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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자화상[尹斗緖 自畵像]

윤두서, 자신의 참모습을 화폭에 담다

미상

윤두서 자화상 대표 이미지

윤두서 자화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윤두서 자화상은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세밀하고 정교하다. 가로 20.5㎝, 세로 38.5㎝의 작은 종이에 그려졌지만, 윤두서의 표정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그는 무엇을 응시하는 것일까. 눈은 조금 패여 있지만, 약간 치켜뜬 눈빛은 강렬하다. 덥수룩하지만 단정하게 정리한 수염에서는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고, 깊은 주름을 지으며 굳게 다문 입에서는 진중한 기백이 드러난다. 어떠한 치장도 하지 않은 윤두서의 모습은 그의 삶과 정신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2 윤두서의 가문과 삶

윤두서(1668~1715)는 문인 화가이다. 자는 효언(孝彦)이고, 호는 공재(恭齋), 종애(鍾崖)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으로, 고산(高山) 윤선도(尹善道)가 증조부이다. 윤선도는 장손 윤이석(尹爾錫)에게 후사가 없자 윤이후(尹爾厚)의 4남인 윤두서를 종손으로 정하였다. 윤두서가 4세 때 윤선도는 세상을 떠났지만, 학문과 예술에 끼친 증조부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의 가문은 남인이었다. 윤선도의 경우 예송 논쟁과 관련하여 서인과 대립하다가 유배되었고, 치열한 붕당정치의 여파로 상당 기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가문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숙종대에는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등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의 집권이 교차 반복되는 것이 가장 심했던 시기였다. 26살 되던 1693년(숙종 1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이듬해에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대거 실각했다. 이런 와중에 셋째 형 윤종서(尹宗緖)가 의금부에서 옥사하였고, 윤두서를 비롯하여 그의 가문 사람들이 이영창(李榮昌) 옥사에 연루되었다. 서얼 출신 이영창이 장길산(張吉山)과 공모하여 역모를 도모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노론 출신 김춘택(金春澤)이 장희빈을 몰아내고자 꾸민 무고로 밝혀졌지만, 해남 윤씨 가문이 당한 피해는 적지 않았다.

윤두서는 결국 과거에 대한 뜻을 접었다. 자연스레 혼인도 북인계 남인 이수광(李睟光)의 딸 전주 이씨와 맺었다. 부인 사망 후 재혼은 소론계인 이형징(李衡徵)의 딸이자 이형상(李衡祥)의 양녀인 완산 이씨와 했다.

윤두서는 평생을 학문과 시서화로 보냈다. 그는 이형징, 이형상, 이서(李溆), 심득경(沈得經), 이잠(李潛), 이하곤(李夏坤) 등의 친인척 혹은 친구들과 함께 학문과 예술을 논하였다. 시회(詩會)를 갖거나 유람을 하면서 예술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 이잠이서는 성호 이익(李瀷)의 형들이었고, 그들과의 교유는 윤두서의 학문적 경향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림도 같이 감상하였고, 윤두서가 직접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1710년(숙종 36)에는 친구 심득경이 세상을 떠나자 재계하는 마음으로 유상(遺像)을 그렸다. 그의 모습을 ‘터럭 하나 틀리지 않았고, 벽에 걸었더니 온 집안이 놀라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재현하였다. 이 심득경 초상화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그들은 서로의 예술 세계를 평하는 평론가가 되어 주기도 했다. 이하곤은 자화상을 본 후 그림 속에서 벗의 학자적 겸양이 드러난다고 평가한 찬문(贊文)을 쓰기도 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6척도 되지 않은 몸으로 사해를 초월한 뜻이 있다. 긴 수염이 나부끼고, 얼굴은 윤택하고 붉다. 바라보는 사람은 그가 선인(仙人)이나 검사(劍士)로 의심하지만, 그 순순히 자신을 낮추고 겸양하는 풍모는 대개 행실이 신실한 군자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구나.

한편, 그는 한양에 거주하면서 예술 활동을 펼치다가 46세에 해남으로 내려갔고, 1715년(숙종 41)에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 정계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해남에는 그의 고택(古宅)을 비롯하여 해남 윤씨 가문의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이 보전되고 있다. 특히, 녹우당은 조선 후기 부유했던 양반집의 전형적인 가옥으로서 윤선도·윤두서 등과 관련한 고서, 고문서, 회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윤두서 자화상도 녹우당에서 소장하고 있다.

3 윤두서의 그림들

윤두서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우선 해남 윤씨 가문에 전해오는 화첩인 『가전보회(家傳寶繪)』에 22점, 『윤씨가보(尹氏家寶)』에 44점의 그림이 있다. 윤두서 사후 1722년(경종 2)에 이하곤이 남쪽 지방을 유람하다가 녹우당에 들렀을 때 아들 윤덕희가 아버지의 화첩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현재 남아있는 『가전보회』, 『윤씨가보』 화첩으로 추정되고 있다. 66점의 작품은 산수화, 산수인물화, 화조화, 고사인물화, 화조화, 나한도, 그리고 용과 말을 그린 그림까지 매우 다양하다. 작품명으로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이삭 줍는 사람들을 그린 「채애도(採艾圖)」, 목기 깎는 모습을 담은 「선차도(旋車圖)」, 흰 말의 모습을 사실감 있게 묘사한 「백마도(白馬圖)」 등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심득경 초상화 외에 여러 점의 그림이 있다. 「노승도(老僧圖)」는 장삼을 걸치고 염주를 든 노승이 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가물첩(家物帖)’이라는 제목의 화첩에는 비단, 종이, 모시, 삼베 등의 다양한 바탕에 산수화, 영모화, 인물화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일부가 윤두서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윤두서가 그렸을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으로 『십이성현화상첩(十二聖賢畵像帖)』이 있고, 「우마도(牛馬圖)」와 같은 여러 점의 말과 소를 그린 그림 등이 있다. 『십이성현화상첩』은 활동 시기가 다른 맹자(孟子), 정호(程顥), 정이(程頤) 등의 유학자들의 관계를 선현과 그를 우러러보는 후학들의 구도로 설정해서 화폭에 담았다. 또한 그가 그린 말 그림은 사실적인 경향을 띠는 조선 후기 화단의 대표적 작품으로 거론된다.

저서로는 『기졸(記拙)』, 『화단(畵斷)』이 있고, 지도로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와 「일본여도(日本輿圖)」가 전한다. 윤두서는 기존 화원들의 조선 지도를 정리해 「동국여지지도」를 완성했고, 이후 지도 그림의 형식에 영향을 미쳤다. 문인 화가로서 직접 지도를 그려 완성한 유일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은 윤두서의 예술적 재능은 장남인 윤덕희(尹德熙)와 손자인 윤용(尹熔)에게도 전해졌다. 집안에서 3대에 걸쳐 문인화가가 배출된 것이다. 그리고 외증손은 정약용(丁若鏞)이다. 그는 강진 유배 시절에 녹우당에 소장된 윤두서의 그림과 지도들을 열람하였고, 그중 여러 작품을 집에 소장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윤두서의 그림 중에서 인물화를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4 자화상에 담긴 이야기

윤두서의 인물화를 높게 평가한 정약용의 언급대로, 윤두서 자화상은 우리나라의 역대 인물화 중에서 손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자화상이 언제부터 그려졌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조선시대 허목이 고려 공민왕이 스스로 보고 그린 자화상[공민왕조경자사도(恭愍王照鏡自寫圖)]의 존재를 언급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일단 고려시대 자화상의 존재가 기록으로나마 확인된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는 자화상은 매우 적다. 초상화는 상당히 많지만, 자화상은 윤두서와 강세황이 그린 것을 꼽을 정도이다.

윤두서 자화상의 특징은 얼굴과 수염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초상화는 일반적으로 전신이나 상반신을 표현하는데, 윤두서 자화상은 몸체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하면 종이 뒷면에 그려진 도포의 전체 윤곽과 옷깃, 동정까지 확인된다. 초반 작업에서는 도포 부분을 뒷면에 그렸던 것이다. 작품 완성 단계에서 상반신 부분을 생략한 것이 어떤 의도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얼굴과 수염이 부각됨으로써 그의 모습에 오묘하게 빠져들게 하였다.

조선시대 초상화 대부분이 주인공의 복식에 많은 부분을 할애함으로써 그의 지위가 나타내는 풍모를 드러내려 했다면, 윤두서의 자화상은 얼굴을 부각하여 그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 만큼 얼굴은 매우 입체적이다. 음영을 주어 눈 주변, 코와 볼 사이, 턱의 주름을 표현하였고, 양 볼이나 이마 등의 돌출된 부분에는 붉은색을 엷게 칠해 혈색을 나타냈다.

또 다른 특징은 매우 정밀하게 그렸다는 점이다. 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는 외모뿐 아니라 정신까지 표현해야 하고, 머리카락 하나라도 그 사람을 닮지 못하면 이미 그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은 오래전부터 보편적이었다. 윤두서의 그림도 예외는 아니다. 윤두서는 인물, 동물, 식물을 그릴 때에 종일 주목하다가 그 참모습을 얻은 다음에야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전 시기의 초상화보다 훨씬 정밀하게 인물이 표현되었다. 미세하고 가는 선은 다양하게 쓰였다. 탕건 안의 머리카락, 눈썹과 속눈썹, 구레나룻 뒤쪽의 귀 등도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가느다란 필체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쥐수염으로 만든 붓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5 윤두서 자화상의 예술적 가치

조선 후기에는 진경산수화, 풍속화 등의 새로운 경향이 등장하였다. 윤두서의 그림은 그런 변화들이 감지되는 첫 번째 사례이다. 특히, 일반 농민의 노동을 주제로 그린 그림은 풍속화의 유행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 후기 화단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는 옛사람의 그림을 배우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다. 윤두서 자화상도 기존의 초상화처럼 주인공의 참모습을 담으려 했다. 그런데 화폭의 대부분을 얼굴로 채움으로써 그 자신의 내면에 더욱 집중하려고 했던 시도가 돋보인다. 그의 얼굴은 매우 생동감 있는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상반신 초상화, 전신 초상화가 일반적이었던 조선시대에 윤두서의 자화상은 그림의 구도나 표현법 등에 있어서 매우 독창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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