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궁[毓祥宮]

영조, 어머니를 위해 사당을 짓다

1725년(영조 1)

육상궁 대표 이미지

육상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육상궁(毓祥宮)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사당이다. 1725년(영조 1)에 건설되었으며, 처음에는 숙빈묘(淑嬪廟)로 불리다가 육상묘(毓祥廟)로 개칭되었다. 이후 1753년(영조 29)에 승격하여 육상궁이 되었다. 당시 궁호(宮號)는 원칙적으로 세자나 세자빈의 사당에 붙였는데, 영조대에 이르러 사친(私親)의 사당에도 궁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육상궁은 국왕의 친모이지만 후궁에 머물렀던 이들을 위해 지은 사당, 즉 저경궁(儲慶宮)·연호궁(延祜宮)·대빈궁(大嬪宮)·경우궁(景祐宮)·선희궁(宣禧宮)·덕안궁(德安宮)을 이곳으로 옮겨온 후 칠궁(七宮)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현재의 육상궁은 1882년(고종 19)에 소실된 것을 재건한 것이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2 숙종의 승은을 입은 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1670년(현종 11) 최효원(崔孝元)의 막내딸로 한성부 여경방(餘慶坊)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읜 최씨는 7살에 무수리로 궁궐에 들어가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무수리였던 최씨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것은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로, 1693년(숙종 19) 숙종은 아들 영수(永壽, 2달 만에 사망)를 임신한 최씨를 숙원(淑媛)으로 삼도록 하였다. 이처럼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자식까지 임신하자,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돈으로 사람을 사주하여 그녀를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희빈의 견제를 받았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1694년(숙종 20), 숙종은 연잉군(延礽君, 후의 영조)을 낳은 최씨에게 특별히 품계를 올려 숙의(淑儀)로 봉작하였다. 이후 1년 뒤인 1695년(숙종 21) 6월에 귀인(貴人)으로 봉했다가 10월 정1품 숙빈(淑嬪)으로 승급시켰다. 이러한 숙빈 최씨는 1701년(숙종 27) 숙종에게 장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몰래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비복들과 함께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고 발고하기도 하였다.

숙빈 최씨는 후궁 봉작과 함께 광해군의 잠저였던 이현궁(梨峴宮)을 하사받았다. 1704년(숙종 30) 2월 연잉군이 결혼하면서 왕자가 제택이 없을 수 없다며 숙종이 많은 비용을 들여 집을 따로 마련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숙빈과 함께 이현궁에 살면 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무시하고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의 옛 집터를 사들여 제택을 지었는데, 후일 창의궁(彰義宮)이다. 이후 1711년(숙종 37) 숙종은 연잉궁의 출합(出閤)을 앞두고 숙빈 최씨의 이현궁을 환수하고 숙빈에게 연잉군의 집에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숙빈 최씨는 1716년(숙종 42) 신병으로 대궐에서 나와 창의궁에서 요양하다가 1718년(숙종 44) 3월 9일 사망하였다.

3 영조, 숙빈묘를 세우다

후궁인 숙빈 최씨의 상례에는 제약이 많았다. 서자였던 연잉군은 의례상 어머니를 위해 피발(被髮, 머리를 풀어헤치는 것)과 최복(衰服, 조부모·부모의 상에 입는 상복)을 하지 못하며 거상기간도 단축해야만 했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머니의 상에 피발과 최복을 해서 부왕인 숙종의 문책을 받았고, 어머니의 장지를 구하는 데에도 눈치를 봐야만 했다.

이처럼 연잉군 시절 어머니의 상장례에 제약이 많았던 영조는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 추숭 작업을 진행하였다. 영조는 즉위한지 약 2개월 뒤인 1724년(영조 즉위) 11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우(祠宇)를 자신의 잠저 때 구궁(舊宮)으로 삼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는 사당을 조성한 후 의례는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전례에 의거해 신하들이 제사를 주관해야 하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신하된 도리로 임금께서 거처했던 궁을 출입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며 별도로 사당을 조성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724년(영조 즉위) 경복궁 북쪽에 부지를 선정하고 이듬해 3월 묘소에 신도비를 세우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2월 사당이 완성되었다. 묘호는 정해진 이름이 없어 숙빈묘라 불렀으며, 후에 육상묘로 개칭하였다.

이러한 숙빈묘의 모습은 1739년(영조 15)에 제작된 정선의 〈육상묘도(毓祥廟圖)〉를 통해 알 수 있다. 〈육상묘도(毓祥廟圖)〉에는 북악산을 배경으로 두 채의 초가집과 이를 둘러싼 울타리 형태의 담, 홍살문이 그려져 있다.

육상묘의 전배(展拜)는 해마다 봄의 끝 달에 왕에게 여쭈어 거행하였다. 영조는 숙빈묘를 세운 뒤 자주 친행을 했는데 국왕의 잦은 거둥이 묘의 위상을 높이는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1726년(영조 2) 11월에 숙빈묘에 행행(幸行)하여 전배례(展拜禮)를 거행했으며, 이후 매년 숙빈의 기신제 때 친행이 이루어졌다.

4 육상묘에서 육상궁으로 격상하다

숙빈묘를 육상묘로 개칭한 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한 추숭작업을 시작하였다. 조선의 경우 왕과 왕비의 무덤에는 능(陵)을, 세자와 세자빈에게는 원(園)을, 왕자, 공주, 옹주, 후궁 등에게는 묘(墓)를 사용하였다. 영조는 숙빈 최씨를 격상시키면서 후궁에게 별궁(別宮)과 원(園)의 제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식이 왕이 된 후궁의 사당과 묘가 궁과 원으로 격상된 것은 숙빈 최씨가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영조는 1744년(영조 20) 어머니의 묘호(廟號)와 묘호(墓號)를 고치고자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예조판서 민응수(閔應洙) 등은 묘호(廟號)는 육경(毓慶)이라 하고, 묘호(墓號)는 소령(昭寧)이라 할 것을 청하였다. 영조도 이에 동의했지만, 육경은 원종의 능인 장릉(章陵)의 옛날 원호(園號)와 음이 같아 육상(毓祥)으로 고쳤다. 이후 1753년(영조 29) 6월 육상궁으로 추숭하고 숙빈 최씨에게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린 후 친히 신주를 쓰고 고유제를 지냈다.

이처럼 어머니의 추숭 전례를 마친 영조가 육상궁에서 몸소 제사를 행한 후 재실(齋室)에 돌아가서 “내가 이제는 여한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영조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칠궁(七宮)’으로도 불린 육상궁

육상궁은 1870년(고종 7) 변화를 보이는데, 고종이 여러 궁을 한곳의 별묘(別廟)에 합쳐 봉안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경우궁(景祐宮)에 인빈 김씨, 영빈 김씨(寧嬪金氏), 화빈 윤씨(和嬪尹氏)의 사우를, 육상궁에 희빈 장씨(禧嬪張氏), 정빈 이씨(靖嬪李氏), 영빈 이씨(暎嬪李氏),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사우를 모셨다. 또한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사우는 의소묘로 옮겼다.

이후 육상궁은 1882년(고종 19)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으며, 1907년에는 후궁들 가운데 아들이 왕이 되거나 추존왕이 된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등을 육상궁 안에 함께 모셔 제사하였다. 1929년에는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귀비의 덕안궁도 육상궁으로 옮겨져 육상궁은 ‘칠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현재의 육상궁은 1882년(고종 19) 재건한 것이다.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그 앞에 동·서각(東西閣)과 배각(拜閣)이 자리하고 있다. 육상궁 왼쪽으로 묘우 4채가 독립해 있고, 그 앞쪽으로 재실(齋室)과 정문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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