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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日省錄]

조선 후기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하다

1760년(영조 36) ~ 1910년(순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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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일성록』은 1760년(영조 36) 1월부터 1910년(융희 4) 8월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의 주요 내용을 담은 일기형식의 기록이다. 정조의 세손 시절 개인일기인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서 시작되었다. 1783년(정조 7) 국정 업무가 늘어나자 규장각 관원들이 시정(施政) 관련 내용을 작성하고 왕이 재결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총 2,329책이며, 1973년 국보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2 정조의 개인일기가 국정일기가 되다

『일성록』은 정조의 세손 시절 개인 일기인 『존현각일기』를 기반으로 서술되었다. 존현각은 경희궁에 있는 왕세자의 건물로, 정조가 세손 시절 활동했던 곳이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반드시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그날의 언행과 동정을 기록하여 자신을 성찰하는 자료로 삼았다. 즉위 후인 1781년(정조 5)에는 작성된 일기를 후세에 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규장각 각신(閣臣), 승정원 승지, 홍문관원 등에게 일기의 편찬 작업을 지시하였다. 이때 정조는 “일기의 범례를 잘 만들지 않으면 『승정원일기』와 다를 바 없다.”고 하며, 일기의 범례를 제대로 만들어 『승정원일기』와의 차별성을 둘 것을 강조하였다. 편찬하는 일기의 제목으로 ‘일성록(日省錄)’, ‘월계록(月計錄)’을 합한 ‘일월통편(日月通編)’ 등이 제시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일성록’으로 명명했다. ‘일성록’은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하루 세 번 자기 몸을 살핀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1783년(정조 7) 이후 처리한 정사가 많아지면서 『일성록』의 책 수가 증가하자, 『일성록』의 편찬은 규장각에서 전담하게 되었다. 정조는 규장각의 당직 관원에게 지시하여 왕에게 올린 장소(章疏, 上疏), 주계(奏啓), 경연에서의 대화, 조보(朝報. 조정에서 내는 신문 형태의 소식지), 전교, 비답 등을 체재에 맞게 기록하도록 했다. 당직자는 왕의 지시를 받아 이를 수정하고 5일마다 초본을 정서(正書)하여 왕에게 아뢰었다. 초본을 작성할 때에는 조보 등을 살펴 오자(誤字)나 누락된 조목이 없는지 살폈으며, 정서로 바꿔 쓸 때에는 일의 순서가 바뀌지 않도록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1785년(정조 9) 일차적으로 『일성록』 100권을 완성하였는데, 『존현각일기』 외에 『승정원일기』 등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이러한 『일성록』은 정조 개인의 일기에서 벗어나 국가의 모든 조치와 정치상의 명령, 관리의 출척, 상벌 등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어 대신들이 국정에 참고하는 자료가 되었다. 그리하여 『일성록』은 정조 말년에 이르면 총 675책이 완성되었다. 『승정원일기』가 한 달 단위로 정리되어 왕에게 보고된 것에 비하면, 『일성록』은 5일마다 정리되었다. 처음에는 국정의 자료들을 매일 편집하고 수정했으나, 규장각의 업무가 많아 관원들이 쉬는 것조차 어렵게 되자 5일로 변경한 것이다. 『일성록』을 5일마다 정리하여 보고한 것은 일기의 작성 단계부터 국왕이 확인하고 수정하려는 뜻과 함께 정보를 신속히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따라서 정조는 『일성록』을 제대로 작성하지 못할 경우 편찬을 담당한 각신들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기도 하였다.

3 『일성록』, 『승정원일기』와 체제를 달리하다

『일성록』은 국정의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했다는 점에서 『승정원일기』와 공통점이 많았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 출입한 문서들을 내용의 중요도에 상관없이 모두 기록하여 국왕이 일목요연하게 열람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일성록』은 열람에 편리하도록 편찬 범례를 정하고, 국정의 중요 자료들을 편집, 정리하였다.

『일성록』은 체제 면에서 1일마다 판면(板面)을 달리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기사는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기재하는 방식을 갖추었다. 강은 개별 기사의 핵심 제목으로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목에서는 기사의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국정의 일이 아니더라도 기록할 필요성이 있을 경우 별도로 1목으로 하였다. 입직한 검서관이 여러 문서를 모아 편집해서 초본을 만들면 규장각 각신(閣臣)이 교감하고 정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일성록』에는 하루의 기사가 끝나는 마지막 항에 입직한 규장각 각신과 검서관(檢書官)의 성명이 쓰여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정조의 왕세손 시절인 1760년(영조 36)부터 1776년(영조 52)까지 『일성록』의 기록은 29책으로 매우 소략하다. 대체로 정조가 왕세손으로 해야만 했던 강학(講學), 강론(講論), 문안(問安) 등의 내용과 국왕 영조의 거동 및 정치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한편, 이 시기 『일성록』은 영조를 상(上)으로 썼으며, 정조는 영조와 구별하여 나를 의미하는 여(余, 予)로 썼다.

정조 즉위 이후부터 『일성록』은 다른 사료보다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성록』에 수록된 기사는 국가 운영의 참고 자료로 쉽게 이용될 수 있도록 천문류(天文類), 제향류(祭享類)를 비롯하여 임어소견류(臨御召見類), 반사은전류(頒賜恩典類), 제배체해류(除拜遞解類), 소차류(疏箚類), 계사류(啓辭類) , 초기서계별단류(草記書啓別單類), 장계류(狀啓類), 과시류(科試類), 형옥류(刑獄類) 등 총 11개로 분류되었다.

천문류에는 비, 우박, 우뢰, 서리가 내린 시간과 강수량 등 기후 변화를 기록하였다. 제향류에는 국가의 정기적인 각종 제사의 날짜 및 점검사항, 기우제의 준비 과정과 시행 내용 등이 서술되었다. 임어소견류는 국왕이 행차하여 신하들과 함께 만나는 소견(召見)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조강(朝講), 주강(晝講), 별강(別講) 등 경연을 행한 장소와 좌목, 소대(召對), 차대(次對), 윤대(輪對), 상참(常參) 등에서 소견한 관리들의 관직과 성명 등이 기재되었다. 반사은전류에서는 문무 관원과 백성들에게 내린 은전 및 휼전 등을, 제배체해류에서는 문무관원의 인사에 대한 절차 및 결과 등이 서술되었다. 소차류는 말 그대로 관원 및 유생이 올린 상소(上疏), 차자(箚子)에 대한 내용과 왕의 비답에 관한 기록이며, 계사류는 의정부, 비변사, 승정원, 삼사 등에서 국왕에게 아뢴 내용과 왕의 비답에 대한 기록이다. 초기서계별단류(草記書啓別單類)와 장계류에는 주요 관사에서 왕에게 보고하는 서계와 별단, 관찰사, 병사(兵使), 수사(水使) 등이 그들의 직무와 관할 구역의 일을 왕에게 보고하는 장계가 주요 내용이다. 과시류는 각종 과거와 관련된 내용 등이며, 형옥류는 위법행위를 한 관원의 처벌과 전국 범죄인에 대한 심리 및 판결 등에 대한 기사들이다.

『일성록』의 내용 가운데 상소와 차자는 중요한 내용만 간략하게 기재한 반면, 임금의 명령을 백성에게 알리는 문서인 조서(詔書)는 전문을 수록하였다. 또한 왕의 윤음, 비답, 판문은 전문을 기록하였으며, 신하들의 상주(上奏)와 계문은 긴요한 부분만 발췌 기록해 요점을 쉽게 파악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일성록』은 『승정원일기』에 비해 글은 간결하지만, 내용은 상세하게 담겨 있는 장점이 있다.

4 정조, 『일성록』에 형옥류(刑獄類)를 기록하다

정조는 형정(刑政)을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 중 하나라고 여겼다. 따라서 이러한 정조의 의지는 『일성록』에 형옥류가 기재되는 단초가 되었다. 『일성록』에 기록된 형옥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관직자의 죄과에 대한 왕의 처벌이다. 주로 관리의 죄과에 대한 심문이나 죄가 있는 관리의 파직(罷職) 및 체포에 관한 내용이다. 둘째, 각 도의 관찰사가 해당 도에서 일어난 위법행위를 왕에게 보고하는 장계가 서술되어 있다. 장계의 내용으로는 관할 수령의 죄상, 해당 도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에 대해 왕에게 아뢰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셋째, 의금부 및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는 죄인의 죄상과 처리 과정이다. 구체적으로는 죄인의 죄상을 조사한 후 석방하는 감방(勘放), 죄상을 대신과 의논해서 처리하는 의처(議處), 법률을 적용하는 조율(照律) 등을 명하는 내용이다. 넷째, 죄인에 대한 죄상, 형량, 정배지에 대한 내용이다.

다섯째, 괘서, 변란, 역모, 사학, 왕릉 방화 등을 행한 중죄인의 처벌이다. 여섯째,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상언이나 격쟁이다. 일곱째, 형조에서 처결한 살옥안이다. 살인사건에 대한 초검(初檢)과 복검(覆檢), 범죄의 원인, 사망원인,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의 분간, 범죄인에 대한 형조와 대신의 논의, 이에 대한 국왕의 판결 등이 주로 서술되어 있다. 여덟째, 유배 죄인 및 한성부에서 발생한 경범 죄수의 석방 수효이다.

이러한 『일성록』의 형옥 관련 기사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실리지 않았다. 『일성록』에만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일성록』은 18~19세기 범죄 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1차 사료이며, 범죄의 유형과 발생 건수를 계량화하여 범죄의 시기별 추이, 지역적 특성, 민의 실태 등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5 『일성록』의 자료적 가치

『일성록』은 151년간의 거대한 국정일기이다. 긴 기간에도 불구하고 『일성록』의 결본은 29개월 33책뿐이다. 『일성록』이 자료로서 갖는 특징은 체제 면에서는 규장각에서 국왕이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매일의 일을 강목(綱目)체제로 묶어 편찬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일성록』은 기록의 작성과 열람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내용 면에서는 연대기 자료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중요한 사료가 많이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조의 의주(儀注, 각종 의식의 상세 절차), 관찰사의 장계, 암행어사의 서계별단(書啓別單, 수령의 치적 여부와 고을과 백성의 병폐를 처리하고 난 후의 보고 문서), 사대교린문서, 사행견문별단(使行見聞別單), 의금부와 형조의 형옥(刑獄) 기사, 상언 및 격쟁 등에 관한 자료가 그 예이다.

그 가운데 『일성록』에는 정조대에서 고종대까지 국가에서 파악한 범죄가 대부분 기록되어 시기별 범죄 실태를 누락된 연도 없이 살펴볼 수 있다. 내용면에 있어서도 관찰사와 형조의 조사 보고인 도계(道啓)와 조계(曹啓), 살옥 범죄일 경우 검험 내용, 범죄인의 심리와 판결 등을 용이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18~19세기 국가의 형정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일성록』은 연대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료적 한계는 있다. 『일성록』은 1873년(고종10) 경복궁의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어 총 1,874책 가운데 26.3%인 492책이 개수(改修)되었다. 정조대가 29.8%로 가장 많이 개수되었으며, 순조대가 19.8%, 헌종대가 17.6%, 철종대가 5.5%였다. 『일성록』의 개수 본은 원본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취사, 첨삭이 가해졌기 때문에, 내용면에서 원본보다 소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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