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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自擊漏]

표준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동시계

1433년(세종 15)

자격루 대표 이미지

창경궁 자격루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자격루는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이다. 명칭 자체도 스스로 쳐서[자격(自擊)]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루(漏)]라는 뜻이다. 자격루는 1433년(세종 15)에 장영실蔣英實) 등이 완성하였고, 그 이듬해인 1434년(세종 16) 7월 1일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격루는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지어 작동시켰기 때문에 보루각루(報漏閣漏)라고 불렸으며, 궁궐 내에 있어서 금루(禁漏)로도 칭해졌다. 그러나 장영실이 만든 것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자격루는 1536년(중종 31)에 세종 대의 것을 개량한 것이다. 파수호(播水壺, 물을 담아 다음 항아리로 흘려보내는 항아리) 3개, 수수호(受水壺, 물을 받아서 부표와 잣대를 띄우는 항아리) 2개의 물통만 남아있어 원래의 완벽한 모습은 아니다. 수수호에는 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중종 대 제작에 참여한 인물의 이름 등이 새겨진 명문이 있다. 파수호에는 ‘가정병신 6월 일 조(嘉靖丙申六月 日造)’라는 명문을 통해 1536년의 제작 연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에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는 잣대와 부전(浮箭, 浮子, 수수호 안에 띄우는 살대)이 소장되어 있다.

중종 대 만들어진 자격루는 창경궁 보루각에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으로 옮겨 전시되었다. 2018년에는 보존처리 작업에 들어갔으며, 2020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 정확한 시계가 없던 시절

오늘날 우리들은 정확한 시간을 기반으로 1분 1초를 다투며 살아가지만, 옛사람들은 해, 달, 별에 의지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경에 종사했던 시절에 의식주 뿐 아니라 시간 측정도 자연에 의지하였던 것이다. 날씨가 나빠서 해, 달, 별의 움직임이 평상시와 다를 때에는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시간의 흐름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당시의 시간관념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하루는 12시(十二時, 子時부터 亥時까지)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뜨는 시각을 기준으로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라는 시보(時報, 시간을 알려줌) 제도가 시행되었다. 저녁 9시 즈음(2경)의 인정 때는 28번의 종을 울렸고, 새벽 4시 무렵(5경 3점)의 파루 때에는 33번의 북을 쳤다. 이는 해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계절마다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별도로 밤에는 시간을 초경(대략 오후 7시∼9시), 2경, 3경, 4경, 5경(대략 오전 3시∼5시)으로 나눴다. 여기서 1경은 다시 5점(點)으로 나뉘었다.

사람들이 자연 현상에 의거하여 파악한 시간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정확한 표준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제반 조치를 시행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는 한양 한복판에 종루(鐘樓)를 세워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었고, 그곳에 경루(更漏)라는 물시계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종 즉위 이후에는 파루, 인정 제도를 시행하여 도성 문의 개폐 시간을 알려주었다.

3 세종대의 천문, 역법, 시계의 발달

국가에서 백성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던 조치들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있는 ‘관상수시(觀象授時)’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즉, 예로부터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는 천문 현상을 관찰하고 역법을 고안해서 백성에게 농사 지을 시기를 알려주는 것이 주요하게 고려되었다. 정확한 시간과 절기에 기초한 농경은 생산물의 증대로 이어지고, 생산물이 늘어나면 국가 재정이 안정적으로 확보되며 백성의 삶의 질도 향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군(聖君)’ 세종 역시 천문, 역법, 시계의 발달에 주목하였다. 이론 연구에 그치지 않고, 실제 천문 관측 및 시간 측정의 실험 결과가 서로 일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자격루·옥루(玉漏) 등의 물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 등의 해시계, 혼천의(渾天儀)·간의(簡儀)·규표(圭表) 등의 천문 기구가 대거 제작되었다. 이러한 여러 천문의기와 시계의 제작은 개별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발전시키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졌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편, 자격루 이전에 ‘누기(漏器)’라는 물시계가 먼저 제작된 바 있었다. 1424년(세종 6)에 세종은 중국의 체제를 고찰하여 궐내에 경점(更點, 밤 시간의 단위)을 알리는 기구[更點之器]를 구리로 주조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옆에 사람이 지키고 있다가 떠오르는 잣대 눈금을 읽어서 시간을 알려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착오가 많았다. 게다가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실수하게 되면 중벌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약 10년 후 1433년(세종 15)에 장영실이 제작한 자격루는 오류 없이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자격루는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고, 일정한 시간에 구슬을 이용하여 신호를 보내는 장치였다. 이 신호와 동시에 다른 구슬이 지렛대를 작동하여 인형이 종을 치게 하였고, 그 시각에 해당하는 12지(十二支) 인형이 차례로 시간을 알려주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인형이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게 되면서 이후 물시계에는 시간을 측정하는 사람이 있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이로써 시각을 잘못 알려준 사람에게 중벌을 가하는 일도 사라졌다.

4 자격루의 과학적 원리

자격루는 중국의 누각법(漏刻法)과 수시력(授時曆) 등을 참고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안되었다. 집현전학사 김돈(金墩)이 쓴 「보루각기(報漏閣記)」에는 자격루의 제작 동기와 원리, 구조와 특성, 제작을 위해 참고한 서적과 기구, 장영실의 출신과 임무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김빈(金鑌)이 쓴 「보루각명(報漏閣銘)」에서는 자격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시간의 표준을 정립한 세종의 공적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자격루는 물시계와 시보장치로 구성되었다. 즉, 아날로그 물시계와 디지털 시보장치의 결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시계는 12시를 측정하였고, 시보장치는 12시와 밤의 5경점을 알려주었다. 자격루의 핵심은 자동 시보가 가능한 장치가 있었다는 점인데, 자시(子時)부터 해시(亥時)까지 시간마다 종을 한 번씩 울렸다. 그리고 밤에는 경마다 인형이 북을 치고, 점마다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했다.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선 크고 작은 파수호 4개에서 물이 흘러내리면 원통형인 수수호로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유압을 일정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2개의 수수호에 하루를 12시 100각으로 등분한 부전을 각각 넣었다. 수수호 2개를 번갈아 사용했는데, 수수호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서 일정 눈금에 닿게 되고, 거기에 있는 지렛대 장치인 방목(方木)을 건드려 그 끝에 있는 쇠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그 쇠구슬이 떨어지면서 동판의 한 면을 치면, 동력이 전해져서 나무로 된 인형 3개가 종, 북, 징을 쳐서 시보장치를 움직인다. 그리고 나무인형 둘레에는 12지신 인형을 배치하여 각 시각을 알리도록 했다. 해당 시간이 되면 종이 한 번 울리고 나서 십이지 인형이 등장하는데, 그 인형은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두 시간 동안 전시되었다. 언제든지 시간을 파악할 수 있게 한 조처였다.

1438년(세종 20)에 장영실은 기존 자격루에 천체 변화까지 부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옥루(玉漏)를 제작하였다. 세종 대에 자격루를 제작한 무렵부터 1438년까지는 대규모의 천문의기 제작 사업이 이루어졌는데, 장영실은 물시계와 천체의 변화를 알려주는 천문 시계를 결합하였던 것이다. 옥루 역시 자동시계로 시간과 천상(天象)이 표시되도록 하였고,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관리하였다.

5 세종대 이후의 자격루

세종 대 이후에도 자격루가 사용되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거나 개보수가 잘 행해지지 않은 모습이 여러 차례 확인된다. 단종 대에는 자격루나 보루각을 개수하는 작업이 잘 진행되지 않았고, 관련 기술을 아는 사람도 한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1469년(예종 1)에 자격루를 다시 설치하여 사용했는데, 예전과 달리 정확도 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경복궁의 자격루는 점차 낡았고, 보루각은 비가 샜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보루각이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1536년(중종 31)에는 새 보루각이 창경궁에도 세워졌다. 보루각도감(報漏閣都監)이 설치되었고, 도제조(都提調)에는 김근사(金謹思), 김안로(金安老)가 임명되었다. 낭관(郎官) 김수성(金守性)은 공사를 전담하였고, 자격장(自擊匠) 박세룡(朴世龍) 등이 제작을 맡았다. 이 자격루의 일부가 지금 덕수궁에 전하고 있는데, 2018년부터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보존처리와 분석조사를 시행한 결과 수수호 왼쪽 상단 명문이 드러나서 당시 참여한 도감의 관리와 장인들의 명단이 모두 확인되었다.

이처럼 자격루와 보루각의 보수는 꾸준히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에도 보루각도감을 두어 보수를 진행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보루각개수의궤』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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