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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朝鮮王陵]

조선 왕과 왕비의 무덤

미상

조선 왕릉 대표 이미지

구리 동구릉 내 현릉의 모습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 왕릉은 519년 동안 유지된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총 42기가 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2기가 있으며, 나머지 40기는 모두 경기도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조선 왕릉은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능지를 선정하였고, 도성 10리 밖에서 100리 이내에 자리 잡았다. 2009년 6월, 북한 개성에 있는 2기의 왕릉을 제외하고 40기가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 조선 왕릉의 입지 선정과 구조

조선 왕릉은 능지 선정 단계부터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해 조성되었다. 왕이 승하하면 새로운 왕은 국상(國喪)에 관한 의식을 주관하는 총호사(摠護使)를 임명하여 국장을 추진하였다. 또한 풍수에 정통한 지관에게 능지의 후보지를 물색하게 하는 등 국장의 주요 절차는 6개월 이내로 이루어졌다.

국상에서 가장 중요한 왕릉의 입지 선정에는 풍수지리 외에도 지역적 접근성이 고려되었다. 즉 왕릉은 풍수상 명당이면서도 도성에서 100리 이내의 지역으로 선정하였다. 이는 왕릉이 너무 먼 거리에 위치할 경우 능의 조성이나 왕의 능행에 어려움이 있고,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 등이 폐단을 일으킬 소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왕릉은 조선 초 개성에 조성된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과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인 후릉(厚陵),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외에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분포해 있다.

이러한 조선 왕릉은 진입, 제향, 능침의 세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진입 공간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으로 재실, 연지(蓮池), 금천교(禁川橋), 홍살문(紅箭門) 등이 있다. 제향 공간은 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나는 곳으로 판위(版位), 향어로(香御路), 정자각(丁字閣), 수복방(守僕房), 수라간(水刺間), 비각(碑閣) 등이 있다. 능침 공간은 죽은 국왕을 위한 곳으로, 언덕 위의 봉분을 중심으로 후면의 곡장(曲墻)과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배설되어 있다. 능침 앞은 상계(上階), 중계(中階), 하계(下階)의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상계 위쪽으로는 망주석(望柱石), 혼유석(魂遊石)을 비롯하여 봉분과 그 주변의 석물들이 배치되었다. 중계 위쪽으로는 문인석(文人石)과 석마(石馬),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하계 위쪽으로 무인석(武人石)과 석마(石馬)가 있다.

3 조선 왕릉의 대표, 동구릉

동구릉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동쪽에 있는 9기의 왕릉을 이른다. 1408년(태종 8)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건원릉(健元陵) 터로 조성되기 시작한 뒤 1855년(철종 6) 익종(효명세자)의 능인 수릉(綏陵)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17위의 왕과 왕비의 능이 모여 있다.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가 묻힐 당시에는 건원릉으로 불렸다. 이후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현릉(顯陵)과 선조와 그의 두 비 의인왕후(懿仁王后),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목릉(穆陵),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숭릉(崇陵)이 조성되면서 동오릉으로 불렸다. 이후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능인 혜릉(惠陵)과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능인 원릉(元陵)이 만들어지면서 동칠릉으로 불렸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의 능인 경릉과 문조(文祖)와 신정왕후(神貞王后)의 합장릉인 수릉이 조성되면서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왕릉의 형태는 건원릉, 휘릉, 혜릉은 단릉(單陵)이며, 현릉과 목릉은 이강릉(異岡陵)이다. 또한 숭릉과 원릉은 쌍릉(雙陵)이며, 경릉은 세 능이 이어져 있는 삼연릉(三連陵), 수릉은 합장릉이다.

이 밖에 동구릉 안에는 없지만 동구릉 동쪽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洪陵)과 순종과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유릉(裕陵)이 있다. 홍릉의 경우 정자각의 형태가 일자형이며, 석물들도 기린, 코끼리, 사자, 낙타 등을 배치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왕릉이 아니라 황제릉의 형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4 도성 밖 서쪽의 왕릉, 서오릉과 서삼릉

조선시대 한성부의 서쪽에도 왕릉이 조성되었다. 서오릉과 서삼릉이다. 서오릉은 서쪽에 5기의 왕릉이 군집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오릉에는 세종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가 묻힌 경릉(敬陵)의 조성을 시작으로, 예종과 안순왕후(安順王后)의 능인 창릉(昌陵),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가 묻힌 명릉(明陵),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능인 익릉(翼陵), 영조의 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의 홍릉(弘陵)이 있다. 서오릉에는 이 외에도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세자빈이 묻혀 있는 순창원(順昌園), 숙종의 후궁이었던 장희빈의 무덤인 대빈묘(大嬪墓),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수경원(綏慶園) 등이 있다.

경릉의 경우 아버지인 세종가 직접 묘지를 선정하였다. 일반적으로 왕릉의 경우 왕은 오른쪽에, 왕비는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그런데 경릉의 경우 왕과 왕비의 위치가 바뀌었으며, 왕비의 능이 덕종의 능보다 더 높은 위치에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의경세자가 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대군묘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명릉의 경우 인현왕후의 능이 가장 먼저 조성되었고 이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 옆에 묻혀 쌍릉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숙종은 생전 자신의 능을 간소하게 하도록 지시하였다. 따라서 명릉은 다른 왕릉보다 부장품이 간소화되고, 석물의 크기도 실물에 가깝게 작게 만들어 졌다. 장명등과 옥개 또한 다른 왕릉의 경우 8각형으로 만들었던 것을 4각형으로 제도화했다. 홍릉 은 영조가 왕비의 무덤을 만들면서 자신의 묘까지 쌍릉 형식으로 조성했다. 하지만 영조 사후 정순왕후와 같이 구리의 동구릉에 능이 조성되면서 홍릉 에 마련된 영조의 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서오릉 근처에는 또 다른 왕릉군인 서삼릉이 위치해 있다. 서삼릉은 인종과 인성왕후(仁聖王后)의 능인 효릉(孝陵), 중종의 계비이며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禧陵),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睿陵)이 있다.

5 서울 속 선정릉(宣靖陵)과 헌인릉(獻仁陵)

조선시대에 도성 안에는 왕릉을 조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서울 도심에는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의 능 정릉(靖陵)이 위치해 있다. 선정릉의 조성 당시 이 지역은 서울이 아닌 경기도 광주군의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1495년(연산군 1) 성종이 승하하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선릉이라고 했으며, 이후 1530년(중종 25)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가 죽자 중종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선릉에 안장하였다. 정릉(靖陵)은 중종의 능이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승하하자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인 희릉(禧陵)과 동원이강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풍수상을 문제로 지금의 위치로 천릉하였다.

또한 현재 서초구 내곡동에는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무덤인 헌릉(獻陵)과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능인 인릉(仁陵)이 있다. 이 두 능을 합쳐 헌인릉으로 부른다.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수강궁(壽康宮)에서 훙서하자, 태종은 대모산 기슭에 왕후의 능인 헌릉을 조성하였다. 이후 1422년(세종 4) 11월 태종이 승하하자, 세종은 어머니의 능인 헌릉에 태종의 능을 마련하였다. 헌릉은 쌍릉으로 조성되었으며, 태조 건원릉의 형식을 따랐다. 신도비, 소전대(燒錢臺) 등의 석물들을 볼 수 있어 조선 초 왕릉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그러나 합장릉임에도 상설들이 단릉과 같이 단출하고 소박하다. 원래 인릉은 1835년(헌종 1)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 곁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1856년(철종 7) 풍수상의 이유로 현재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6 국왕의 왕릉 행차

국왕의 능행은 건원릉이 조성된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능행이 결정되면 제일 먼저 날짜를 택일하고, 병조가 궁궐에서 주정소, 행궁, 능행지까지의 거리와 환궁 날짜를 알려주었다. 다음으로 국왕의 대가(大駕)를 시위하는 수가군(隨駕軍)의 수와 복색, 군율, 절차, 출궁과 환궁시의 도로 등을 정했다.

국왕이 왕릉을 참배하는 의식은 능행 3일 전에는 왕이 별전(別殿)에서 마음을 재계하고, 2일 전에 대신을 보내 종묘(宗廟)에 고하였다. 하루 전에는 충호위(忠扈衛)가 왕이 머물 수 있는 대차(大次)와 소차(小次)를 설치하였다. 능사(陵司)는 소속 부하를 데리고 능실(陵室)을 청소하였다. 원거리의 왕릉일 경우 하루 앞서 행궁에 이르러 재계하고 유숙하였다.

능행이 결정되면 능행로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능행로는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정비가 이루어졌지만, 주로 도성 밖 도로와 교량이 주 대상이었다. 이때 도로는 국왕의 가마가 쉽게 통행할 수 있는 넓이로 정비되었다. 능행로의 정비와 관리는 해당 지역 수령들이 담당하였다. 왕은 능행을 앞두고 해당 지역에 관원을 몰래 보내 횃불 설치와 능행로 정비과정에서 발생하는 민폐를 살피도록 하였다.

7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

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있는 조선 왕릉은 북한에 있는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제외 하고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유교사상이 투영된 조상 숭배의 전통, 풍수지리 사상에 근거한 자연경관과 공간 배치, 왕릉 내 석물 등의 조형 예술적 가치 등을 높게 평가하였다. 아울러 조선 왕릉의 조성 과정과 관리, 제례의식 등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 등을 통해 과거 능을 조성하고 관리했던 모습들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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