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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비 갠 뒤 인왕산의 풍경을 그리다

1751년(영조 27)

인왕제색도 대표 이미지

정선 필 인왕제색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인왕제색도〉는 겸재 정선이 76세 되던 해인 1751년(영조 27)에 그렸다. 가로 138.2cm, 세로 79.2cm의 크기의 종이에 그린 수묵화이다. ‘인왕제색’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인왕제색도〉는 단순하면서 대담한 구도와 흑백의 대비를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인왕산의 모습을 사실에 가깝게 충실히 표현하였다. 현재 〈인왕제색도〉는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선의 진경산수화 가운데 〈금강전도(金剛全圖)〉와 함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2 인왕제색도의 작가, 정선의 삶

정선은 1676년(숙종 2)에 아버지 정시익(鄭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자는 원백(元伯)이다. 널리 알려진 겸재(謙齋)는 그의 호이며, 난곡(蘭谷)·겸초(兼艸)로도 칭하였다.

겸재 정선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북촌인 순화방(順化坊) 유란동(幽蘭洞) 백악산 밑에 살았다. 이곳은 현재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지역이다. 정선의 집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10살 때부터 집안을 돕기 위해 일을 했으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선은 20대에 연안 송씨(延安宋氏)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당대의 노론 권세가였던 김창집(金昌集)의 후원으로 40대 이후에 관직을 갖기 시작하였다. 세자익위사 소속으로 왕세자의 시위(侍衛)를 담당하는 종6품의 위수(衛率)를 비롯하여, 46세인 1721년(경종 1)부터 1726년(영조 2)까지 경상도 하양 현감(河陽縣監)을 지냈다. 2년 뒤인 1728년(영조 4)에는 한성부 주부를 지냈다. 1727년(영조 3) 정선은 유란동에서 인왕산 동쪽 인왕곡으로 이사를 했으며, 여기서 30년 이상을 거주하였다.

1740년(영조 16)부터 1745년(영조 21)까지는 양천 현령(陽川縣令)을 지냈는데, 이때 서울 근교와 한강변의 풍경들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1754년(영조 30)에는 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의 직임을 맡았다. 정선이 81세가 되던 해 영조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종2품까지 올려주면서 예우하였다. 그는 80세가 되어서도 안경을 여러 개 겹쳐 끼고 촛불 아래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몰두하였다.

그림에 있어서 정선은 아름다운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자기만의 독창적인 화법으로 진경산수화라는 화풍을 창안해 내었다. 그는 전국을 여행하며 이름이 있는 산들의 경치를 관찰하고 이를 작품화하였다. 특히 정선의 그림은 금강산, 서울과 그 근교, 한강 주변의 경치 등을 그린 것이 많았다. 그는 전통의 수묵화법이나 채색화를 이어나가면서 여러 번 먹을 덧칠하는 적묵법(積墨法) 등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필묵법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예술적 식견은 당시 대표적인 시인인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인물화에 뛰어난 사대부 화가 조영석(趙榮祏, 1686~1761)과 어울려 지내면서 더욱 넓혀갔다. 특히 이병연과의 교우를 통해 회화에 대한 창의력을 신장시켰을 뿐 아니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생활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정선은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잇지만 실경을 그림에 있어서 사진과 똑같은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3 친구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담은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의 비가 갠 모습을 의미한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인왕제색 겸재(仁王霽色 謙齋)’라고 하여 작가의 이름과 함께 그림의 제목 및 그린 장소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아래에는 정선의 호인 ‘겸재(謙齋)’가 음각으로 찍힌 백문방인(白文方印, 글씨가 하얗고 바탕이 붉은 사각형의 도장)과 정선의 자인 ‘원백(元伯)’이 양각으로 새겨진 주문방인(朱文方印, 글자를 양각으로 새겨 글씨가 붉게 나오는 사각형의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다. 또한 옆으로 ‘신미 윤월 상완(辛未潤月上浣)’이라고 써서 〈인왕제색도〉가 1751년(영조 27) 윤5월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1751년은 정선의 나이가 76세인 해로 〈인왕제색도〉가 고령에 그린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남긴 그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대표적인 진경산수화이다. 정선은 〈인왕제색도〉에서 여름날 한차례 비가 지나간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인상적인 순간을 표현하였다. 그림의 상층부는 화면을 압도하는 인왕산 바위를 가득 표현하여 단순하면서도 대담하게 배치하였다. 실제로 보면 인왕산의 바위 모습은 흰빛에 가까운데 정선은 비에 젖은 암벽의 중량감을 무거운 느낌으로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이를 위해 정선은 담묵(淡墨)에서 농묵(濃墨)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덧칠하였으며, 위에서 아래로 반복적으로 내려 긋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하층부 산 아래는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의 모습과 자욱한 안개를 표현하였다.

특히 정선은 근경을 농묵으로 중경과 원경으로 갈수록 담묵으로 그리는 상징적인 산수화의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멀리 있는 인왕산을 농묵으로 대담하게 그리는 독특한 표현법을 사용하였다. 아울러 〈인왕제색도〉에는 인왕산 돌산의 무거움과 강함을 누그러뜨리는 여러 장치가 존재하고 있다. 인왕산의 강렬함을 받쳐주는 것은 바로 산등성이 아래로 자욱이 깔려있는 안개이다. 안개 부분의 경우 붓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보는 사람의 눈에 뿌옇게 낀 안개로 보이도록 했다. 정선은 대조의 방법을 통해 텅 빈 여백의 안개가 농묵의 강하고 무거운 인왕산 봉우리를 가볍게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전경에 빽빽한 숲은 겸재 특유의 T자 모양의 소나무로 표현되었다. 또한 안개와 능선은 엷게, 바위와 수목은 짙게 처리하여 흑백의 대비를 주어 산의 굴곡을 처리하였다.

그림의 시선은 산 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으로 근경에 위치한 집은 지붕이 내려다보이고, 산 위쪽은 멀리서 위를 쳐다보듯이 그려 인왕산을 직접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표현하였다.

그림 속 근경에 위치한 지붕만 보이는 집은 당시 정선과 60년 지기로 알려진 이병연의 집으로 추정된다. 그와의 우정은 정선이 그린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화환상간〉은 양천현의 현령으로 정선이 부임하자 친구인 이병연이 자신의 시와 정선의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내자고 제안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는 늙은 소나무의 가지가 드리워진 풀밭에 정선과 이병연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시와 그림을 바꿔보자고 약속을 하고 있다. 몸집이 작으면서 등을 보이는 노인이 정선이고, 정면에 앉아있는 몸체가 큰 노인이 이병연이다.

이렇게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았던 친구인 이병연이 팔순이 넘어 병에 걸리자, 정선선은 친구의 병이 하루빨리 낫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인왕제색도〉를 그렸다고 한다. 당시 『승정원일기』 기록의 날씨 상황을 보면,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다가 윤5월 25일 오후가 돼서야 갰다. 따라서 〈인왕제색도〉는 이날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오랫동안 비가 내린 뒤 개인 인왕산의 모습은 바로 친구 이병연이 병을 극복하고 쾌차하기를 기원하는 정선의 마음인 것이다. 이병연은 이런 정선의 마음도 모른 채 〈인왕제색도〉를 완성한 4일 뒤 세상을 떠났다.

〈인왕제색도〉를 보면 그림의 위쪽 중앙의 인왕산 산봉우리가 약간 잘린 듯이 보인다. 원래는 정선이 인왕산의 봉우리까지 모두 그렸는데 그림을 보수하고 표장하면서 잘려나간 것이라고 한다.

4 정선의 그림을 사랑한 심환지

노론의 명류로 영의정을 지낸 심환지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서책과 본인이 사거나 얻은 장서, 정조로부터 받은 서책 외에 동시대 화가들의 그림과 중국의 그림을 수장했다. 그는 서울 북촌의 삼청동에 거주하면서 장동 김씨(壯洞金氏, 안동 김씨 세력의 한 분파)를 비롯한 경화사족(京華士族)들과 교류하며 조선 후기 유명한 서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였다. 특히 심환지가 역대 화가 중 가장 수집하려고 애쓴 작품이 정선의 그림들이었다. 그는 정선을 일컬어 ‘우리나라 화가의 스승’으로 극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선이 죽은 뒤 그의 손자 정황(鄭榥)이 관리하던 정선의 그림 7점을 구입하여 수장하였다. 심환지가 수장했던 정선의 그림으로 대표적인 작품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인왕제색도〉이다.

심환지는 1802년(순조 2) 생을 마치기 전에 이 두 작품을 수집하여 발문을 남겼다. 〈인왕제색도〉에는 심환지의 발문이 별지(別紙)로 첨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문은 심환지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02년(순조 2)에 쓴 것이다. 그의 문집인 『벽산여고(碧山餘藁)』에 ‘제화산수장(題畵山水障)’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러한 〈인왕제색도〉는 이후 청송 심씨 문중에서 벗어나 일제강점기 대동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최원식(崔瑗植)이 수장했다가 현재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다.

5 인왕제색도의 예술적 가치

정선이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만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힘찬 붓질, 화면 가득한 구도 등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리하여 실제 인왕산 바로 앞에 서 있는 듯한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림 속 인왕산의 모습은 현재 서울 효자동 방면에서 보고 그린 것으로, 실제 모습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종래 산수화가 형식에만 치우쳐 중국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했던 당대 화가들과 겸재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며, 화법에 있어서도 남종화도 북종화도 아닌 한국 전통회화의 개성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왕제색도〉는 1984년에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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