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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隆健陵]

부모 곁에 있고픈 정조의 마음

1789년(정조 13)

융건릉 대표 이미지

융릉 능침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융건릉은 장조(莊祖, 사도세자)와 헌경황후(獻敬皇后, 혜경궁 홍씨)의 무덤인 융릉(隆陵)과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의 무덤인 건릉(健陵)을 합쳐서 부른 것이다. 융릉은 종래 현륭원(顯隆園)이었는데,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능호를 융릉이라고 하였다. 융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하나로 합쳐진 단릉으로, 1970년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건릉은 1800년(정조 24) 정조 사후 현륭원(융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했으나 1821년(순조 21)에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천장(遷葬)되어 합장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2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永祐園)에서 현륭원으로

장조(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 영조와 영빈(暎嬪)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 왕세자에 책봉될 정도로 부왕 영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이후 아버지와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급기야 1762년(영조 38)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을 고변하는 글을 영조에게 올리자, 대노한 영조가 그를 처형하고 세자를 뒤주에 가두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생하였다.

뒤주 속에 갇힌 세자가 8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홍화문(弘化門) 동쪽에 묘우(廟宇)를 세워 묘호를 수은(垂恩)이라고 하고, 수위관(守衛官) 2인을 두었다. 이후 영조는 세손(정조)을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 작업을 진행하였다. 먼저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수은묘(垂恩墓)를 원(園)으로 격상하여 영우원(永祐園)으로 했으며,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의 묘역이 비좁고 초라하다는 박명원(朴明源)의 주장에 따라 천장이 결정되었다. 천장지는 수원도호부에 있는 화산으로 정해졌고, 정조는 화성으로 묘역을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1815년(순조 15)에 혜경궁 홍씨가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나자, 순조는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3 융릉의 조성

융릉은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의 합장묘이다. 1899년(광무 3) 고종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장종(莊宗)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곧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라 하였다. 이처럼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현륭원도 능으로 격상되어 능호를 융릉이라고 하였다.

현륭원[융릉]은 세자의 묘였지만 왕릉에 가깝게 조성되었다. 먼저 능침 공간의 경우 봉분의 동서북 3면에 곡장을 둘렀다. 또한 왕릉에만 쓸 수 있는 난간석을 생략하는 대신 모란과 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세웠다. 병풍석 상단 인석(引石)은 연꽃 봉우리 모양으로 조각하고 12방위를 한 것이 특징이다. 상석의 경우 합장묘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개를 놓지만, 융릉은 상석을 하나만 배치하였다.

이 외에 문무인석(文武人石) 각 1쌍, 장명등(長明燈), 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석수(石獸)를 배치하였다. 문인석은 기존 왕릉이 복두(幞頭)와 공복(公服)을 갖춘 것과 달리 머리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입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인석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상으로 만들었다. 다른 원(園)에서는 무인석이 없기 때문에 현륭원이 왕릉에 가깝게 조영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명등은 팔각 형태로 만들었으며, 망주석에는 구름이나 모란의 문양을 새겼고, 기둥에는 세호(細虎)를 조각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板位), 향로와 어로, 수라간, 수복방, 정자각, 비각 등이 설치되어 있다. 융릉의 구성상 특징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또한 연지는 일반적으로 방지원도(方池圓島)의 형태인 데 반해, 융릉의 곤신지(坤申池)는 원형으로 조성되었다. 비각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다. 하나는 정조가 직접 지은 현륭원비로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이라고 쓰여 있으며, 하나는 대한제국 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으로 ‘대한장조의황제융릉헌경의황후부좌'(大韓蔣祖懿皇帝隆陵獻敬懿皇后附左)’라고 쓰여 있다.

4 건릉의 조성

건릉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맏아들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1752년(영조 28) 태어났다. 이후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영조 51)부터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했으며, 이듬해인 1776년(영조 52)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즉위 후 수많은 정책을 시행하였다. 정치적으로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 정책을 계승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였다. 또한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이를 통해서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서적 간행 및 활자 개발에도 힘을 기울였다. 경제적으로는 통공(通共) 정책을 추진하여 자유로운 상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아울러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한 이후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였다. 1795년(정조 19)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 행궁에서 열기도 하였다. 정조는 화성의 건설을 군사적 기능 뿐 아니라 자신이 진행하는 개혁의 시험무대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세자가 15세가 되면 정치에서 은퇴한 후 어머니와 함께 화성에서 머물 계획이었다.

이러한 의도와 달리 정조는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순조는 아버지의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하였으며, 능호를 건릉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1월 화성의 현륭원 동쪽 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생전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천장한 이후 현륭원에 자주 참배하였고, 그 때마다 아버지 묘 주변의 산을 순행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살펴보았다. 아버지 묘 곁에 자신의 능을 조성하고자 했던 정조의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강무당 터를 산릉으로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821년(순조 21) 3월 효의왕후 김씨가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승하해 건릉에 합장하고자 했지만, 김조순(金祖淳)이 건릉 초장지가 풍수지리상 문제가 많다는 이유를 들며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순조는 천릉할 자리를 알아보라고 지시했으며. 파주 교하의 장릉 재실 뒤편, 화성 옛 향교터, 현륭원 국내 등이 천릉할 자리로 논의되었다. 그 결과 현륭원 국내의 땅보다는 화성 향교 터가 길지라고 하여 이를 천릉지로 결정하였다.

5 융릉과 흡사한 건릉의 구성

건릉은 융릉의 북동측 능선에 있다. 1821년(순조 21) 천릉할 곳이 옛 건릉과 가까웠기 때문에 새로 조성할 건릉에 배치할 석물은 모두 기존의 것을 그대로 옮겨와 활용하였다. 천릉 당시 새로 건립된 건물은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 재실, 홍살문 등이다.

합장릉인 건릉은 능침의 구도와 상설에 있어 융릉과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다. 융릉과 다른 점이 있다면 건릉은 능침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두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지인 천년지(千年池)는 융릉의 곤신지가 원형인 것과 달리 일반적인 방지원도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세부적으로 석물들의 모습을 보면, 장명등과 문무인석, 석수 등은 구조 및 규모 등에서 융릉을 그대로 계승하여 매우 유사하였다. 망주석은 좌우로 각 1기씩 배치되었는데, 조선후기 세워진 것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망주석의 기둥에는 세호가 조각되었는데, 좌측의 것은 세호가 위쪽을 향하고 있으며, 우측의 경우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융릉과 마찬가지로 입체적으로 만들어 졌으나 머리, 등갈기, 꼬리 등이 사실감 있게 표현되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향어로는 융릉과 마찬가지로 가장자리에 장대석을 놓고 안쪽으로 박석(薄石)을 깔아놓았다.

이러한 융건릉은 1987년 건릉 비각 복원 공사를 시작으로, 1995년에는 융건릉의 재실 및 정자각 보수 공사를 실시했다. 또한 2002년에는 수복방을 복원했으며, 2008년에는 건릉 향어로 보수를 완료하는 등 왕릉의 원형 보존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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